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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몬순 Dec 20. 2020

읽그 49. <이상한 정상가족>

김희경 지음 / 동아시아

있는 그대로의 너를 사랑해. 책이나 영화에서 적절한 순간에 이런 말이 나올 때마다 심장을 부여잡는다. 그 어떤 장밋빛 약속보다 달콤한 말이 아닌가. 이 마법의 대사를 말하는 순간 그 인물은 후광을 입는다. 어떤 신분, 계층, 외모를 지니고 있든, 극 중 어떤 과거가 있든 적어도 '꽤 괜찮은 사람'의 영역으로 순간 이동한다.


있는 그대로의 너를 사랑해. 무언가를 증명해야 하는 숙명을 타고 태어나, 경쟁으로 심신이 지친 현대인들에게 가장 잘 먹히는 말이 아닐까. 일종의 판타지다. 이렇게 생각하다가 문득 한 대상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것이 판타지라고 단정 지어 버리는 냉소적인 자아를 발견한다. 유니콘이 있었으면 하지만, 사실 세상에 유니콘 같은 건 없다고 굳게 믿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조건 없는 사랑의 가능성을 얼마나 믿는지에 따라 저 말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다를 것이다. 대사의 약발도 달라질 것이고.


꼭 경험해봐야 그런 사랑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조건 없는 사랑을 받는 동안 자신이 수혜자라는 것도 모르는 배부른 사람들도 많다. 반면 자신이 받지 못한 사랑을 기회만 되면 베풀겠다는 의지를 가진 사람도 많다. 경험의 결핍을 극복하겠다는 마음을, 결핍의 대를 끊겠다는 결심을 존중한다. 자신에게 남아있는 상처 대신 희미한 사랑의 흔적을 찾아내려고 하는 사람들을 존경한다.


어쨌든 사랑과 존중을 경험해봐야 다른 사람에게 잘 베풀 수 있는 가능성이 커지는 것 역시 맞는 말이다. 한 사람이 생애 처음으로 맺는 의미 있는 관계, 부모와의 관계가 중요한 이유다. 한 사람이 '사랑의 통로'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부모의 역할이 정말 중요하다. 아이는 성장하며 더 많은 사람과 더 넓은 세계를 만나지만, 세상을 보는 시각은 인생 최초의 순간부터 차곡차곡 형성된다. 성인이 되어 독립적으로 잘 살고 있다고 자부하다가도 성장기에 가족에게 받았던 상처의 흔적을 어쩌다 발견하는 순간이 있다. 꼭 극적인 사건이 아니더라도 나름의 크고 작은 무늬가 남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즐겁든 슬프든 특정 자극에 대응하고 나 자신을 일으켜 세우며, 나약함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해온 과정이 지금 내 모습을 만들었다.





책 <이상한 정상가족>을 읽으며 굳이 노력하지 않고 어린 시절의 기억을 띄엄띄엄 만났던 나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책은 자녀가 부모의 소유물로 취급되는 현실을 지적하는 것으로 포문을 연다. 한국 사회에서 아동은 취약계층 중 하나다. 가정이나 학교의 체벌 금지 조항은 '나도 맞으면서 자랐지만 잘 자랐다', '훈육도 금지시키니 요즘 아이들이 더 버릇이 없다'는 보통 어른들의 반발에 직면한다. 북어를 운운하며 여자를 한 번씩 때려줘야 한다는 말을 적어도 입 밖으로 내뱉는 사람은 사라졌다. 그러나 아이를 바르게 키우기 위해서라면 체벌도 불가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어떨까.


가족 내에서 부모의 양육방식은 치외법권적 '천륜'의 영역이 아니며 인권 보호를 위한 국가의 제재 대상이어야 한다...공공의 개입이 닫힌 방문 안에까지 이루어질 때에만 비로소 숨을 쉴 수 있고 자유로워지는 약자들이 가족 안에 있기 때문이다. (p.57)


책은 아이들이 독립적인 인격을 지닌 개별 주체로 존중받지 못하는 현실을 지적하는 데 이어 한국 사회에 만연한 가족주의의 특징과 그런 함의가 자리 잡게 된 역사적 과정을 다룬다. 해방 이후 급격한 산업화와 근대화를 이루는 가운데 정부는 공적인 책임을 다하지 못했고, '각자도생'의 시대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사람들에게 '믿을 건 가족뿐'이었다. 가족을 한 몸처럼 여기는 가운데 각 구성원의 개별성이 희생되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 나온 문제 현상이다. 자녀에 대한 신체적, 정서적 폭력과, 모든 기대를 자식에게 거는 과잉보호의 출발점은 이렇게 동일선상에 있다.


자식을 살해한 부모가 자신도 목숨을 끊은 사건에 '동반자살'이라는 말을 써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읽는데 익숙한 장면이 재생됐다. '부모의 심정이 이해는 간다', '남을 자식이 얼마나 걱정됐겠냐'는 댓글들. 그런 댓글을 볼 때마다 자식에게는 자식만의 삶이 있고, 그 누구도 살아보지 않은 삶을 예측할 수도 없다는 반발심이 들었다.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한편 그런 걱정에 실체가 있다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한국 사회는 타인에 대한 신뢰도와 개방성이 모두 낮은 편이다. 도시에서 이웃과의 관계는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사회보장제도만으로 충분하지 않은 상황에서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것은 친가나 시댁, 처가 같은 혈연 공동체다. 발달장애가 있는 아이를 둔 부모들이 아이보다 하루만 더 살고 싶다고 이야기했던 것이 떠오른다. 과연 자립할 수 없는 아이가 부모 없이 남겨졌을 때, 우리 사회는 그 아이가 온전한 삶을 누릴 수 있게 해 줄 만큼의 여력이 있는가.  


저자는 스웨덴의 사례를 들어 '자율적 개인과 열린 공동체'를 해답으로 제시한다. 우리는 북유럽의 복지를 부러워하면서도 '세금폭탄'과 연결 지어 정부가 모든 것을 과도하게 통제한다는 선입견을 가진다. 하지만 스웨덴의 개인주의 성향은 그 어느 나라보다 높다. 불안함없이 독립적인 시민으로 살기 위해서는 출생과 양육을 굳건히 지지해주는 적극적인 정부와 사회가 있어야 한다.


스웨덴의 경험이 보여주는 것은 삶은 개인주의적으로 살고, 해법은 집단주의적으로 찾을 때 저출산을 비롯하여 우리가 겪는 위기를 해소할 길이 보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 스웨덴과 비교하면 한국은 거꾸로다. 삶은 집단주의적이고 해법은 개인주의적이다. (p.232)


세상에 없는 가상의 아이(혹은 자신의 수호천사)에게 미국에서 백인 빈곤층 여성으로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주는 책 <하틀랜드>를 읽고 있다. 저자는 어린 시절 어머니가 자신에게 취했던 냉담한 태도를 떠올리며 그 원인을 추측한다. 창의적이고 재능 많은 어머니는 사회와 고립되어 힘든 시골 생활을 했고, 경제적, 정서적 여유를 누리지 못했다. 아이들이 시시때때로 부모의 눈치를 보는 건 불행한 일이다. 불행한 사람에게 행복한 엄마가 되라고 강요하는 건 잔인한 일이다. 아이가 행복하려면 부모가 먼저 행복해야 한다. 그러니 우리의 행복을 더 미뤄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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