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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연 Dec 08. 2023

인생에서 중요한 책

빵굽는 타자기, 폴 오스터



묘사로만 가득 찬 책이 있었다. 가령 이런 식이다. 바람에 나부끼는 들풀을 묘사하는데 반 페이지를 할애한다. 그다음 화자의 생각이 짧게 드러났다가 다시 바람이 어디서 왔는지 느낌을 기록한다. 바람의 행방은 역시 묘사로 계속 이어진다. 이 책을 읽는데 한 편의 그림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자연 다큐멘터리를 글로 기록하면 이런 느낌일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나는 이 책의 교정자로 참여해서 여러 번 꼼꼼히 읽었었다. 문장은 아름다웠지만 파고들수록 밋밋한 맛이 났다.

친구 장미는 그 책을 읽지도 않았다. 한 번 읽어보라고 줬는데 이 주째 식탁 위에 올려둔 걸 보고 들춰는 봤냐고 물었다.

“아니? 책이 거기 있었나?”

장미네 식탁에는 책이 항상 쌓여 있었다. 바뀌는 책도 있고 망부석처럼 그 자리를 지키는 책도 있었다. 박완서 책은 항상 있었다. 대만에서 샀다던 어린 왕자 원서도 있었다. 영화 각본집도 있었다. 종잡을 수 없는 독서중독자의 독서 폭식에도 묘사가 가득한 ‘그 책’만은 예외였나. 장미는 끝까지 그 책을 한 줄도 읽지 않았다.


냉정하고도 정열적인 독서가 장미는 의외로 책을 권하는 법이 없었는데 어느 날은 폴 오스터 이야기를 꺼냈다. 그의 책을 읽어본 적 있냐는 물음에 나는 폴 오스터가 누군지 물었다. 장미는 말했다. 그는 미국 작가이며 시나 소설을 많이 썼고 어쩌고저쩌고… 하는 어디 나무위키 같은 데서 긁은 것 같은 약력을 읊었다. 너도 최근에 찾아본 작가구나. 장미는 수줍게 얼굴을 붉히더니 필사노트를 꺼냈다. 냉정하고도 정열적인 독서가 장미는 두꺼운 필사노트도 늘 가지고 다녔다. 그는 노트를 섬세히 넘기더니 가장 최근에 쓴 문장을 보여줬다.

‘20대 후반과 30대 초반에 나는 손대는 일마다 실패하는 참담한 시기를 겪었다.’

그리고 그다음 문단을 읽었다.

‘결혼은 이혼으로 끝났고, 글 쓰는 일은 수렁에 빠졌으며, 특히 돈 문제에 짓눌러 허덕였다. … 모두가 내 불찰이었다. 나와 돈의 관계는 늘 삐걱거렸고, 애매모호했고, 모순된 충동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제, 그 문제에 대해 분명한 태도를 취하지 않은 대가를 치르고 있었다.’

장미는 뿌듯해했다. 폴 오스터의 에세이 ‘빵굽는 타자기’에 나오는 첫 문단이라고 했다. 좋은 책이라도 잘 알려주지 않는 장미가 책을 추천하며 흥분했다.

“좋은 문장이네. 그래도 그 책이 뭐가 그렇게 좋은데?”

“나는 좋은 건 얘기 안 한다. 인생에서 중요한 책이니까 말하는 거지.”

나는 아직 인생에 중요한 일들이 뭔지 몰랐다. 장미는 벌써 인생을 다 아는 걸까.

“나도 니도 늘 돈 때문에 힘들어하잖아. 그러면서도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문제 해결에 도움도 안 되는 일들을 계속하고. 가끔은 찐따 같은 거지. 왜 이렇게 사나 하고. 그런데 이 책이… 큰 위로를 줬다. 나 같은 바보가 또 있구나 하는 게.”

장미 나이 서른에 벌써 인생에 중요한 책을 알게 되다니.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미와 헤어지고 그 길로 중고서점에 들러 단 한 권 남은 ‘빵굽는 타자기’를 샀다. 상품이었지만 모서리 한쪽을 접은 흔적이 있었고 그래서 반값보다 더 싸게 샀다. 책을 이전에 소유한 사람도 장미와 같이 첫 장에 감명받은 듯했다. 그가 접었다 편 곳을 다시 접어 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손대는 일마다 실패하는 참담한 시기’를 겪는다. 잘 버텨내기도 하지만 속절없이 꺾이기도 한다. 장미는 책을 읽으며 조금 더 버텨보자는 쪽으로 마음을 먹었으리라. 나도 이 겨울을 그렇게 지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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