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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짐 없는 사람 Oct 24. 2020

'국민 배신남'이 탄생한 드라마

젊은이의 양지(KBS, 1995)

위대한 성공기에는 항상 ‘예상치 못했던’이라는 요소가 붙는다. 만화 <슬램덩크>에서 북산이 산왕을 꺾은 것이나, 2018 러시아 월드컵에서 한국 대표팀이 전차군단 독일에 2:0으로 승리를 거둔 것처럼.

<젊은이의 양지>는 이를테면 1995년의 북산이자 한국 대표팀이다. 드라마 왕국으로 군림하던 MBC가 김희애, 김혜수, 이영애라는 당대 톱스타들을 내세워 방영한 <사랑과 결혼>과 맞붙었던 작품이 <젊은이의 양지>다. 그 작품을 바라보는 초기 시선은 ‘패전처리용이었다’고 회고한 담당 PD의 인터뷰를 보면 가늠할 수 있다.


하희라 정도가 알려진 청춘 스타였지만 당시 결혼 직후라 스타성이 위축된 상태였고, 이종원, 배용준, 박상아, 전도연 등 대다수의 주연급이 신인이었으니 큰 기대를 걸래야 걸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이야 ‘욘사마’ 배용준이요, ‘칸의 여왕’ 전도연이라지만 당시엔 ‘그게 누구라고?’ 하는, 이제 막 얼굴 내민 신인에 불과했으니까. 게다가 X세대가 활약하던 세련된 1995년에 ‘탄광촌에서 자란 젊은이의 사랑과 야망, 배신’이라는 촌스러운 이야기라니.


대다수 출연진이 신인급이던 <젊은이의 양지>. CF스타로 뜬 이종원은 이 드라마로 '국민 배신남'의 기틀을 닦고 <청춘의 덫>으로 쐐기를 박는다.


<젊은이의 양지>의 메인 스토리는 단순하다. 가난하지만 똑똑한 남자 인범(이종원)이 사랑을 약속한 고향의 연인 차희(하희라)를 배신하고 부잣집 아가씨에게 접근했다 결국 과거가 드러나 모든 것을 잃는다. ‘조강지처 버린 놈치고 잘되는 놈 없다’라는 촌스러운 권선징악형 신파라고 보면 된다. 그런데 이 신파가 먹혔다. 지상파 방송이 절대적이던 1995년이라지만 62.7%라는, 역대 드라마 시청률 5위라는 어마어마한 숫자를 기록한 것.

당시 10대였던 나와 어린 동생들까지 주말 저녁이면 거실에 모여 앉아 부모님과 함께 <젊은이의 양지>를 시청했던 기억이 새록하다. 아마 1995년의 대다수 한국 가정에서 비슷한 풍경이 펼쳐졌으리라 짐작한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어린 동생들이 보기에 어두운 내용이 많았는데 우리 부모님이 무슨 생각이셨나 싶지만, 부모님도 재밌는 드라마를 볼 권리는 있는 거니까요.


남자가 자신의 아이를 밴 연인을 버린다는 내용 외에도 인범의 동생 인호(박상민)와 그의 연인 조현지(이지은)가 소매치기 및 조폭으로 활동하고, 인범이 접근하는 진미화장품 하일태 회장(박근형)을 생부로 둔 현지가 자신과 어머니를 버린 아버지에게 복수극을 벌이는 등 주말연속극으로는 제법 어둡고 음산한 이야기가 많았다.

무슨 일이 벌어졌든 결국 주인공들은 행복해지고 악역들은 회개한다는 안방극장의 공통된 미덕과는 달리, 주요 인물이 죽거나 반신불수가 되는 결말을 보여준 것도 <젊은이의 양지>의 파격이었다.


<젊은이의 양지>를 좋아했던 내 또래가 그 드라마에 꽂힌 포인트는 각각 달랐다. 어떤 친구는 남장여자 소매치기라는 독특한 캐릭터를 맡아 한쪽 입꼬리를 삐죽이는 이지은의 보이시한 연기를 따라하는 데 여념이 없었고, 어떤 친구는 엄마와 함께 “인범이, 저 죽일 놈! 우리 차희 불쌍해서 어쩌나” 하며 욕하며 보는 재미가 컸다고 회고한다.


많은 문학소녀들이 종희에게 감정이입을 했었다. 나도 마찬가지.


