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90년대 생이라서가 아니라, 그게 당연한 거예요.
퇴근길. 가을밤을 즐겨볼 요량으로 일부러 길을 빙 돌아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귀에 꽂은 에어 팟에서 틀어놓았던 노래가 멈추고 전화벨이 들린다. 대학 친구 E였다. 카톡은 간혹 주고받아도 전화가 오는 일은 없었던 친구였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나 싶어서 얼른 전화를 받았다.
"뭐야 무슨 일이야?" 전화를 받자마자 다다다 무슨 일이냐 물었다. E가 대답했다.
"나 울면서 퇴근하는 길인데 네 생각이 나서.."
울면서 퇴근한다는 말과는 달리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였지만 기운이 없음은 분명했다. E에게 회사에서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다. E는 이제 사회생활 1년 차. 대학교를 다니는 동안 여행과 워킹홀리데이를 다녀오느라 휴학을 길게 했다. 우리는 10학번 동기인데, 무려 17학번과 마지막 학기 수업을 함께 듣고 졸업한 친구였다.
28살 여름, 친구는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첫 번째 직장에선 MD(마케팅 디렉터, Marketing Director)로 일했다. 어떤 일이든 쉬운 일이 있겠냐만은, MD도 참 쉽지 않은 직업이긴 했나 보다. 온라인 MD로 일했던 친구는 CS까지 도맡아 처리했어야 했는데 그렇게 일한 지 3개월 만에 체력이 다 소진되어버리고 말았다. MD 업무 만으로도 너무 힘든데, 얼굴 안 보인다고 온갖 소리를 다 해대는 진상 고객들까지 상대해가면서 일을 하자니 지쳐버리고 만 것이다.
그해 가을 친구는 모 회사의 기획팀으로 이직했다. 얼마 전 모임에서 만났을 때 기획 업무를 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었다. 그땐 나름 일이 재밌다고 했었는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팀장이 아침 회의마다 나보고 멍청하대. 좀 전엔 퇴근하려고 나오는데 월급 편하게 받아서 좋겠다고 비아냥댔어."
뒤로 갈수록 울먹이는 친구의 목소리를 들으며 심장이 쿵쾅댔다. 어떤 무식한 인간이 아직도 이런 말을 하는 걸까. 화가 났다.
"너한테 대놓고 그렇게 얘기했다고?" 내가 되물었다.
"응. 내가 내놓는 보고자료마다 태클이고, 같은 내용도 내가 내면 잘못됐다고 하고 다른 팀원이 내면 좋다고 해. 나 어떻게 해야 해? 내가 진짜 힘든 건 나한테 하는 말도 말이지만, 그럴 때마다 다운되는 팀 분위기야.. 내가 초상집 만드는 것 같아서 진짜 숨 막혀 죽을 거 같아."
앞뒤 전후 사정은 잘 모르겠지만, 일단 그 말 만으로도 그 팀장이 얼마나 무능력한 사람인지는 알 것 같았다. 팀장이랍시고 앉혀놨더니 팀원한테 인신공격해서 팀 사기나 떨어뜨리는 무능력한 인간.
친구의 일이니만큼 친구가 일을 잘했고, 못했고를 따져볼 마음 같은 건 들지 않았다. 그리고 마음이 좀 여려서 그렇지, 일을 못하는 친구도 아니었다. 친구의 첫 직장이었던 MD를 그만둘 때에도 CS 직원을 새로 충원해주겠다고 할 정도로 친구를 붙잡고 싶어 했으니까. 게다가 지금 직장에서도 팀장과의 트러블 외엔 문제가 없다고 했다. 다른 직원들과도 잘 지내는 편이고, 친구가 직접 팀장에게 '내가 한 업무 자료다'라고 보고하지만 않으면 보고 자료 자체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피드백이 돌아온단다. 한마디로 그냥 찍힌 거지.
