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달빛에도 걸을 수 있다 by 고수리
고수리 작가님을 처음으로 알게 된 건 브런치를 처음 시작했을때였다. 브런치 수상작을 발표하던 때였는데 ,그녀의 브런치 페이지 <그녀의 요일들>이 2000:1의 경쟁률 속에서 금상을 수상한 것을 보고 호기심에 어떤 글이길래 그 높은 경쟁률을 뚫고 수상할 수 있었을까 들어가 보게 된 것이 계기였다. 저자의 브런치 페이지를 구독하고 글을 읽어나갔다. 그리고 그녀의 첫 번째 책인 <우리는 달빛에도 걸을 수 있다>가 출판되었다.
저자는 인간극장의 방송작가로 활동한 적이 있는데, 그래서 그럴까, 각 글들의 묘사가 굉장히 선명했다. 마치 영상을 보는 것 같이 장면이 살아나는 느낌이었다. 인간극장은 예전부터 즐겨봐왔던 프로그램이었다. 대학교 때 룸메이트는 매일같이 점심시간이면 집에 돌아와 점심을 챙겨먹으며 인간극장을 랩탑으로 보고는 했다. 마치 인간극장을 보는 것이 삶의 하나의 루틴이 된 것처럼 빼놓지 않고 봤다. 그래서였을까, 나도 즐겨보게 되고, 지금까지도 좋아하는 프로그램이 되었다. 평범함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에서 나의 삶을 비춰볼 수 있는 사람냄새나는 그 프로그램을 난 참 좋아했다.
저자는 저자의 어렸을 적 이야기, 학창시절 친구들과의 추억 이야기, 방송작가로 활동할 때의 이야기, 결혼생활에 대한 이야기 등 수많은 이야기들을 저자의 삶 속에서 잡아내고 활자로 표현해 적어 내려갔다. 어떻게 보면 숨기고 싶은 가정사일수도 있을텐데 그것을 다 오픈하고 저자의 삶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저자의 문체가 너무나 부러웠다. 특정한 사람만 특별한 순간들을 만나는 게 아니라, 우리 모두 살아오는 동안 빛나던 순간들이 있었다는 걸, 그 순간이 다른 순간에 묻혀 보이지 않았을 뿐이라는 걸 저자는 글로써 알려준다.
우린 미처 잊고 살았지만 삶의 무대에서 누구 하나 주인공이 아닌 사람은 없었다. 그저 좋아서 하는 일, 소박하게 살아가는 일상, 웃는 목소리에 느껴지는 진심, 따뜻한 말 한다미에 벅찬 행복, 먹먹한 눈물에 담긴 희망. 그런 소소하지만 소중한 가치들을 알아볼 때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같은 진솔한 삶이 펼쳐졌다. 그랬다. 살아가는 우리는 별로 특별할 것 없는, 가장 평범한 주인공들이었다.
저자가 평범한 회사원에서 늦깍이 방송작가가 된 데에는 더 늦기 전에 내가 좋아하는 일 하나쯤은 해봐야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적지 않은 나이에 막내작가부터 시작한 저자의 용기가 부럽고 멋져보였다. 그럭저럭 동글동글 무난하게 살아가던 저자가 힘들다는 방송일에 발을 들이고 성장하게 되는 순간들도 책에 적혀있다. 인간극장을 위해 취재차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의 삶처럼, 이야기처럼, 그들도 그들의 인생에서 주인공들이었던것처럼, 저자 자신도 주인공이였던 걸 깨달았다. 행복이란 멀리 있는 게 아니란 걸, 소소하고 평범한 일상 속에 순간일 수 있다는 걸, 달빛에도 걸을 수 있다는 걸 저자의 목소리로 다시 한 번 말해준다. 모두의 인생에서 주인공은 자신들이기에, 스토리가 다르고 결말이 다르다. 비슷하다고 느낄 수 있지만 나와 똑같은 인생을 사는 사람은 없다. 우린 이미 드라마같은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누구 하나 주목해주지 않는 삶이라 하더라도 그 삶의 주인공은 결국 자신임을, 그것을 믿고 나아가면 지난 시간 속 주인공으로 살았던 자신을 발견하게 될테니.
살아도 살아도 세상은 모르는 것투성이. 툭하면 상처받고 툭하면 우는 우리가 어른이라니. 어쩌면 우리는 평생 아이지만, 세상이 '너는 이제 어른'이라고 귀띔해준 걸 그냥 철석같이 믿고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어른이니까 짊어져야 한다고. 어른이니까 희생해야 한다고. 어른이니까 살아가야 한다고. 그런 무거운 말들에 기꺼이 고개를 끄덕이고 묵묵히 살아갈 때, 우리는 그렇게 어른이 된다.
