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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ra Mar 15. 2017

나에게도 익숙한 새벽 세시

익숙한 새벽 세시 by 오지은

내게 새벽 세시는 어둠이다. 항상 열한 시면 잠에 드는 습관이 취직하고나서부터 생기는 바람에 새벽 세시에는 언제나 잠에 취해있다. 그래서였을까, 누군가에게는 새벽 세시가 익숙하겠구나, 라는 생각을 이 책을 보고는 하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새벽 세시는 어떤 의미일까, 궁금해졌다.


그녀의 팟캐스트, '익숙한 새벽 세시'를 즐겨 듣고 있었다. 그녀의 음악을 들어본 적은 없지만, 그녀의 팟캐스트를 통해 만난 그녀는 가끔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홍차를 냉침해서 마시는 방법에 대해 설명해주기도 하고, 하루의 일상을 침대에 누워 조금은 나른한 목소리로 읊어주곤 했다. 뭐랄까, 친해지면 언제나 내 편이 되어줄 것만 같은 언니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런 그녀가 교토 여행 후에 낸 에세이. 안 살 이유가 없었다.


그녀에게 익숙한 새벽 세시를 그녀는 회색의 시간이라 칭한다. 성장이 멈추고, 회색으로 가득 찬, 우울하고 어두운 시간. 그런 시간을 그녀는 부딪치고 여행을 통해 벗어나려 한다. 그 시간도 나라고, 그것을 내보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런 그녀가 부러웠고, 또 안쓰러워 만난다면 꽉 안아주고 싶었다.






가만히 천장을 보며 생각했다. 꿈에서 깨어 한 시기의 끝자락에서 바라본 나라는 사람은 형편없었다. 말투도, 생각도, 성격도, 생활습관도, 전부. 나는 매순간 성장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지만 어쩌면 착각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작게나마 이룬 것들은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며, 돌이켜보면 몰라서 할 수 있던 것들이 태반이었다는 생각이 들었고, 나는 몹시 부끄러워졌다.


서론부터 울컥했다. 내가 쓴 것일까, 잠깐 눈을 비비고 다시 읽게 되었다. 매번 살아오는 순간마다 나는 성장하고 있어,라고 믿고 있었지만, 그것이 어쩌면 착각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살아오면서 수없이 반복해서 내 머릿속을 채웠던 생각. 이젠 좀 나아졌겠지, 이젠 좀 세상에 보여도 모자라지 않을 그런 사람이 되었겠지,라고 생각할 때면 저 생각이 나를 괴롭혔다. 그녀는 그 생각을, 그 회색의 시간을 어떻게 이겨내었을까.


"교토에는 일 때문에 오셨나요?"
아, 나는 뭘 하러 왔더라. 바로 대답을 못 하고 있다가,
"일 반 휴식 반입니다."
애매한 답을 했다. 다행히 그에게는 충분한 답이었나 보다. 고개를 끄덕끄덕하더니 한참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찾았다, 하고 작게 혼잣말을 하고는 열쇠를 건네며 이렇게 말했다.
"이 방에는 멋진 책상이 있어요."


그녀는 교토로 한 달간 여행을 떠난다. 여행 첫 날, 들어간 숙소에는 멋진 원목 책상이 있다.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느낌이 든다. 역시, 숙소에서 중요한 것은 침대, 화장실, 교통편 등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내게는 방에 크고 널찍한 책상이 있다면 아주 큰 플러스 요인이 된다. "이 방에는 멋진 책상이 있어요." 저 말 한마디에 여행의 목적이 달성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 건 나 혼자일까.


그녀는 교토에서 충동적으로 머리를 자르기도 하고, 전날 밤 먹고 싶어 고민했던 팬케이크 정식을 먹으면서 역시 에비후라이나 오므라이스를 먹을 걸 그랬지, 하기도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즉각적으로 행복을 느끼고파 아울렛에서 코트를 두 벌이나 사버리고는 후회하기도 한다.

꼭 나를 보는 것 같았다. 그래서였을까, 페이지를 넘기는 속도가 느려졌다.

