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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서 Sep 10. 2023

시골에서 이방인으로 산다는 것 1

보장받지 못한 나의 퍼스널 스페이스(Personal Space)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시골에서는 사람이 나뉜다. 토박이와 이방인. 나는 당연히 이방인이다. 어머니 아버지부터 태생이 서울이었고, 명절마다 한 번도 지방으로 내려가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내려가는 애들이 너무 부러웠다. 지금도 가족 중에서 시골에 사는 건 우리 가족뿐이다. 지금도 명절 전후에 가족들을 만나려면 서울에 간다.


벌써 여기서 지낸 지 8년 차인데, 내가 이곳에서 토박이들처럼 살려면 아무래도 여기서 20~30년은 살아야 혼혈 취급까지는 해주지 않을까? 아니면 토박이와 결혼을 해야 반 토박이가 될까? 게다가 지역에 10개도 안 되는 중고등학교에서 동문은 왜 이렇게 많은 건지. 시골이 서울보다 지역 내 모임이 많다. 많다는 뜻은 인구 비례하여 존재하는 모임이며, 그 모임의 역사와 결속력이다. 그래서 나는 장난으로 '시골 기득권 카르텔'이라고 놀린다. 에이 치사해라! 하면서.


나는 그래도 빠르게 적응한 편이었다. 왜냐하면 필요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농사만 짓던 게 아니라 농산물을 온라인으로 판매했고, 판매하던 농산물들 성과가 좋았다. 그들은 나에게 적대감보다는 호기심으로 다가왔었다. 그런데도 섞이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 너희 아버지는 누구시니? " 


이 한마디가 " 너는 누구니? "라는 말과 같다. 


" 저 oo면에 호박 농사짓고 있는 oo 딸입니다. "

" 아, 네가 그 oo이 딸이었구나! 교복입을 때 봤는데 많이 컸다야~ "  


그들이 가장 빠르게 파악하고 보장되어 있는 신원. 하지만 토박이들에게 이방인은 신원파악이 잘 안 된다.


시골은 폐쇄적인 성향이 강하다. 그만큼 서울에 비해 오고 가는 인구도 없을뿐더러 나처럼 시골에서 살고자 오는 사람의 신원 파악이 안 된다. 저 인간이 범죄를 저지르고 이곳에 온 건지, 그것도 아니면 왜 살던 곳을 떠나서 여기까지 내려온 건지, 어디가 아픈 건지, 조부모 때부터 사놓은 땅이 여기 있었던 건지. 정책적으로는 귀농귀촌을 많이 하자고 말하지만, 지역 내 사람들이 보는 귀농귀촌인들은 조금 다를 수도 있다.


그들은 나를 열심히 알아가려고 했다. 우리 집 밥숟가락이 몇 개 인지도 파악해야 했고, 아침에 몇 시에 나오는지 저녁에 몇 시에 들어가는지 오늘 농약을 뿌렸는지 퇴비를 뿌렸는지 오늘은 택배가 몇개가 나가는지 모든 동네분들은 나의 CCTV가 되었다. 


처음에는 정말 화가 났다. 내가 시골을 마음에 들었던 건 퍼스널 스페이스(Personal Space)가 보장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사람 많은 북적이는 공간을 좋아하지 않았었는데 시골에 오니 이게 바로 여유인가? 싶더랬다. 그 장점을 보장받았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게다가 말들은 뭐가 그렇게 많은지 감자 하나 심어놨을 뿐인데 온 동네 할머니 할아버지가 와서 구경을 하고, 구경하다 한 마디씩 하고 갔다.


공간적으로는 보장받았지만 심적으로는 더욱더 나를 조여왔다. 


" 아니 도대체 왜 이렇게 남 사는 거에 관심이 많아? " 


그런데 이렇게 불만을 갖고 살아오길 몇 년이 지나고 시골분들의 오지랖으로 도움을 받았던 적이 많은 걸 깨달았다.


우리 오빠는 평생 다섯 살이다. 기관을 더 이상 보내지 않기로 마음을 잡았을 때, 집에만 있는 게 답답했던 오빠는 항상 마당으로 나갔고, 바쁠 때는 매 순간 챙기기 힘들었다. 서울에서는 빌라에 살았는데 우리가 없는 사이에 오빠가 1층 주차장에 계속 서성거리고 있어서 민원까지 들어왔던 적이 있다.


그런데 그 부분을 시골 마을분들이 채워줬다. 혹시 누군가 우리 집 앞을 서성거리면 전화가 온다. 누군가 집 앞을 서성거리는데 얼른 가보라고 해주신다. 또 오빠가 조금 더 멀리 나갈 때면 " 어이 학생~ 가지 마! " 하면서 말을 해주신다. 오빠와 마주칠 때마다 오빠에게 다가가서 인사를 해주시고, 오빠가 집에서 안나올 때는 어디 아픈가 물어보신다.


또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우리 가족과 갈등이 생겼던 마을분이었는데 서로 본 척도 안 하고 지나갔다. 그러다 우리 차가 언덕 고랑에 빠질 뻔했는데 우리의 모습을 보고 뒤에서 한참을 지켜보았다. 나였으면 그러거나 말거나 내 할 일 하러 갔을 텐데 우리가 괜찮은걸 보고 출발하셨다.


이게 바로 시골의 오지랖이다!! 


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서로 욕하고 싸우다가도 무슨 일이 생기면 뒤는 한 번씩 돌아보는 사람들. 모두가 그런 건 아니다. 내 경험상에 그렇다. 퍼스널 스페이스는 지금도 보장받지 못했지만 그 값은 우리의 안전값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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