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500년-인현왕후(MBC, 1988)
어느 장희빈을 보며 자랐느냐. 때때로 한국에선 이런 걸로도 연식을 가늠할 수 있다. 궁녀로 입궁해 왕후의 자리까지 올랐던, 파란만장한 삶의 주인공 장희빈은 1961년과 1968년 두 차례 영화로 선보인 이래 1971년, 1982년, 1988년, 1995년, 2002년, 2010년, 2013년까지 TV 드라마로 일곱 차례 방영되었다. 그러니 어느 장희빈을 봤는지에 따라 자연스럽게 나이대를 추측할 수 있다.
1961년 영화 <장희빈>으로 1대 장희빈을 연기한 배우는 김지미, 1968년 <요화 장희빈>에 출연한 배우는 남정임이며, 1971년 최초로 브라운관에 등장한 장희빈을 윤여정이 맡았고, 1982년 <여인열전>에서 첫 인물로 나온 장희빈을 이미숙이, 1988년 <조선왕조 500년-인현왕후>에선 전인화가 장희빈으로 나온다. 참고로 1971년부터 1988년까지 3번의 장희빈은 모두 MBC에서 제작되었다. 이후 SBS에서 1995년 처음 도전한 장희빈을 정선경이, KBS에서 처음 도전한 장희빈을 김혜수가, 장희빈이 주연 아닌 조연으로 등장하는 2010년 MBC <동이>의 장희빈을 이소연이 연기했고, 2013년 9대 장희빈을 SBS <장옥정, 사랑에 살다>로 김태희가 맡았다. 면면만 봐도 알겠지만 대부분 빼어난 미모를 갖춘 당대 스타들이 장희빈을 거쳐 갔다.
정 1품 빈 첩지를 받은 희빈 장씨, 통칭 장희빈이라 불리는 여인 장옥정이 이토록 대중매체에서 사랑 받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조선왕조 500여 년 동안 양반이 아닌 신분으로 한때나마 왕후(중전)의 자리를 차지한 사람은 그녀가 유일하다. 보수적이기 짝이 없는 조선왕조실록에서 인정한 미모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사대부의 나라 조선에서 중인인 역관의 자식으로 태어나 궁녀로 입궁해 임금의 총애를 받아 후궁이 되고, 귀한 아들을 낳아 기존 중전인 인현왕후를 몰아내고 중전이 되었다가 6년 만에 다시 후궁으로 강등되더니 끝내 남편인 임금에게 죽음을 명받는 드라마틱한 삶. 이런 게 바로 드라마 주인공의 삶이구나 싶을 만큼 드라마 세계에서 다시없을 매력적인 인물이 아닌가 말이다. 저 멀리 영국에서 헨리 8세와 앤 불린의 이야기가 사랑받아 시대별로 영상화되는 것처럼, 한국에는 숙종과 장희빈이 있는 셈이다.
나의 경우 국민학교(초등학교가 아니다, 크흑)에 입학할 당시 전인화의 장희빈을 봤던 장면장면이 어슴푸레 기억나고, 10대에는 정선경 주연의 장희빈을 흥미진진하게 시청했고, 20대에 김혜수가 연기하는 장희빈에 기가 질리곤 했다. 아무래도 보다 또렷이 기억나는 건 정선경, 김혜수 주연의 장희빈인데, 얼마 전 채널을 돌리다 케이블방송에서 전인화 주연의 <조선왕조 500년-인현왕후>를 방영하는 걸 알곤 매료됐었다(<조선왕조 500년>은 1983년부터 1990년까지 11개의 시리즈로 조선시대 주요 사건을 그려낸 작품으로, 현재 사극의 기틀을 마련한 작품). 단아하고 카리스마 있는 왕비나 재벌가 사모님을 주로 맡아온 전인화의 앳된 시절을 볼 수 있을 뿐더러, 숙종 역에 강석우, 인현왕후 역에 박순애, 숙빈 최씨 역에 견미리, 장희빈의 오빠 장희재 역에 이덕화, 그 외에 정혜선, 김해숙, 고두심 등 연기력 갖춘 배우들이 대거 출연했다. 당시 데뷔한 지 몇 년 되지 않은 전인화가 장희빈 연기를 위해 사극의 달인 유동근에게 연기 지도를 받다가 이후 결혼에 이른 일화도 유명하다.
전인화의 장희빈은 뭐랄까, 아름답지만 표독스러운 요부(妖婦)라는 기존의 장희빈 이미지와 잘 맞아떨어진다. 정선경의 장희빈은 신진 스타들을 대거 기용한 만큼 활기찬 신세대 느낌이 강했고, 김혜수의 장희빈은… 앞에서 기가 질린다고 표현한 것처럼 무서웠거든. 남자를 사로잡는 요부보다는 남자를 쓰러트리고 전장에 나설 것 같은 여장부의 느낌? 그에 비해 전인화의 장희빈은 여리여리하면서도 표독스러운 표정을 지을 땐 천생 요부다. 이따금 숙종에게 애교를 부릴 때면 “전하”와 “즌하” 사이를 오가는 간드러진 목소리를 내며 폭 안기는 것도 특징. 부드럽고 젠틀한 숙종을 연기한 강석우나 인자하고 어진 인현왕후의 재현처럼 보이는 박순애의 연기도 일품이요, 조선왕조에서 유일무이하게 후궁을 허락치 않을 정도로 기가 센 여인이었던 숙종의 모후 명성왕후를 열연한 김해숙의 연기는 당시의 미모와 함께 놀라울 따름이다. 장희재를 맡은 이덕화의 난봉꾼 연기는 또 어떻고.
재미난 건 1988년 장희빈과 2002년 장희빈의 유사성이다. 우선 14년의 시간차를 두고도 같은 배역을 맡은 배우들이 보인다. 배우 김석옥이 1988년과 2002년에 인현왕후의 계모인 부부인 조씨를 연기해 고난을 겪는 인현왕후를 근심 어린 표정으로 바라보았고, 김명희는 1988년과 2002년 모두 인현왕후를 저주하는 장희빈 패거리의 무당 막례로 활약해 눈길을 끌었다. 1988년에 장희빈의 어머니 윤씨를 맡은 배우 엄유신이 2002년에는 장희빈을 돕는 동평군의 어머니인 숭선군 부인 신씨를 연기한 것도 눈에 띈다. 보는 시청자도 흥미로운데, 연기자들의 감흥은 어땠을까 싶다. 곳곳의 대사와 흐름이 유사한 것은 물론 마지막 사약 신에서 발악하는 장희빈을 제압하기 위해 문짝을 떼어 가슴에 누르는 장면도 흡사하다. 그럼에도 이를 연기하는 배우가 다르니 같고도 다른 그 차이를 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할 수밖에.
시대에 따라 장희빈을 연기하는 배우가 다르고, 또 장희빈과 그를 둘러싼 역학관계를 해석하는 것이 다른 것이 여러 번 장희빈이 등장해도 식상하지 않은 이유다. 물론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동이>의 장희빈이 대중적인 인기가 덜한 걸 보면 아직은 표독스러운 기존의 장희빈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은 거겠지. 앞으로도 새로운 장희빈이 나올 테다. 이제 슬슬 10대 장희빈이 나올 때도 되었는데 말이지.
그나저나 50대 이상 지인들이 극찬한 윤여정의 장희빈과 이미숙의 장희빈은 어떻게 볼 수 없나?(엉엉) 방송사 관계자분들, 후대의 덕후를 위해서라도 아카이빙은 참으로 중요하답니다.
*이 글은 2018년 9월 <비즈한국>에 게재했던 글을 재편집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