다른 책들처럼 뒤에 내용이 너무 궁금해, 빨리 읽고 싶어, 이런 책이 아니라 페이지마다 읽고 생각하고 곱씹고 싶은 책이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가는 과정은 어쩌면 열기 싫은 상자를 계속 열어나가는 고통의 반복일지도 모르겠다.
상자를 열었다. 지금까지 해온 실수가 나왔다. 못난이가 나왔다.
그래도 계속 열어나가면 무리하지 않는 단정하고 확실한 행복을 얻을 수 있을까.


나는 내 자신에 대해 자존감이 굉장히 낮은 사람이었다. 지금도 예전보다는 많이 높아졌다고 생각하지만 평균적으로 보자면 아직도 세상의 기준에는 낮은 것이 분명한데.

맞아, 열기 싫은 상자를 계속 열어야 하는 기분. 내 안의 나는 너무 못난이이고 남들에게 보여주기 싫은데 열어야만 하는 시간. 지금까지 해온 실수가 나올까봐 전전긍긍하는 내 안의 나.

그래도 열어나간다면, 계속 열어나간다면 단정하고 확실한 행복을 얻을 수 있을까, 라는 그녀의 말이 내게 너무나 큰 위안이 되었다.

알아, 힘들지. 너조차도 사랑할 수 없는 부분이 있는 걸 알아. 하지만, 그래도 용기를 내어 열어나가면, 그 안에서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얻을 수 있을까,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흔히 하는 위로가 아닌, 용기를 내면 얻을 수 있어, 라는 파이팅 넘치는 말투가 아니라, 얻을 수 있을까, 나도 잘은 모르지만 그렇게 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너와 나, 우리 같이 열어보지 않을래, 동네 친한 언니같은 편안하면서도 믿음직한 말투가 위로로 다가왔다.




마음에는 창문이 있다고 믿는다. 그것을 닫고 열기란 쉽지가 않다. 너무 많은 요소가 그 문의 개폐에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도 모르는 새 굳게 닫혀 먼지가 쌓이고, 이산화탄소로 가득차고, 여는 법을 까먹고, 그 안에서 기침을 하고, 꼬여버린다. 예술이 창문을 열어주는 역할인지, 아니면 방향제 역할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방향제로 쓸지 창문 손잡이로 쓸지는 사실 받아들이는 사람의 몫인지도 모르겠다.


내 마음의 창문은 이 책으로 인해 쌓인 먼지가 털어졌고, 살짝 열렸다. 그녀의 글들은 나도 모르는 사이, 내 마음의 창문을 두드리고 보듬어주고 깨끗하게 쓸어주었다.


아무도 오지 않는 블로그 보기를 좋아하는, 일을 저질러놓고 후회하는, 핸드워시가 화장실에 쌓여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 나온 향을 꼭 써보고 싶은 마음에 또 사고 보는 친해서 아무 말 하지 않아도 편하기만 한 언니를 얻은 것 같다.

그래, 누구에게나 새벽 세시는 오기 마련이지, 그렇지만 누구나 다 그 시간을 각자의 방법으로 이겨낸단다,라고 위로해주는 그녀의 글이 소중하다.


날 싫어하든 말든 상관없다고 외칠 용기는 없다. 사랑받는 것이 좋다. 호의가 좋다. 이렇게 약한 나로서 의심하고 안심하고. 그렇게 흘러가는 내 인생도 괜찮다.
자신을 믿을 수 없어서 너무 노력하게 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착해서 호구라는 말을 듣기도 하고, 넌 대체 왜 그래?라는 말을 들어도 웃는 것밖에 못하는 사람들. 도무지 자연스러워질 수 없는 사람들. 어두운 부분은 꼭꼭 숨기고 밝은 곳을 동경하지만 발이 닿지 않는 사람들.
나는 기원한다 스스로를 부정하는 것, 스스로의 아픔에 오히려 허용하고 있던 어리광, 이해받고 싶어서 오히려 세우고 있는 가시, 그런 것들을 조금씩 털어내고 걸어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부디, 있는 그대로 당신을 바라봐주고, 가끔 당신이 항상 빠지는 구멍에 또 빠져서 허우적댈 때, 아무 일도 아니라고 말해주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기를. 구원은 있으니까. 나는 그렇게 믿는다.


나도 그렇게 믿고 싶다. 믿을 것이다. 구원은 있으니까.

작은 마음이었지만, 그 위로의 글들이 큰 힘이 되어준 새벽 세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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