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광역시 중구 남포동
"남빈으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나요?"
김숨 작가의 '잃어버린 사람'이라는 장편소설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1940년대 해방 직후 부산으로 밀려온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보니 옛 명칭이 많이 나온다. 주석을 참고하지 않으면, 특히 타지 사람으로 집안 어른들께 지나가는 말로라도 옛 지명에 대한 언급을 들어본 적이 없다면 더더욱 알아듣기가 쉽지 않다. 아직 개발이 덜 된 그 시대의 푸르른 부산이 생생히 묘사돼 있어 상상하는 맛이 일품이지만 처연한 그네들의 삶에는 가슴이 아린다. 그들의 사연만큼이나 오늘 소개하려는 남포동의 역사도 꽤나 애달프다.
'남빈(南濱)', 생소한 지명임에도 주석이 따로 나와있지 않아 인터넷에 찾아보니 관광객들의 발길이 꼭 한 번은 스치는 곳, 그래서 부산 방문 초반에 정말 많이 갔던 '남포동'을 이르는 명칭이란 걸 알게 되었다. 지금은 착평공사로 없어진 용미산(龍尾山)을 기준으로 '남쪽에 있는 해안'이라는 의미의 일본인스러운 명칭이다. 참고로 용미산 위쪽은 북빈(北濱)이라 불렸다고 한다.
그 역사도 유구한 '초량 왜관'이 이곳에 있다. 조선 전기 일본과의 정식 무역을 위해 마련된 부산포 왜관을 시작으로 임진왜란 이후 절영도(현재의 영도) 왜관, 기장 두모포 왜관이 지어졌고, 17세기 중반 일본과의 무역이 크게 늘면서 두모포에서 이곳으로 이전,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일본 상인들의 주요 거점이 되었다.
특히 1876년 조일 수호 조규(강화도 조약)가 체결되며 부산이 개항되고 왜관에서의 무역이 허가되면서, 일본 정부는 통상 업무와 거류민 보호를 위한 관리 관청을 설치하고 용두산을 중심으로 일본 전관 거류지를 조성했다. 이 일대는 전관 거류지의 일본인들이 주로 이용하던 '남빈 해수욕장'이었다. 그러다 1931년 시작된 '남빈 매축 공사'로 대규모 토지가 조성되면서 시가지가 형성되어 '남빈정(南濱町)'이 되었고, 광복 이후 현재의 '남포동(南浦洞)'으로 개칭되었다. 사실 현지인들에게는 남항 쪽에 자갈 해안이 발달해 있어 '자갈치'라 불렸던 지역이라고. (이름의 명맥을 이은 매우 유명한 수산물 시장이 아직도 터를 지키며 건재함을 드러내고 있다!)
남녘 南에 물가 浦를 쓰며 말 그대로 '남쪽에 있는 포구'라는 단순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앞서 구술한 바와 같이 근대 부산의 역사와 발전의 중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매축 공사로 인한 토지 조성으로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상업과 주요 업무 기능이 집중되면서 부산에서 유동인구가 가장 많은 곳 중 한 곳이자 핵심 지역으로 성장하였다.
중근세 시대엔 일본과 가까운 지리적 여건으로 타국인들이 진을 치며 복작거렸지만 선진 문물들이 먼저 유입되어 타 지역보다 한 발 앞서 발전할 수 있었다. 해방 후에는 한국 전쟁으로 임시 수도가 되어 온갖 사연을 안고 각지에서 모인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고, 항구 인근이라는 이점으로 미 보급품 중심의 시장이 금세 형성되었는데 이름하여 국제 시장! 주변에 깡통 시장, 자갈치 시장과 맞물려 대규모 상업 지구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1990년대 초까지는 부산 최고의 번화가이자 부산의 행정·경제·사회 중심이 바로 남포동이었다.
하지만 1990년대 들어 시청, 지방법원, 고등법원, 검찰청 등 각종 행정기관이 연제구로 옮겨가며 원도심으로서의 기능을 잃고 살짝 주춤하는 듯 보였으나 2000년대 이후 도로를 정비하고 메인 스트리트인 광복로 패션거리에서부터 BIFF거리 사이에 로드샵 등 상가들이 빽빽하게 들어서며 전형적인 시장 상권으로 입지를 다지게 되었다. 그리고 2009년 롯데백화점 광복점이 오픈하면서 정점을 찍었다. 근대 부산 특유의 구시가지의 모습과 분위기가 잘 보존되어 있으며, 일주일에 한 번(토요일) 다리가 열리는 영도대교와 화물 컨테이너들과 어선이 즐비한 항구의 뷰 등이 그야말로 전통과 현대화가 조화된 '부산스러움'을 자아낸다. 거기다 긴 역사에 걸친 오래된 맛집과 감칠맛 나는 시장 음식까지 더해져 관광지로서 특화된 곳이 되었다.
뭐 어느 번화가가 다 그렇듯 코로나 여파로 외국인 관광객은 물론 내국인의 방문마저 격감하며 상권이 큰 타격을 입긴 했다. 요즘 다시 조금씩 살아나는 것 같긴 하더라만은, 예전에 비하면 공실도 많고 유동인구도 적어진 듯하다.