그만둬야 할까 묻는 친구에게 팀장의 인사이동에 대한 기대는 할 수 없냐고 물었다. 친구 말로는 팀장이 몇 년째 승진이 안된 상태로 계속 이 팀에 배정되어 있고, 자기가 승진해서 옮겨가지 않는 이상 변할 것 같지는 않단다. 답답했지만 그렇다고 바로 '그만둬버려'라고 쉽게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우리는 올해로 스물아홉. 내년이면 서른이 된다. 대한민국 사회가 요구하는 기준에서는 늦게 사회생활을 시작했기에, 나이에 비해 경력이 턱없이 모자랐다. 그런 친구에게 감정대로 퇴사하라고 말하는 건 무책임한 일 같았다.
너에겐 그런 말을 들을 이유가 전혀 없고, 그런 인신공격성 발언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해 대는 그 팀장이 이상한 거라고 스무 번쯤 말해준 뒤에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고 얘기했다. 일이 너한테 맞지 않는 게 아닌데, 사람 때문에 네 경력을 포기하기엔 너무 아깝다고. 그렇지만 방법이 없을 때엔 네가 그 자리를 그만두는 것도 물론 선택지 중의 하나라고. 그건 도망치는 게 아니라, 너를 지키기 위한 선택이라고. 그렇지만 그건 조금만 더 있다가 생각해 보자고 얘기했다.
올해부터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시행되고 있기는 하다. 그렇지만 대다수 직장인들에겐 그림의 떡 같은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많은 직장에서 피해자가 신고했다는 이유로 2,3차 가해가 이어지기 때문이다. 가해자를 편드는 이상한 온정주의가 피해 입은 직장인을 더 괴롭게 하는 게 부지기수다.
친구와 전화를 끊고 나서, 이전 직장에서 만났던 과장님이 생각났다. 그 과장님은 하루에 족히 3시간은 밖에 나가 담배를 피우다 들어오곤 했는데, 일과 시간 내내 나가서 담배를 피워서 그런지 맨날 야근을 했다. 옆자리에 앉아있던 나에게도 야근을 종용하거나 업무를 떠넘기곤 했는데, 나는 업무 시간 내내 거의 자리를 비우지 않는 편이라 그게 너무 억울했다. 낮 내내 놀다가 밤엔 나한테 업무를 떠넘겨? 떠넘겨놓고 또 웹서핑을 해?! 그렇지만 이건 그냥 속으로의 외침이었을 뿐. 당시 스물다섯 살의 사회 초년생이었던 나는 아무 말 못 하고 매번 업무를 처리해주곤 했다.
반년쯤 지났을 때, 나는 내 일도 많았는데 그 과장 일까지 도맡아 해 가며 맨날 밤을 새우다가 출근길 지하철에서 현기증으로 주저앉고 말았다. 넘어지면서 무릎뼈를 크게 다쳤고 병원에 갔다가 오후에야 출근할 수 있었다. 오후에 출근한 나에게 과장이 말했다. "오늘 같은 날 늦으면 어떡해~ 나 저녁까지 마감해야 할 보고서 있는데."
이 인간이.. 뭐라고? 나도 그날은 참을 수가 없었다. "그건 과장님 보고서인데 저랑 무슨 상관이에요? 저 과장님 때문에 맨날 야근하다가 오늘도 과로로 넘어진 거예요. 저 더 이상은 못 참겠어요. 팀장님께 면담 신청하고 사실대로 다 보고 드릴 거예요. 과장님 지난달에 내신 보고서도 다 제가 작성한 거라고 사실대로 말할 거예요!" 과장은 잠깐 당황하더니 곧 나보고 "하여튼 요즘애들은 버르장머리가 없어서!"라고 말했다.
