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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짐 없는 사람 Oct 22. 2020

트렌치코트 휘날리던  박 반장을 기억하시나요

수사반장(MBC, 1971~1989)

화성연쇄살인사건의 범인으로 밝혀진 피의자 이춘재가 11월 2일 수원지법에 '이춘재 8차 사건 재심' 공판에 증인 자격으로 출석할 예정이란다(공소시효가 지났기 때문). 8차 사건 범인으로 몰려 20년간 옥살이를 한 윤 씨가 청구한 재심 재판에서 진범인 그가 어떤 표정으로 진술할지 상상이 안 간다. 억울한 옥살이를 한 당사자야 피를 토하는 심경일 것이고, 수십 년간 범인을 잘못 알고 있었을 피해자 유족들의 한은 말할 수 없을 것이며, 당시 범인을 쫓던 경찰들의 심경은 또 얼마나 착잡할 것인가. 화성연쇄살인사건은 워낙 유명했던 사건인지라 이를 다룬 대중문화계의 작품도 많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살인의 추억>이 가장 유명하고, 드라마 <갑동이> <시그널> <터널> <라이프 온 마스>도 주요 에피소드로 화성 사건을 다뤘다. 그리고 또 하나의 작품이 있다. <살인의 추억> 속 형사들도 즐겨봤던, 1970~1980년대 인기 드라마이자 한국 수사물의 레전드로 불리는 <수사반장> 말이다.

    

                                                                                          

박 반장의 진두지휘 아래 세 명의 형사가 주축이 된 수사반. 종영 후 배우들은 명예 경찰로 임명됐고, 2018년 '박 반장' 최불암은 명예 경무관으로 승진했다.


<수사반장>은 1971년 3월 시작해 1989년 10월 880회로 막을 내릴 때까지 무려 18년간 방영했다. 원래 1984년 10월 680회로 종영했다가 시청자들의 성원으로 1985년 5월 재개했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는데, 박 반장(최불암)과 김 형사(김상순)·조 형사(조경환)·남 형사(남성훈)가 중심이 되어 실화를 바탕으로 한 범죄 사건을 해결해 나간다. 시청률 70%를 기록한 적도 있는 <수사반장>은 880회 ‘서울은 비’에서 화성연쇄살인사건을 빗댄 에피소드를 다루며 막을 내렸다. <수사반장>의 자문을 맡으며 ‘영원한 수사반장’으로 불렸던 최중락 전 총경 또한 한때 화성연쇄살인사건에 투입된 적이 있으니, 현실에서 잡지 못한 범인을 드라마에서나마 잡는 장면을 보면서 어떤 마음이었을지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다들 한 풍채하셨던 형사님들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방영했던 장수 드라마인지라 <수사반장>의 구체적인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분명 오프닝 음악 들었던 기억은 나는데). 다만 아버지의 증언에 따르면 매주는 아니어도 가끔 <수사반장>을 보셨다니, 집안의 공인된 ‘테순이’였던 나도 그 옆에서 <수사반장>을 봤을 것이다. 그래도 제대로 <수사반장>을 추억하고 싶어 iMBC 다시보기로 20편(2부작 포함하면 22편)을 시청했다. 300, 400, 500회 특집을 비롯해 1차 종영했던 680회와 마지막인 880회까지 업로드돼 있어, 18년간의 역사를 가늠하기엔 턱없이 부족하지만 어떤 느낌이었는지 감지할 수 있을 만큼은 된다.
그런데, 이게 생각보다 재미나다. ‘레전드’라지만 종영한 지 30년이 된 올드한 드라마라 큰 기대를 안 했건만, 역시 명작은 명작이다. 정갈한 넥타이 정장 차림에 가끔 트렌치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진지하게 수사에 임하는 박 반장은 그야말로 ‘한국의 콜롬보’요, 어르고 달래며 범인들을 취조하는 김 형사는 인간적이고, 후덜덜한 체격을 자랑하지만 여자 앞에서 쑥스러워하는 조 형사와 샤프한 이미지지만 가끔 행동이 먼저 앞서는 남 형사는 (실례지만) 귀여웠다.
 