그럼에도 그곳 사람들은, 쇄신을 위해 과하게 트렌드를 따라가지 않고 특유의 감성을 간직한 채 본연의 모습을 가지고 자기 자리에서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해나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니 오늘도 남포동은 예전에 비하면 약간은 한산해졌지만 여전히 은은한 활기가 남아있는 것이겠지! 본래의 정체성이 확실하다면 호불호는 갈릴지라도 꾸준히 찾는 팬도 있을 것이요, 다시 한번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날이 반드시 오리라 믿는다. 내가 아는 한, 세상은 늘 돌고 도니까. 하는 어느 남포동 팬의 염원 ^_____^
부산을 방문하는 경로는 고속버스, 기차, 비행기 다양하지만(장롱면허 소유자) 가장 많이 이용하는 수단은 아무래도 기차다. 처음에도 그랬다. 부산역에 내리면 특유의 세련되면서도 정겨운 구시가지 전경에 흥분도가 급상승한다. 여기에 코끝을 맴도는 은은한 바다내음은 촉매제 역할을 했다. 자연스레 남포동으로 발걸음을 옮기곤 했는데 아무래도 방문 초기 'SNS 추천지'를 아예 무시할 순 없던 터라.. 씨앗호떡 먹으러, 물떡 먹으러, 비빔당면, 납작 만두 먹으러, 시장 분위기 즐기러, 책 마니아답게 보수동 책방골목 구경하러 많이 갔다. 덩달아 부산 토박이인 그 사람은 혼잡하고 멀어서 평소라면 거의 가지 않던 남포동을 나 때문에 많이 갔다.
처음엔 그 분위기가 좋아서, 그렇게 방문하면서 쌓인 추억이 그리워 주기적으로 갔던 남포동!
우리는 장거리 커플답게 못 만나면 2-3주 정도는 못 만났지만 한 번 만나면 3-4일을 붙어 있곤 했다. 각자의 홈그라운드에서 만나다 보면 아무리 날짜를 잘 뽑아도 특별 일정을 피할 수 없을 때가 있었다. 부산에서 더 자주 만났다 보니 그 사람의 가족 행사가 겹치면 나 혼자 시간을 보내야 했던 적도 많았는데, 그럴 땐 주로 남포동에 갔다. 수많은 인파 속에서는 혼자 돌아다녀도 안전할 것 같았다. 혼자 다니는 것에 거부감도 없고 무슨 깡이냐 싶을 정도로 용감하게 새벽길을 거닐 때도 많지만 변화무쌍한 감정 변화로 인해 두려울 때가 가끔 있었다. 그럴 땐 고민 없이 남포동이었다. 커플만 있지도 않고 헌팅하려고 눈에 불을 켠 남자무리도 없고 그저 사람 사는 우리 동네 번화가 같은 느낌이라 마음이 편했던 것 같다.
볼거리, 먹거리, 할 거리가 무궁무진하다. 날을 잘 잡으면 세계문화 야시장이 열릴 때 가볼 수도 있다. 현금 두둑이 뽑아서 길거리 음식으로 미각을 충족시키고 엄선한다고 했는데도 먹고 싶은 게 또 나타나는 남포동 시장을 걷다 보면 외장 하드처럼 외장 위를 개발하고 싶은 욕구가 샘솟는다.
많이 먹고 용두산 타워 보러 에스컬레이터가 아닌 계단으로 걸어 올라갔다가 타워 내부를 꼼꼼하게 살펴보고 다시 계단으로 걸어 내려오면 소화는 되었지만 다리가 아팠다. 그럼 즐겨 찾는 오래된 마사지 샵을 찾았다. 처음 우연히 발견해서 갔는데 가격도 합리적이고 손맛이 일품인 마사지사 사장님을 발견한 이후로 방문할 때마다 종종 간다.
그렇게 남포동을 한껏 즐기고 있으면 일정을 마치고 한달음에 그 사람이 온다. 4년을 조금 넘게 만났는데 4년 내내 가슴이 두근거렸다. 장거리라 자주 안 봐서 그런가. 아니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4년 내내 가슴이 설레지? 과학적으로 불가능한 거 아닌가? 그렇게 좋아했다. 나는 그 사람을. 아직도. 바보 같다.
안 그래도 안전한 남포동 거리에서 그 사람과 함께 걸으면 나는, 어벤저스를 등에 업은 것마냥 편안하고 포근하며 든든하고 자랑스럽고 위세 등등 했다. 사랑은 눈을 멀게 한다. 아니, 모든 게 좋아 보이는 마법에 걸리는 건가? 아니, 볼품없는 건 아무래도 상관 없어지고 좋은 점만 부각되이 보이는 건가? 오랜 수험생 생활로 검박하게 생활하던 그 사람의 티셔츠에 있던 보풀보다, 깔끔하고 프레시한 섬유유연제 냄새에 두근거렸다. 칠이 벗겨지고 움푹 파인 그 사람의 자동차보단, 어디든 모르는 길이 없고 편안하게 주행하는 그 사람의 운전 실력이 돋보였다.
그리고 아직도 다른 누구를 만나도 그 사람만큼 좋은 점을 못 찾고 설렘을 느끼지 못하는 걸 보면 나는 기다리나 보다. 세상이 돌고 돌듯, 그 사람과 나에게도 다시 한번 스포트라이트가 비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