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박준, 난다, 2017
"고독은 외로움과 다른 감정 같아. 외로움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 생기는 것일 텐데, 예를 들면 타인이 나를 알아주지 않을 때 드는 그 감정이 외로움일 거야. 반면에 고독은 자신과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것 같아. 내가 나 자신을 알아주지 않을 때 우리는 고독해지지. 누구를 만나게 되면 외롭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독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야. 고독은 내가 나를 만나야 겨우 사라지는 것이겠지. 그러다 다시 금세 고독해지기도 하면서."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中, 박준, 난다, 2017
필자는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미국의 사회학자 데이비드 리스먼(David Riesman)이 1950년에 쓴 저서 『고독한 군중 (The Lonely Crowd)』에서 유래한 단어인데, 박준 시인의 말을 들으니 만약 '외로운 군중'이라면 그 의미 전달이 약했을지도 모르겠다.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단어가 등장했을 당시의 용례가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1950년대 처음 등장한 단어가 근 70년의 시간을 넘어 아직도 통용되고 있다는 건 주목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군중과 고독의 병치는 이질적이면서도 외려 이해가 된다. 지인들과 웃고 떠들다가도 방 문을 닫는 순간 무기력함이 쏟아지던 경험이 누구에게나 한 번쯤은 존재할 테니 말이다.
요즘은 외로움과 고독의 사이를 넘나드는 생활을 하고 있는데, 생각건대 스스로가 고독하다고 여겨질 때면 외로워지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고독함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수많은 사람 속에 둘러싸여 하루하루를 보내는 삶을 떠올려보라. 내 안의 외로움에 집중할 시간 없이 돌아오면 지쳐 쓰러지는 삶 말이다. 개인의 가치관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 필자의 의견을 보태자면 좋은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고독은 내가 나를 만나야 겨우 사라지는 것이겠지'
박준 시인의 말에 깊이 공감한다. 사람을 많이 만난다고, 좋은 음식을 먹고 즐겁게 웃고 떠든다고 내 안의 고독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몇몇 사람들은 종종 고독함과 외로움 착각한다. 마치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더 많은 모음에 참여하면 내 안의 빈 공간이 채워질 것이라고 여기곤 한다.
혹은 이런 경우도 있다. "친구들이랑 잘 놀러 다니던데, 뭐가 힘들다고 그래"라는 말을 건네는 사람들 말이다. 외로움과 고독을 혼동하는 대표적인 예시다. 사람으로 채워지지 않는 내면의 공허함을 이해하지 못할 때, 오해는 그럴 때 발생한다.
돌이켜보면 처음 상담을 결심할 때 스스로도 비슷한 걱정을 했다. 누구나 이 정도의 우울은 견디고 사는 것은 아닐까. 내 옆에서 웃고 떠들던 그 친구도 방 문을 닫으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경험을 하지 않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내 안의 고독을 마주할 수 있었다. 시끄러운 웃음소리와 담화에서 잠시 물러나 온전히 내면의 문제에 집중하는 시간은 더 많은 것을 허락했다. 물론 여전히 방문을 닫으면 쓸쓸하고, 함께 있어도 혼자인 것 같은 느낌은 여전하지만 나의 이 감정이 '외로움'이 아닌 '고독'임을 알게 됐다.
모든 치유는 인식에서 시작한다. 혼자서도 위태롭지 않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를 만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이 글을 읽는 당신이, 그리고 애쓰는 나 자신이 바쁜 시간의 한 틈을 허용해 스스로를 만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