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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근성 Jan 14. 2021

필름카메라와 함께한 태국 one.

travelog ㅡ 방콕, 2017




방콕, 2017년 9월 30일
09:14 at hotel


숙소 앞 로비는 현대적인 동시에 어딘가 태국다운 정취가 느껴진다. 어딜 가나 쉽게 볼 수 있는 불상 때문인지, 아니면 옆 소파에 사이 좋게 누워 이야기하는 태국 아이들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무척 여유로운 기분이 든다.

태국에서는 한 시간 여의 기다림마저 낭만이 된다.



여행자가 된다는 것은, 내 나라에서의 책임을 벗어던지고 새로운 세계의 여유를 만끽하는 일이다.




09 : 24 at Asok Station


BTS가 좋은 이유

방콕의 BTS(지상철)는 도심 위로 달린다. 타고 있으면 도시의 모양을 온전히 내려다볼 수 있다. 나는 창밖을 관찰하면서 이 나라가 여행자들에게 사랑받는 이유를 실감했다. 물결처럼 이어지는 태국 특유의 지붕 모양과, 옥상으로 통하는 작은 계단과, 이따금 열어둔 창문 안으로 보이는 방콕 사람들의 생활 풍경 같은 것들이다.


아속(Asok)역에서 하차해 바로 계단으로 내려가지 않고 반대로 걸었다. 국기가 걸린 난간 쪽으로 나서면 비로소 자신이 방금 달려온 길이 어떤 모양이었는지 알게 된다. 복잡하게 얽힌 도로와 전선 위를 지나는 BTS는 문자 그대로 하늘길 같았다.



 한참 도시를 내려다봤다. 그러다 바람이 불어서 쓰고 있던 짚모자를 놓쳤다. 다행히 멀리 날아가지 않고 바닥에 떨어져 얼른 주웠다.




21 : 38 at Khaosan Road


버스를 타고 찾아간 카오산 로드는 예상보다 훨씬 덥고 복잡했다. 전 국왕의 발인식이 카오산 일대의 어딘가에서 치러지는 모양이다. 인도를 따라 길게 늘어선 검은 행렬은 살아생전 어땠는지 모를 낯선 나라의 국왕을 생각하게 한다. 덧붙여 어디에나 있는 그의 사진과 불상들은 방콕 사람들이 어떤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증거였다.

나도 언젠가 무언가를 믿으며 살아갈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방콕, 2017년 10월 1일
10 : 35 at Terminal 21


비도 피할 겸, 아침을 먹기 위해 터미널 21을 찾았다. 숙소와 가까운 거리다. 오전 10시에 문을 여는데도 이미 사람들이 많았다. 현지인, 서양인, 동양인이 한데 어우러진 공간에 부드러운 재즈가 흐른다. 낯설지만 편안한 느낌이다.



내부의 피어 21에서 음식을 주문하려면 판매처에 가 전용 카드를 사야 한다. 특이하게도, 카드를 먼저 충전한 뒤 일정 금액이 차감되는 모양이다. 어떻게 하는지 몰라 헤매고 있으니 직원이 친절하게 길을 가르쳐 주었다.

메뉴을 살피다 그린 커리와 누들을 시켰다. 예상한 맛이 아니라 놀랐지만 무척 조화로운 요리라는 생각이 든다.



이곳에서는 혼자 길을 걷고, 혼자 사진을 찍고, 혼자 밥을 먹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자유롭다. 모두의 걱정을 뒤로하고 떠난 여행지는 언제나 새롭고 아름다울 뿐이었다.




12 : 10 at Mo Chit Station


짜뚜짝 시장에 가기 위해 BTS를 타고 모칫(Mo Chit) 역에서 내렸다. 부슬부슬 내리던 비는 어느새 스콜이 되어 땅을 적시고, 강을 불어나게 했다. 모칫역에는 나처럼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예상치 않게 만난 비로 일정에 차질이 생겼지만, 이대로도 좋다는 생각이 든다. 비가 오면 어떠랴, 내 생에 방콕의 비를 맞을 일이 얼마나 있겠나.




16 : 49 at Chatuchak Weekend Market


태국 여행 계획을 세울 때 들은 말이 있다. 살까 말까 할 때는 사라, 먹을까 말까 할 때는 먹어라, 할까 말까 할 때는 해라. 정말이다. 시장의 물가는 굉장히 싸서 아무리 물건을 많이 사도 돈이 남는다. 시장 특유의 정겨움은 덤이다.