나? 시크한 척했지만 운명적 로맨스를 꿈꾸는 10대였던 나는 석주(배용준)와 종희(전도연)의 풋풋한 사랑에 푹 빠져들었다. 국내 굴지의 진미화장품(돌이켜봐도 참 식품회사 이름 같은) 회장 아들인 석주는 똑똑하면서도 부드럽고, 영화감독을 꿈꾸는 예술적인 남자다.

차희의 동생 종희는 어릴 적부터 <죄와 벌>을 읽고, 김수영의 시 ‘풀’을 외우고 다니는 문학소녀로, 어릴 적부터 인범밖에 모르는 언니 차희에게 ‘팩폭’을 시전하는 똑부러지고 맹랑한 여자. 수년에 걸쳐 한 번씩 서로에게 인상적인 만남을 가졌다가 결국 영화감독과 소설가로 재회한 이들의 사랑은 울고 짜고 화내면서 봐야 하는 인범과 차희의 이야기보다 후반부에 훨씬 큰 사랑을 받았다.

덩달아 이들의 등장 장면마다 테마곡으로 흘러나온 아일랜드 록밴드 크랜베리스(Cranberries)의 노래 ‘오드 투 마이 패밀리(Ode to my family)’도 인기를 끌었고. 나를 비롯해 수많은 소녀들이 석주를 연기한 배용준에 반하며 훗날 ‘욘사마’ 탄생의 밑거름이 되어준 건 물론이다.


카리스마 넘치는 마초가 아니어도 매력적일 수 있음을 보여준 석주 역의 배용준. 그가 '욘사마'가 될 줄은...


간간이 케이블 채널에서 재방하는 <젊은이의 양지>를 보고 있으면 새삼 재미난 부분이 많다. 경악을 금치 못하는 중간 중간의 촌티 넘치는 비장한 영상과 배경음악은 살며시 넘어가주자.

“인범이는 나의 영원한 베스트 프렌드야. 그런 인범이에게 실례되는 말을 하다니, 석란이 네가 참 실망스럽다” 같은, 지금 들으면 머리를 벅벅 긁고 싶어지는 오글거리는 대사도 옛날 드라마 보는 묘미니까 참자.


지금 내 눈에 띄는 건 1995년에 ‘오지게’ 욕을 먹던 인범이란 인물이 지금 기준으로는 꽤나 억울하게 욕을 먹은 게 아닌가 하는 인식의 변화다. 강원도 사북 탄광촌에서 사고로 어릴 적 광부 아버지를 여의고, 탄내 날리는 동네에서 커피와 웃음을 파는 다방 마담 어머니와 사고뭉치 동생과 함께 자란 인범에게 사북은 어떻게든 벗어나고픈 동네였다.


인범의 마음이 돌아선 것을 알고 임신과 출산 사실을 숨겼던 차희.


서울대학교 경영학과 동기이자 진미화장품 회장 아들 석주에게 본능적이고도 의도적으로 접근했을 때 그의 나이가 고작 스물하나.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함께하겠다고 약속한 차희와의 관계도 성숙했다고 보긴 어렵다.

사랑 좀 겪어본 우리 모두 알지 않나? 절절했던 20대 초반 사랑이 뜨거운 만큼 얼마나 설익은 것인지를. 게다가 외면한 부분도 있긴 하지만 차희가 몰래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인범은 몰랐다.


심지어 거짓으로 접근한 석란과의 결혼이 무산되고 모든 걸 잃을 때도 인범은 고작 스물여덟 살이었다고. 만약 지금 스물여덟 살 청년에게 “스무 살 때 사귀던 여친이랑 잤는데 임신했다면 결혼할래? 지금 정해진 취업은 포기하고 말이야”라고 묻는다고 생각해 보라. 그 청년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각자의 판단에 맡긴다.


그나저나 <젊은이의 양지>에 다시 폭 빠져들었다가 제대로 연식 인증하는 낭패도 겪었다. ‘오드 투 마이 패밀리’가 흘러나오자 “이 노래 제목이 뭐였죠?” 묻는 88년생 후배에게 “그, 드라마 <젊은이의 양지>에서  배용준이랑 전도연이 등장할 때 나오는 노래잖아!”라고 내뱉어 후배의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지는 것을 목격해야만 했거든. 후, 차라리 <개그콘서트>의 ‘두근두근’ 코너에 등장했던 노래라고 했어야 했는데.



*이 글은 2018년 8월 <비즈한국>에 게재했던 글을 재편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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