감추고 싶을 수 있는 자신의 불우한 환경도 아무렇지 않게 털어놓고, 슬픈 이야기들도 자신을 성장시켜준 동기가 되었다며 우울하지 않고 담담하게 풀어나간다. 나잇대가 나랑 비슷한 것 같아서 읽는 도중 내 심장이 아리는 기분이 몇 번이고 반복되었다. 술주정이 심했던 아버지를 피해 엄마와 남동생과 같이 아빠가 들어오시는 밤이면 후다닥 짐을 챙겨 조그만 티코를 타고 나가 밤을 차 안에서 새워야 했던 기억, 아버지와 이혼을 하신 후 낮에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학원을 하고 밤이면 술을 팔 수 밖에 없었던 엄마의 아픔에 대한 기억, 친했던 친구가 직접 녹음해준 테이프를 선물받았던 기억, 기숙사에서 혼자 명절을 보내야했을 때 친구가 만들어온 카레 맛 나는 김치볶음밥을 먹으며 깔깔 웃었던 기억까지 마치 그녀의 머릿 속 기억창고에 들어갔다 나온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버겁고 힘들었던 기억들이 상처로 남지 않고 '그래도 좋았다'라는 추억이 되었다.
이야기들 중에서도 기억에 남았던 에피소드는 엄마의 머그컵 이야기였다. 저자가 결혼할 때 엄마에게 선물해준 머그컵 손잡이가 깨지는 바람에 속상해하셔서 회사 본사에 알아보니 컵을 보내면 복구가 가능할 것 같다는 답변에 저자의 어머니는 직접 손편지에 컵에 관한 추억을 써서 보내셨다. 본사에서도 완벽하게는 아니지만 최선을 다해 복구하였다는 직접 쓴 메모를 동봉해 컵과 함께 보내온 그 글이 너무나 따뜻했다. 딸의 결혼 전 선물이 너무나 소중했던 어머니의 사랑이, 작은 선물이 특별한 기적이 되어서 돌아온 그 일이 읽으면서도 얼마나 뿌듯하고 사랑이 느껴지던지.
아주 평범한 우리의 일상도 프리뷰한다면 어떨지 상상해본다. 내가 우주의 티끌만큼 작고 하찮은 존재라고 느껴질 때 매일 똑같은 쳇바퀴처럼 굴러가는 생활이 지긋지긋하고 버거울 때, 어느 것 하나 맘에 들지 않고 자신이 너무도 못생겨 보일 때, 딱 20일만, 그런 우리의 일상을 프리뷰해 보는 건 어떨까. 나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우리의 일상에서도 마음을 울리는 결정적 1분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인생에 있어 주인공은 나라는 것. 삶은 때로는 공평하지 않지만, 내 삶에서 나는 조연이 아닌 주연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 밝고 화창한 날만 가득하다면 그것은 사막이라는 것. 가끔은 비도 내리고 바람도 불어야 화창한 날에 감사하며 살 수 있다는 것. 가끔은 어두움 속에서 달빛만 비추는 길이 더 잘 보인다는 것. 행복한 날만 가득하다면 그 행복을 놓쳐버리기 쉽다는 것. 알고 있지만 쉽게 잊어버리는 그 사실을 이 책은 다시 한 번 되새기라는 그녀의 따뜻한 응원이었다.
그대로 지하철 역사 안을 걸었다. 지나가는 사람들, 서성이는 사람들,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들, 무언가를 파는 사람들, 멍하게 서 있는 사람들. 많은 사람을 바라보는데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들도 저마다의 사연과 삶이 있겠지. 모두가 착하지 않아도, 모두가 친절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꼭 보이는 얼굴이 전부는 아니니까. 무표정으로 종종걸음을 걸으며,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서로 스쳐 가는 타인들에게 나는 무한한 애정을 느꼈다. 경이로움도 함께.
아마도 우린 이렇게 우주를 만드는 걸까.혼자라도 좋았다. 무수한 사람들 속에 포함된 하찮은 존재라도 좋았다. 나는 작고 작은 우주 알갱이가 되어 두둥실, 무중력으로 걷는 기분이 들었다. 글을 쓰기 시작하고 나서는 이런 기분을 거의 매일 느끼고 있다. 정말 감사한 일이다.
에세이를 쓰기는 쉽다. 하지만, 에세이를 잘 쓰기는 쉽지 않다. 굉장히 어렵다. 고수리 작가님은 따뜻하고 예쁜 문장들로 글을 쓴다. 그녀의 이야기들을 통해 위로와 격려를 받고 힘을 얻는다. 이것이 글의 힘이다. 그리고 작가의 원동력이다. 글자가 모인 단어들로, 단어가 모인 문장들로, 문장들이 모인 글이 되어, 누군가의 마음을 만질 수 있다는 것. 그렇기에 우리의 일상이, 또 우리의 삶이 누군가에게는 위로와 격려를 주고 힘을 내게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넘어지고 무너지고, 어둠에 갇혀도 우리는 달빛에도 걸을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