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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몬순 Jan 04. 2021

읽그 51. <표백>

장강명 지음 / 한겨레출판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이자 장강명 작가의 데뷔작인 <표백>. 이 작가의 책을 거의 다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이 작품을 읽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2011년에 발표했으니 딱 10년 전이다. 작가가 이름을 알린 계기가 된 첫 소설을, 새해 첫 소설로 읽었다는 의미부여부터 해보자.


'추천의 말'이 이 책 말미에 실려 있는데, 문제작이라는 평가가 압도적인 듯하다. 신형철 평론가는 '논쟁적이기를 마다하지 않는 작가의 등장'이 반갑다고 썼다. 소설은 청년들의 연쇄 자살을 다루고, 일련의 사건은 결국 도발적인 질문 하나로 귀결된다. 우리는 무엇으로 살아가는가. 작품 속에 등장하는 자살 사이트의 주소는 'whydoyoulive.com'이다.



외모와 목표를 성취하는 능력이 모두 탁월하고, 남들의 환심을 사고 그들을 조종하는 데 능한 이가 있다. 모든 일의 구심점이 된 인물, 세연이다. 어느 날 그가 죽었다. 수심이 50cm밖에 되지 않는 학교 안 연못에 빠져 죽었고, 사인은 실족사로 밝혀졌다. 단순한 사고라고 생각했던 세연의 죽음은 5년이 지나 그 실체를 드러낸다.


세연의 죽음은 주변 사람들의 연쇄 자살과 깊은 관련이 있다. 단순히 빌미를 제공하는 역할을 넘어 그들의 죽음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사실 집단 자살, 혹은 연쇄 자살이라는 개념은 낯설지 않다. 짐 존스와 같이 사람들을 현혹해 죽음으로 몰아간 종교 집단의 우두머리는 TV 프로그램과 영화의 단골 소재다.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것은 범죄의 잔혹성과 더불어 이해할 수 없는 그 집단행동의 동기다. 왜 평범한 사람들이 미친 이들의 논리에 열광하고,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일까.


이 책은 현대 한국사회의 특징이라는 맥락 속에서 청년들이 경험하는 우울과 좌절에서 설명을 찾는다. 한국은 짧은 기간 안에 고도성장과 민주화를 경험하고 이제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현재를 살아가는 청년들이 열정을 다해 이뤄낼 '위대한 과업'같은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자살을 권유하는 자들의 논리는 이렇다. 한국 사회는 청년들이 영웅으로 살아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완전한 사회에서 개인의 실패는 그 자신의 탓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영웅으로 태어난 이들이 영웅이 될 수 없는 사회. 소위 '자살 선언'이라는 것도 그런 배경에서 탄생했다.


부모 세대가 만들어놓은 무대 위에서 하찮은 욕망을 채우는데 시간과 열정을 허비하며 의미 없는 삶을 보내고 우리 세대가 별 볼일 없음을 시인할 것인가, 아니면 담대한 결단으로 그대 안에 있는 위대한 가능성을 증명하고 우리를 비웃어오던 세상에 충격과 공포를 줄 것인가. (p.208)


대다수가 실패자가 될 수밖에 없는 세상, 발버둥 친들 기껏해야 보잘것없는 개인의 성취밖에 이룰 수 없는 세상. 자살 권유자는 이 답이 정해진 세상을 탈출하는 방법이 자살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이 말도 안 되는 논리를 말이 되는 것처럼 진지하게 읽어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이 '자살 선언'에는 지금의 20대에 대한 통찰이 녹아 있다.  작가는 지독한 경쟁 속에서 의미를 잃고 허무를 느끼는 그들의 통증과 원인을 진단한다. 현세대가 느끼는 감정의 실체와 뿌리를 파악하기 위해 주의 깊게 관찰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무엇보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의 흡인력이 대단하다. 책장을 덮고 조금 시간이 지나서야 유치한 소영웅주의의 실체를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을 정도였다.


말도 안 되는 논리라고 일축해버린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2015년에 다시 쓴 '작가의 말'과 기본적으로 같은 의견이다. 살아가는 데 위대한 논리 같은 것은 필요가 없으며, 현재 이루어야 할 과업이 없다는 것은 섣부른 판단이다. 코로나19는 문제의 상자를 활짝 열어젖혔다. 우리는 취약 계층이 위기 상황에 더 취약함을 절실하게 깨달았고, 건강 불평등 문제에 직면하게 됐고, 기후 위기가 일상을 직접적으로 위협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2011년의 소설 주인공들이 2020년을 내다보지는 못했겠지만, 매 시대에는 각각의 과업이 있다. 그 과업 사이의 우열과 중요성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제3자의 위치에서 저울질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는 절대자일 것이다. 또는 자신이 절대자라고 믿고 있거나. 더 이상 위대한 도전이 남지 않았다고 선언하는 것은 지독한 자기중심적, 유아적 사고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20대에게는 위대한 일을 해낼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허락되지 않은 걸까. 초판 작가의 말에서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고 썼던 작가는 2015년 새로 쓴 작가의 말에서 또 다른 작품을 통해 '자살 권유자'의 논리에 반론을 던졌다고 밝힌다. <열정 금지, 에바 로드>가 그 책이다. <표백>에 나왔던 인물 중 하나가 그 책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역시 재미있게 읽었던 책인데, 이런 연결고리가 있었는지 몰랐다.



뚜렷한 질문을 던진 책을 읽고 나니 올해의 테마가 '질문'이 될지 문득 궁금해진다. 나는 누구이며,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은 무엇일지 진지하게 질문하는 시간이 될 것인가. 아니 그런데 새해 처음 읽은 책과 올 한 해 내가 맞닥뜨릴 일들이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새해를 맞아 그럴듯한 계시를 하이에나처럼 갈구하는 내 눈에 하필 이 책이 우연히 걸려들었을 뿐이다. 새해 첫 책으로 내 사주를 알아보겠다는 건 쌀알을 던지거나, 커피 찌꺼기를 살피는 것과 다름없다.


이 한해의 전반적인 기운이나 내 운수는 전혀 알 수 없고 미리 알고 싶지도 않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사실 언제부터인가 의식적으로 의미 부여를 좀 덜해보자고 자신을 억눌렀다. 1월 1일은 그냥 많은 금요일 중의 하나이며, 자고 일어나면 맞이하는 여느 날들과 전혀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안 된다. 나는 의미 부여하기를 좋아하는 인간이다. 남들이 보기에 하찮고 시시하고 뻔해 보여도 어쩔 수 없다. 어쩌면 이게 권태로움에 맞서는 내 방식일지도 모르겠다. 모두에게 각자의 의미 부여가 필요하다고 믿는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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