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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몬순 Jan 10. 2021

읽그 52. <햇살을 타고>

틸리 월든 지음, 사라 김 옮김 / 이숲

이 책에는 '유토피아를 새로운 시각으로 재구성한 SF 그래픽 노블'이라는 부제가 있다. 이 한 줄이 책을 고른 가장 큰 이유였다. 또 다른 이유는 소위 '벽돌책'에 등극할만한 두께였다. 540쪽이 넘는 분량을 자랑하는 이 책이라면, 한적한 날 오후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푹 빠질 수 있겠군. 주말 오후용 책으로 낙점.


기다림은 그렇게 고통스럽지 않았다. 하지만 감질나는 것은 사실이었다. 같이 데려온 다른 책을 먼저 읽는 동안 이 책이 그렇게 탐스러워 보일 수가 없었다. 새로운 책에 가장 기대가 큰 걸 보면 독서도 사람을 만나는 것이나 다름없다. 만나지 않는 것이 새로운 윤리가 되어버린 이 이상한 세계에서 이런 만남이라도 있어 다행이다.


그러니까 서두르지 말고 기다리자. 4시에 올 사람을 기다리며 아침부터 행복해하면서. 그렇게 가장 먹고 싶은 간식을 아껴두는 마음으로 기다렸다가 토요일 오후 드디어 책을 펼쳤다.


해리포터의 기숙사 학교 호그와트를 연상케 하는 클리어리 기숙사 학교에서 미아와 그레이스, 두 소녀가 만나 친구가 되고, 연인이 된다. 다른 점이라면 이 클리어리는 마법사가 아닌 우주 인재를 양성한다는 것, 그리고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세계관에 대해 설명하지 않는다는 것. 미아는 역시 퀴디치를 연상하게 하는 게임 속 스포츠 '럭스'를 즐기고, 그레이스는 글을 쓴다.


책을 고르면서 언뜻 색감이 우아한 내지를 보고 솔깃했는데 역시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다양한 색상이 등장하지만, 누군가 이 책에 대해서 물어본다면 '청회색과 선홍색의 책'이라고 대답하고 싶다. 절제의 미덕을 잃지 않으면서도 폭발해야 할 타이밍을 놓치지 않는 영리한 색채 사용이 돋보였다. 과거와 현재의 시간을 넘나드는 구성 속에서 장면별 주요 색상은 시간대를 구분하고, 등장인물의 정서와 분위기를 강화한다.  


사실 나는 먹먹하거나 막막한 감정을 잘 못 견디는 편이다. 아무리 마음에 코팅막을 씌워놓으려고 해도 몇 시즌을 함께한 드라마의 최종화를 보고 나면 어떤 한 시절이 끝난 것 같아 마음이 먹먹해진다. 심해나 우주를 볼 때도 그렇게 먹먹해지곤 한다. 모든 빛을 빨아들일 것 같은 완전한 어둠을 목격하는 자체로 압도되는 나약한 지구인이다. 그래서 표지부터 시작해 대부분의 장면이 어둠 속에 잠겨있는 이 책을 보면서 마음이 편안하지만은 않았다.


그럼에도 가끔 책 속 장면으로 뛰어들고 싶었다. 눈을 담가 두고, 머리도 푹 담근 채 그냥 함께 그 공간에 머물러 보고 싶었다.


책의 전반부는 미아가 우주 곳곳의 건물 보수를 맡는 비행선 액티스에 합류하고, 그레이스와 만나게 된 시점부터 과거를 회상하는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후반부는 미아와 액티스 사람들이 소중한 것을 찾아 새로운 모험을 감행하는 이야기다. 그래서 특히 색채가 흘러넘치고 속도감이 치솟으며, 묘사의 대상이 되는 공간의 규모도 남달라 진다. 모험담의 클라이맥스에서 같은 시간에 각각 다른 장소에 있는 등장인물들을 교차해 보여주는 장면 연출도 멋지다.


하지만 경외감을 자아내는 행성 생태계 묘사나 긴박한 질주보다는 두 소녀의 학교 생활을 그리는 장면과 장면에 마음이 갔다. 비행선 안에서 미아와 동료들이 추억을 쌓는 장면도 마찬가지였다. 큰 것과 작은 것을 모두 그리고, 한 곳에 어우러지게 할 수 있는 작가임에 분명하지만, 나는 감정의 밀도가 높은 장면에 더 매혹됐다.  


출처_인터넷 교보문고_오늘의 그림은 이것으로 대신한다.




꽤 즐거운 경험이었지만 '유토피아를 새로운 시각으로 재구성한 SF 그래픽 노블'이라는 부제에는 오해의 여지가 있다. 틀렸다고는 할 수 없고, 사람마다 작품을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바가 다르니 누군가는 이 요약에 전혀 문제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 누군가는 이 작가가 창조한 막막하고 사랑스럽고 기발한 우주 세계를 즐기는 것만으로 충분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작품이 사람과 공간의 상호작용에 더 집중했을 거라고 예상했던 나는, 한편으로 조금 김이 빠지기도 했다. 작가가 설정한 특수한 환경에서, 그 환경의 고유한 조건이 어떤 특징과 제약을 지니는지 중심적으로 다룰 거라고 생각했다. 그 대신 작가는 복잡한 설명은 생략하고 자신이 만든 새로운 세상으로 독자를 초대한다. 이 이야기에서 왜 세계가 그렇게 작동하는지 작가가 일일이 설명할 의무는 없다. 논리적인 세계관 구축보다는 인물의 감정과 선택에 더 집중하는 이야기이니까.


황홀한 광경에도 불구하고 배경보다는 인물에 더 눈길이 가는 작품이다. 영화 '마션'같은 작품처럼 배경이 우주여야 할 필연적인 이유 같은 것은 없으며, 혹시 나처럼 헛짚었던 사람이 있다면 아쉬움을 거두고 작가가 보여주는 성장과 사랑 이야기에 몰입해보았으면 좋겠다.  


원제가 'On a sunbeam'이다. '햇살을 타고'라는 제목이 참 예쁘다고 생각했다. 작품을 다 읽고 나니 에일리의 노래 '첫눈처럼 너에게 가겠다'가 생각난다. '언젠가 만날/ 우리 가장 행복할 그날/ 첫눈처럼 내가 가겠다/ 너에게 내가 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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