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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짐 없는 사람 Oct 23. 2020

빙글빙글 키스신은 언제부터였나

질투(MBC, 1992)

“넌 대체 누굴 보고 있는 거야, 내가 지금 여기 눈앞에 서 있는데~ 날 너무 기다리게 만들지 마, 웃고 있을 거라 생각하지 마♬.”


30~40대라면 무척이나 친숙할 가사다. 드라마 <질투>의 주제가는 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낸 이들이라면 <걸어서 하늘까지> <마지막 승부> 주제가와 더불어 운동회 등 각종 행사에서 목청 터지게 불렀을 노래다. 어린 친구들은 겨우겨우 노래만 알고 드라마는 모를 텐데, <질투>는 최초의 트렌디 드라마였고, 그 주인공이었던 故 최진실은 명실공히 1990년대를 지배한 요정이었다.

엄청나게 빼어난 외모의 소유자도 아니요, 좌중을 압도하는 카리스마 연기로 이름난 것도 아닌데, 최진실에게는 오직 그만이 가지는 특유의 매력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질투>를 비롯해 <아파트> <별은 내 가슴에> <그대 그리고 나> <장미와 콩나물> <장밋빛 인생>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 등 드라마와 영화 <나의 사랑 나의 신부> <미스터 맘마> <마누라 죽이기> <편지> 등에서 십분 그 매력을 발휘했다. 그 중 <질투>는 최진실 매력의 포텐이 터진 작품이자 1990년대라는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음을 선언한 드라마.


그냥 변호사도 아니고 국제변호사 민상훈


<질투>는 어릴 적부터 친하게 지낸 친구 사이인 이영호(최수종)와 유하경(최진실)이 우정과 사랑 사이를 오가며 갈등을 겪는 이야기가 주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 우정이 존재할까, 남사친과 여사친이 끝까지 친구 사이를 유지할 수 있을까 하는 시대를 막론하고 지겹도록 되풀이되는 토론 주제를 ‘신세대’라 불리던 90년대 젊은이들을 통해 밝고 경쾌한 영상과 연출로 선보인 것.

<질투>는 이전의 ‘연속극’이라 불리던 가족 중심의 홈드라마를 벗어나 막 사회에 진출한 청춘들의 연애와 라이프스타일에 집중해 한국 최초 트렌디 드라마로 꼽히는데, 이는 주인공들의 직업으로도 드러난다. 영호는 일한 만큼 승진과 실적이 가능한 광고회사(지금으로 치면 스타트업)에 취직하고, 하경은 대기업 계열 여행사에 취직해 기획과 영업, 가이드 투어까지 도맡아 종횡무진 활약하는 모습을 보인다.

코로나 시대를 살고 있는 지금이야 여행사가 '폭망'이지만 국내에서 해외여행 자유화가 전면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1989년이었으니 방영 당시인 90년대 초 여행사의 인기는 상당했으리라. 또한 영호가 한눈에 반해 데이트하며 하경의 애를 태우게 한 미모의 여인 한영애(이응경)는 당시 드물던 프랜차이즈 피자가게 사장이었고, 하경의 과외교사였고 추후 하경의 친구 배채리(김혜리)와 결혼하는 민상훈(이효정)은 그냥 변호사도 아닌 국제변호사였다.


지금이야 인구 대비 편의점 수가 제일 많은 나라지만, 이때만 해도 편의점은 무척 드문 공간이었다.


주인공들이 머무는 주요 공간 또한 (당시에는) 남달랐다. 주요 인물 중 하나인 영애가 주인인 만큼 프랜차이즈 피자가게가 전면으로 등장해 대한민국에 피자 붐을 일으켰고, 영호와 하경이 자주 만나 컵라면과 김밥, 냉동만두를 섭취하는 것은 물론 출장 전날 급하게 속옷을 구입하던 편의점이 제3의 주인공처럼 활약했다.