뭐어? 버르장머리? 다시 생각해봐도 어이가 없다. 창피한 줄은 모르고.. 지금 생각해보니 더 어이가 없는 말이다. 요즘애들? 어디서 요즘애들이라는 단어를 운운하나. 역으로 내가 과장님 세대 사람들은 그렇게 뻔뻔하냐고 물었어야 했나? 과장님 세대의 사람들이 다 그런 사람들만 있는 건 아닌 것처럼, 시대와 세대를 불문하고 '잘못된 행동'이 따로 있다. 실제로 나는 그 이후 직장생활에서 그 과장님만큼 무능력하고 뻔뻔한 사람을 본 기억이 없다.
팀장은 팀장대로, 과장은 과장대로, 사원은 사원대로. 다 저마다 해야 할 일이 있다. 일을 잘못하면 꾸중도 좀 들을 수 있다. 뭘 못해도 지적하지 말란 소리가 아니다. 적어도 비난과 비판은 구분해서 얘기하라는 말이고, 잘못된 부분의 수정 요청과 인신공격은 별개의 문제란 소리다. 다 너 잘되라고 하는 소리라고? 그것만큼 웃기는 소리가 없다. 세상에 자기 자신보다 '내가 잘되기를 더 바라는 사람'은 없다. 만약에 있다면 부모님 정도? 적어도 인신공격을 내뱉는 사람은 '걱정돼서 하는 말' 같은 핑계를 대선 안된다.
팀장이라는 직책에는 단순히 업무뿐만이 아니라, 팀원들을 아우르고 이끄는 능력이 요구된다. 어떤 팀장님은 팀원이 잘 못해서, 도저히 안 되겠어서 어쩔 수 없이! '인신공격'이라는 수단까지 사용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업무효율을 위해서 그냥 팀원을 교체하시라 말하고 싶다. 팀장님이 최후의 수단이랍시고 사용한 인신공격은 사실 최후의 수단이 아니었을 확률이 더 높고, 그 효과도 거의 없었을 테니까.
밟으면 욱해서 일어나 더 열심히 한다고? 그런 건 없다. 반발만 커질 뿐. 욕먹기 싫어서라도 열심히 한다고? 열심히 할 사람이었으면 욕 안 먹었어도 열심히 했다. 동기부여를 인신공격이나 욕으로밖에 할 수 없는 팀장이라면 스스로의 무능력함을 통감하고 본인의 자질에 대해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할 타이밍이다. 그걸 핑계와 방패로 삼는다면, 이 세상의 수많은 팀장님들, 넓게는 누군가의 상사일 직장인 모두를 욕되게 하는 일이다.
컨설팅이나 교육차 다른 회사 분들을 만나다 보면 정말 역량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팀장님이나 관리자들을 수도 없이 만난다. 누군가는 인신공격으로 부하직원을 괴롭힐 때, 누군가는 훌륭한 상사의 면모를 쌓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일반 팀원들이 팀장님 때문에 힘들듯, 팀장님도 마찬가지다. 팀원들 때문에 힘든 팀장님들 정말 많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본인에게 '장'이라는 직책이 있음을 아시고, 그렇기에 본인이 더 노력해야 한다고 말하는 분들을 많이 보아왔다. 직원들을 이해하려 노력하고, 좀 더 나은 방법으로 동기부여를 해 주려 하고, 더 능률적이고 효율적인 분위기로 가려는 분들을 정말 많이 만나보았고, 깊이 감명받은 적도 많다. 폭언밖엔 답이 없다 생각하는 상사라면, 그리고 본인의 폭언을 견디지 못하는 직원들에게 이래서 요즘 애들은 근성이 없다고 막말하는 상사라면 그건 그냥 본인의 무능력을 증명할 뿐이다.
조금 있으면 벌써 퇴근시간이다. 아마 오늘도 직장 내 폭언에 시달리다가 퇴근하는 직장인들이 한가득 지하철에 실려, 버스에 실려 집으로 돌아가겠지.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당신의 근성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문제는 그들의 무능력이라고.
E의 오늘 하루는 안녕했는지, E에게 전화를 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