입구 근처에는 짜뚜짝의 명물이 있다. Viva 8. 국적에 관계없이 모두 모여 사진을 찍고 음식을 먹는다. 이곳이 유명한 이유는 음식보다 그것을 요리하는 이에 있는데, 그도 그럴 것이 팬 서비스가 대단하다. 손가락 하트(어디서 배웠을까), 춤, 음식 재료 퍼포먼스 등 보고 있다 보면 음식이 아니라 그의 유쾌함을 즐겁게 먹는 듯한 기분이 든다.

사람들은 결국 그런 정에 끌린다. 나는 그곳이 명물이 된 이유를 그에게서 찾았다.


"I love you! Come on Baby!"




방콕, 2017년 10월 2일
16 : 00 at Suan Pakkad Palace


온종일 비가 내렸던 방콕의 하루

창가로 들이치는 빗소리를 들으며 느긋하게 아침을 해결한다. 비가 그칠 때까지 기다릴 셈이었으나 기미가 보이지 않아 우버를 불렀다. 이 같은 사소한 여유는 혼자 하는 여행의 가장 큰 장점이리라.

우버를 타고 찾아간 곳은 춤봇 왕자 부부가 실제 거주했던 곳이다. 지금은 쑤언 팍깟 박물관이 되었다. 입장료는 100바트. 개인적인 견해로, 박물관은 그 나라를 가장 잘 보여주는 지침서와도 같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꼼꼼히 전시품들을 들여다보려 노력했다.(굉장한 것들이 많았는데, 내부의 사진을 찍을 수 없어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곳의 가장 놀라운 점은 전시품들과 거리감이 없다는 것이다. 여타 박물관들과 달리 유리벽으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 덕분에 오래전 이곳에 살았던 이들의 흔적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관람자의 자세를 바로 하고, 최대한 그곳을 엄숙하고 정중하게 둘러봐야겠다는 마음가짐이 생겼다.




21 : 00 at Loha Prarsat


태국 사람들은 친절함을 바탕으로 움직이는 듯하다. 한낱 여행객에 불과한 내게 너무나도 큰 친절을 베푼다. 예를 들어 박물관의 경비원은 부러 차의 뒷문을 열어주었고, 나를 로하 쁘라쌋까지 태워준 우버 기사는 가이드를 자처했다.

그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은데, 우선 그는 우산을 내 쪽으로 완전히 기울여 팁 싸마이까지 데려다 주었다. 의향은 있었으나 이런저런 이유로 일정에서 빠진 맛집이다. 덧붙여 국왕의 발인식으로 혼잡해 가지 못했던 골든 마운틴과 라마 1세의 동상 앞에도 함께 가주었다.


그가 부처님께 정성을 드리는 방법과 점괘를 보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점괘는 신통하게도 내 상황과 잘 맞았다. 나쁜 일이 지나가고 좋은 일이 오리라. 사실 보편적인 말이지만 나는 믿고 싶다. 그런 날이 오리라고.



혼자 하는 여행의 묘미란 오늘처럼 예상 밖의 폭우를 만나는 일에 있다. 빈틈없이 준비해 간 일정이 깨지는 일에도, 그만큼 새롭고 멋진 여행지를 만나는 일에도, 생각지도 못한 우연한 만남에도 있다. 하기야 일정이 무슨 소용이랴. 나는 휴가를 왔으니, 그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휴식을 즐기다 가면 그만이다.


"I'm glad to be your friend."





기억나는 대화

 P : (골드 마운틴 근처 캐널(위 사진 참고)의 표지판을 따라 읽자) 그 이름에는 아나콘다라는 의미가 있어.

 나 : (아나콘다라는 단어만 듣고 깜짝 놀람) 뭐? 이 안에 아나콘다가 있다고?

 P : 아니, 뜻이 아나콘다라고. ㅋㅋ



 P : (골든 마운틴 입장료를 내려 하자) 태국에서는 돈을 내지 마.

 나 : 뭐라고? ㅋㅋ

 P : 내 말은, 태국 현지인들은 돈을 내지 않아도 돼. 관광객만 내지. 나하고 같이 다니면 안 내도 된다는 말이었어.






카메라 : Minolta X-370 /  필름 : Agfa Vista 200 & Kodak ColorPlus 200 & Fuji Color 200



2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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