시추에이션 드라마인 만큼 고정 출연진인 형사들 외 출연진은 매번 바뀌는데, 당시 활약하는 배우들은 물론 MBC 공채 탤런트라면 죄다 한 번 이상은 ‘수사반장’에 출연한 듯하다. 다시보기로 본 20편에서 발견한 얼굴만 해도 어마무시하다. 김혜자·나문희·박원숙·김영옥·김영애·이대근·고두심·이정길·김용림·서갑숙·임현식·임채무·정혜선·변희봉·송경철·이계인·김기현·천호진·신신애·김혜옥·박상원·전무송·정성모·한영숙·이희도·한인수·서권순…. 잠깐 지나치는 단역에 저 배우들이 나온다니까.

                                                                                                 

범인 역할로 자주 얼굴을 내비친 변희봉


지금도 빼어난 연기력으로 현장을 지키고 있는 중장년 배우들이 젊을 적부터 남다른 연기력을 보였음을 <수사반장>으로 확인할 수 있다. 500회 특집 ‘사천만의 눈동자’ 편에 등장한 고두심의 연기가 그렇다. 어린이 유괴사건을 다룬 이 특집에서 고두심은 당시 20대 후반의 나이로 자식을 유괴당한 처절한 심정의 어머니를 연기했는데, 기자들 앞에서 공개 수사를 원하면서 절규하다 기절하는 장면은 소름이 돋을 정도다.
‘스타 탄생’에서 허황된 상상으로 정신 착란을 일으키며 살인을 저지르는 배우 지망생과 ‘여름 여름 여름’에서 비밀스러운 과거를 숨기고 산속에 숨어 지내는 아낙을 연기한 김혜옥 또한 눈길을 끈다. 정말 범인 같은 느낌을 자아내는 능청맞은 연기의 변희봉은 또 어떻고.

박 반장에게 제보하는 여관 주인 역으로 출연한 김영옥

                                                                                              

'남편은 화물, 아내는 화주' 편에 등장한 김혜자


배우들을 보는 재미도 재미지만, 경종을 울리는 사회적 메시지와 그를 담아내는 휴머니즘 가득한 시선이 <수사반장>을 보는 또 다른 재미다. 아무래도 수사 기술이 뒤떨어지던 시대이니만큼 ‘과학수사’의 짜릿함은 없지만 끊임없는 의구심과 발로 뛰는 수사로 수사 자체에 뭔가 진정성이 깃들어 있달까. 때로는 범죄를 저지른 가해자보다 악독한 피해자를 비추며 범죄가 일어난 근본적 원인을 들추기도 하고, 한순간의 실수가 어떻게 나락으로 떨어지는지 비추며 범죄에 대한 경각심을 고취하기도 한다.


가난을 못 이겨 범죄를 저지르던 생계형 범죄(남편은 화물, 아내는 화주 편)부터 거액의 돈을 횡령하기 위한 살인사건(꼭두각시놀음 편)과 돈으로 명예를 사는 중매 결혼의 폐해로 일어난 계획형 환상 살인(무지개 저쪽) 등 범죄 스토리를 통해 1970년대와 1980년대의 한국 변화상을 고스란히 지켜보는 의미도 있다. 흑백 TV로 시작해 컬러 화면으로 끝맺은 <수사반장>이니, 그 장구한 세월 동안 한국이 얼마나 많이 변했을지 감도 안 잡힌다.

                                                                                               

발로 뛰는 '한국의 콜롬보' 박 반장


<수사반장>의 끝에서, 박 반장은 지금도 가끔 회자되는 명대사를 남겼다. “빌딩이 높아지면 그림자도 길어집니다.” 고도성장으로 인한 빈부격차로 생기는 범죄에 대한 말로, 그 대사 이전에는 “범죄를 유발시키는 쪽은 어느 쪽인가”라고 씁쓸하게 토로하기도 했다.

물론 범죄는 나쁘고, 범죄자는 그에 합당한 벌을 받는 게 맞다(화성 사건의 이춘재 같은 인물에게 동정의 여지는 1도 없다). 그래도 때론 죄를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던, 사연 있는 범죄자에게 연민과 동정의 눈길을 보내던 <수사반장>의 그때 그 분위기가 그립기도 하다. 그 시절 물건들도 좋지만, 그 시절의 온기도 ‘레트로’할 수 있을까?



*이 글은 2019년 9월 <비즈한국>에 게재했던 글을 재편집한 것입니다.

지금 MBC ON에서 이따금 재방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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