물론 지금과 달리 온정이 남아 있던 터라 단골 편의점 직원이 지갑을 두고 온 하경에게 외상으로 물건을 주기도 한다! 개원한 지 3년밖에 안 된 롯데월드가 협찬 광고 티가 물씬 나도록 주인공들의 데이트 장소로 전면에 등장하고, 상훈과 채리의 데이트 장소로 칵테일 바가 애용되는 등 <질투>는 공간마저 90년대스러웠다.


물론 <질투>가 직업과 공간과 영상 등 비주얼로만 90년대를 탐한 건 아니다. 개인적으로 이 드라마의 최대 매력은, 우정과 사랑 사이를 헤매는 영호와 하경의 경쾌한 행각보다 요즘 말로 ‘걸크’ 터지는 여성 캐릭터들의 매력이라 본다. 주인공 하경은 귀엽고 털털하면서도 똑 부러지는 일솜씨의 소유자다. 어릴 적부터 친구인 영호와의 관계에서도 친구의 영역을 벗어나기 어려워 미적거리긴 했으나 양손에 쥔 떡처럼 영애와 하경 사이를 어지럽게 오가는 영호와는 다르게 제법 저돌적이었다. 회사에서는 신입사원 중 수석을 거머쥐며 입사해 상사들의 관심을 독차지하는 똑순이. 동료 남자직원들의 시기와 질투를 받아도 눈물 흘리지 않고 경쾌하게 받아치고, 소설가인 엄마와의 사이도 여느 모녀와 다르게 독립적이면서도 상호보완적으로 조언을 주고받는다.


다른 여성 캐릭터도 마찬가지. 뭇 남자들의 흠모를 받는 영애는 언뜻 지고지순한 여성처럼 보이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의 성공을 위해 옛 남자에게 청탁도 서슴지 않는, ‘사랑밖에 난 몰라 행동파’다. 영원한 취직을 위해 똑똑하고 돈 많은 남자와의 결혼을 꿈꾸는 채리는 요즘 남자들이 보면 눈살을 찌푸릴 수 있는 캐릭터일지언정 음험함 따윈 없이 자신의 욕망에 솔직담백하다.

목소리 큰 방송국 PD와 주책 맞은 농담 던지기 일쑤인 신문사 부장 사이에서 꿀림 없이 온화하게 말을 받아치는 하경의 엄마는 또 어떻고. 그러니 <질투>를 보다 보면 절로 그런 생각이 든다. 여자인 내가 봐도 우유부단한 영호보단 하경이랑 사귀고 싶은데? 하경아, 눈을 돌려봐. 영호가 귀엽긴 하지만 더 괜찮은 남자들이 많다고. 아니면 그냥 화끈하게 미국 연수를 떠나도 좋을 텐데 말이지.


이른바 '빙글빙글 키스신'을 처음 선보인 <질투>


드라마 마지막, 사랑을 확인한 영호와 하경이 키스를 나누는 엔딩신 또한 이 드라마가 남긴 '레전드' 중 하나. 키스하는 남녀를 가운데 두고 카메라가 빙글빙글 원을 돌며 그 모습을 촬영하는 모습까지 담으며 끝났는데, 이 카메라워크는 이후 수많은 트렌디 드라마에서 회자되곤 했다. <질투>와 DNA가 닮아 있는 드라마 <쌈, 마이웨이>에서도 친구 사이인 주인공 남녀가 감정을 확인하는 신에서 <질투> 주제가와 함께 빙글빙글 키스신이 등장했었다(아쉽게도 1990년생인 막냇동생은 그 장면의 의미를 1도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 보면 어이없을 정도로 촌스럽겠지만, <질투>는 그 촌스러움을 극복하게 하는 최진실의 매력이 뿜뿜 터지는 드라마다. MBC 홈페이지에서 유료 다시보기로 그 매력을 재확인할 수 있다. 아마 보면 유승범이 부른 주제가가 흥얼흥얼 입에 붙게 될 걸?



*이 글은 2018년 10월 <비즈한국>에 게재했던 글을 재편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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