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이유지만 근본적인 것은 나를 위해서
인생은 절대 내 마음과 같이 굴러가지 않는다. 그걸 깨닫는건 10년이 걸렸고, 받아들이는건 아직도 -ing 중이다. 어쩌면 시골에 내려온 이유도 내 결정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내 결정이긴 하나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해야할까? 그때의 선택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나는 시골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중이다.
서울에서 20년을 꽉 채워 살았고, 23살이란 나이에 시골로 내려와 창업을 했다. 중국에서 졸업을 1년 남기고 돌아왔으며 중국에 있을 때도 부모님이 보내주는 생활비로 생활을 하고 있었으니 내가 가진 자본이라고는 엄마 하나였다. 시골에 오자마자 내가 한건 '농업' 이었다. 시골길을 가다보면 흙 사이에서 파릇파릇 올라온 것들이 있는데 그게 풀인지, 옥수수인지, 감자인지 구분도 못할 때였다. 내 입에 들어온 농작물의 성장과정을 모르고 살았던 것 같다. 아무것도 모르는 애가 와서 흙 안에 감자를 찾으라고 하면 찾고, 옥수수를 따라면 땄다.
시골로 내려온 가장 큰 이유는 나의 오빠다. 언젠가 그런 글을 본 적이 있는데 집 안에 아픈 사람이 있으면 구성원들이 나눠서 짐을 짊어져야 가족이 함께 할 수 있다는 글이었다. 그 글은 나를 표현한 글이었다. 오빠는 서울에서 특수학교를 다니다가 졸업하고 기관을 다녔다. 내가 중고등학교를 다니고, 대학을 다니고, 또 중국으로 유학을 하면서 오빠는 많은 기관들을 다녔지만 어느 곳 하나 오빠 마음에 드는 곳이 없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오빠가 마음 둘 곳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결국 오빠가 많이 힘들어하는 것이 가족들 눈에 나타난 뒤로 오빠를 가족들 곁에 두기로 했다. 그 결정을 하고나니 서울은 살기 힘들었다. 그래서 시골을 택했다. 오빠를 곁에 두려면 엄마와 나는 회사를 다닐 수가 없었다. 혼자서 짊어지긴 너무 힘들었고 서로 함께해야 가족이 튼튼해졌다. 게다가 내가 성인이 되었으니 더더욱 힘이 될 수 있었다! 이왕 이런거 엄마랑 같이 사업을 시작했다. 엄마나 나나 일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들이다. 누구 한 명이 오빠를 보는 것보단 함께 일할 수 있는 길을 택하다 보니 시골에서 창업을 했다. 명예욕 같은 큰 욕망이 있는건 아니고 나이가 들어서도 꾸준히 경제활동을 하길 원했다.
오빠와 함께하려고 시골을 택했다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오빠는 나에게 기회를 줬다. 마침 나는 서울에 대한 생활이 너무 힘들었던 것 같다. 어렸을 때부터 교육을 통해 받아왔던 무한경쟁을 20대, 30대, 40대까지 하면서 살아남을 자신이 없었다. 엄마 또한 대기업과 같은 곳에서 일에 치여 사는 딸보다는 욕심만 없다면 평범하게 조용히 살길 원하셨다. 게다가 내 성격은 까칠하고 요즘 표현으로는 전형적인 ESTJ 계획형 인간이라 좀만 틀어지면 남들보다 크게 스트레스를 받았다. 이상과 현실의 갭이 너무 크다보니 나도 모르게 내 마음 속에 병을 키우고 있다가 20대 초반에 지하철 안에서 갑자기 숨을 쉬기 힘들어지고 주변 소음이 안들리면서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내가 공황이라는 대열에 놓였다. 그 뒤로는 서울에서 사람들이 많은 곳을 다니면 긴장을 하게 되고, 심했던 시기에는 버스와 지하철 타는 것도 힘들어 가족들 도움을 받았다.
그러고서 시골에 오니까 바로 좋아졌다! 는 아니지만 서서히 좋아지고 있고 지금은 버스도 타고, 지하철도 타고, 비행기도 탄다. 아직은 콩나물 지하철은 힘들긴 하지만 뭐 이것도 좋아지겠거니 생각하고 아니면 콩나물 지하철을 탈 일을 거의 안 만들고 있긴 하다.
나에게 시골에 온 이유는 정말 많지만 딱 하나로 표현하자면 가족들과 함께하고 싶은 마음과 여유롭고 편히 먹고 살기 위해 왔다. 물론 지금 하는 일이 마냥 편하진 않다. 너무 힘들어서 때려치고 싶을 때도 많고 나는 남들보다 3시간씩 일찍 출근하고, 1~2시간씩 늦게 퇴근한다. 그만큼 일 강도가 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에서 살았던 것보단 시골에서의 환경과 그리고 내 마음가짐이 가족들과 여유롭게 지내는 편이라고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