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유니 사막도, 이과수 폭포도 안 부럽다. 절구에 거칠게 빻은 쏨땀 한 그릇이 절실했을 뿐이다. 파파야 대신 무채를 썰어서, 팜슈가 대신 황설탕으로 흉내를 낸 '야매 쏨땀'을 만들어 본 적이 있지만 원하던 그 맛이 아니라 크게 실망한 뒤로는 웬만하면 쏨땀은 태국에 가서만 먹는다. 쏨땀을 못 먹은 지가 벌써 4년 남짓이었다.
역병의 창궐로 일상생활에 제약이 많아지면서 숨 쉬듯 당연한 일상이 금지당한 것이 얼마나 괴로운지 알게 됐다. 거창한 버킷리스트 달성까진 욕심 안 낼 테니, 내가 누리던 생활이라도 되돌아오면 그걸로 됐다는 소박한 마음이 자라났다. 이는 해외여행에 대한 갈망에서도 그대로 투영됐다. '걸어서 세계 속으로'나 ‘세계 테마 기행’으로 대리만족을 하노라면 일생을 손꼽아 갈까 말까 한 여행지에는 심드렁해졌고, 자주 가서 지겨운 마음마저 들었던 곳은 실향민의 심정으로 원통한 기분마저 드는 것이었다.
방콕의 화려한 밤.
그래서 해외 입국자에 대한 자가격리가 면제된다는 소식을 듣고 본능적으로 떠오른 곳은 또 방콕이었다. 방역이 완화된다면 가장 먼저 방콕을 가게 되리란 것을 내 무의식은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이 구역 방콕 러버, 태국집착증환자니까. 왜 그렇게 방콕을 찬양하냐고 묻는 질문에 난 보통 이렇게 답한다. "방콕은 다 돼."
여행지의 매력을 가늠할 몇몇의 평가항목이 있다. 이 잣대에 맞춰 방콕을 심사해 보면 이렇다.
관광 및 포토스폿이 충분한가? - YES
식문화가 다채롭게 발달했는가? - YES
숙박시설이 충분하고 경쟁력 있는가? - YES
쇼핑시설이 잘 갖춰져 있는가? - YES
대중교통을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가? - YES
관광객에 친절한 편인가? - YES
물가가 저렴한가? - YES
각각의 항목을 떼놓고 봤을 때 방콕을 능가하는 여행지는 분명 많다. 방콕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인 왕궁을 로마 유적지와 비교하기엔 무리가 있고, 태국 요리가 최고라 하자니 프랑스나 중국이 인정 안 할 것이다. 최고의 쇼핑천국이라 하기엔 명품 쇼핑을 목적으로 떠나는 유럽여행에 비견될 바가 아니다. 물가를 보면 동남아 신흥 관광대국인 베트남과 비교해 비싼 게 사실이다.
하지만 방콕 이외에 저 7가지를 모두 갖춘 여행지를 떠올려 보라고 하면? 글쎄다,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누군가는 홍콩, 타이완, 베트남 등을 꼽을지도 모르겠지만 어디를 가도 자꾸 '기준점'인 방콕과 비교하게 되는 내 못된 습성으론 방콕이 대체로 더 점수가 높았다.
한적한 방콕의 낮.
무엇보다 시간과 돈이 한정적인 직장인으로서 뛰어난 가성비를 무시하지 않을 수 없다. 물가 저렴한 동남아에서도 호화롭게 쓰려면야 한이 없겠지만 에어컨이 빵빵한 쇼핑몰 푸드코트에서 먹는 국수 한 그릇도 충분히 만족스럽다는 점을 방콕을 가본 사람은 안다. 많이 걸어 지치면 길가에 널린 로컬 마사지숍에서 1시간에 1만 원 이하로도 시원한 발마사지를 받을 수 있다. 1박에 10만 원으로 5성급 신상 호텔에 묵을 수 있는 여행지가 세계 호텔의 격전지인 방콕을 제외하고 또 있을까?
다만 관건은 항공권이다. 갑작스럽게 해외여행 수요가 몰린 탓에 지금은 항공권이 천정부지로 올랐는데, 4월 에어아시아 프로모션을 통해 구매했더니 수화물 가격을 포함해 1인 32만 원이라는 가격에 티켓을 구했다. 둘이 7박 숙박비 62만 원, 현지 경비로 쓸 금액은 100만 원만 환전했다. 스파와 투어 비용으로 미리 결제한 금액은 30만 원가량. 부족하면 더 환전하려고 고액권 지폐를 두둑이 챙겨갔지만 준비한 돈은 오히려 조금 남았다.
익숙함 속에서도 새로움을 찾고 싶어 나름 철칙은 세웠다. 최대한 경험하지 않은 곳 위주로 즐기기. 여러 번 다녔지만 서울의 2.6배에 달하는 방콕을 속속들이 알리 만무하다. 처음 들어보는, 혹은 그동안엔 이런저런 이유로 일부러 멀리했던 지역에 숙소를 잡았고 전에 가본 음식점은 무조건 계획에서 배제했다. 별로 동하지 않아 한 번도 안 가봤던 아유타야에는 2박 3일이나 시간을 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