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달 동안의 여정이 마무리된다
드디어 그날이 오고야 말았다. 유도분만 하루 전. 이곳 산부인과는 내가 고령산모라 40주를 넘기지 않은 시점에 출산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더 오래되면 태아에게 제공될 태내 영양 성분이 부족해진다나? 의사와 상의하여 유도분만 날짜를 잡았다. 예정일은 6월 15일인데 2일 당겨 13일, 월요일 진행하기로 했다. 한국 시간을 따르면 14일 자정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얼추 예정일에 맞춰 아이는 태어날 것 같다. 솔직히 나는 이 날짜 전에 아이가 나오지 않을까 싶었다. 37주 어느 날이었던가, 갑자기 배가 쿠쿵하고 아래로 내려오는 느낌이 확실히 났다. 가운데가 봉긋한 D라인이 아래로 축 처친 D로 변한 것이다. 그즈음 많은 양은 아니지만 약간 이슬처럼 보이는 분비물도 나왔다. 밤에는 가끔씩 배가 당기기도 했기에 이게 가진통이면 아마 자연 수축이 일어나서 분만으로 연결되지 않을까 했다. 하지만 생각처럼 몸이 서둘러 주지는 않았다. 결국 오늘을 잘 보내고 내일 오전 8시, 나는 입원 수속을 밟게 될 것 같다.
그동안에는 출산 준비를 했다. 내가 속한 보험, 그리고 출산할 병원은 7명의 산과 의사가 팀으로 움직인다. 한국처럼 지정 의사가 따로 없다. 차트가 공유되어 그날 나를 진료한 의사가 대표로 결과를 읽어주고 필요한 처방과 상담을 진행한다. 처음에는 한국에 돌아갈 생각이었기 때문에, 두 번 정도 있을 진료를 내가 선호하는 여자 선생님들로만 채웠다. 그러다 출산을 이곳에서 하기로 결정하고, 예상 유도분만 일 담당 의사를 확인 한 뒤로는 되도록 많은 의사를 만날 수 있도록 남자 선생님까지 폭을 넓혔다. 정규 진료는 지난주 목요일 모두 끝났다. 이날 진료는 어쩌다 보니 일정이 맞아 가장 자주 만났던 여자 선생님과 함께였다. 갑상선 수치를 계속 추적 관찰하고 있었는데, 그 전 주 피검사 결과가 정상 기준을 넘어 좀 긴장되었다. 관련 전문의에게 물어본 결과 출산을 앞두고 그런 증상이 나타날 수 있으니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한다. 의사는 ‘20대에도 당뇨나 고혈압이 와서 고생하기도 하는데 지금까지 너무 건강히 잘 해왔으니 걱정 말아라. 아기 태동검사, 그리고 모든 수치도 너무 훌륭하다. 다만 이제 아기가 태어나면 그 뒤로는 어려울 테니 지금을 충분히 즐겨라’라며 유쾌하게 격려해줬다. 노파심에 막막한 마음을 담은 질문들과 넋두리를 참 많이 했던 것 같은데, 그럴 때마다 이렇게 응원을 많이 받았던 것 같다. 아! 미국에서는 태동검사(Non Stress Test)할 때 따로 내가 태동을 인식하고 버튼을 누를 필요 없이 배에 작은 도넛 같은 물건 두 개만 연결해 보기만 했다. 한국과는 조금 다른 것 같아 메모를 남긴다.
남편과 함께 듣던 4번의 출산 교육도 지난달 모두 끝났다. 출산과 분만 과정은 강사가 실제 쓰이는 도구들을 가지고 와 차례차례 소개해줬다. 그런 뒤 동영상을 통해 상세한 쓰임을 안내받았다. 곧 나에게 벌어질 일이라 생각하니 몸 구석구석이 찔끔거리며 아려오는 것 같았다. 너무 많은 사전 정보의 양에 압도되어 한숨도 절로 나왔다. 교육 내용 중에는 출산을 위해 병원에 제출해야 하는 Birth Preference도 있었다. 미국은 대부분 분만대기와 분만이 모두 1인 병실에서 함께 이뤄지게 된다(회복실만 따로 있다). Birth Preference는 이때 방안 환경을 어떻게 조성하고 싶은지, 진통을 어떤 방식으로 경감시키고 싶은지, 분만이 이뤄질 때 원하는 것들은 무엇인지 등등 산모와 파트너의 바람을 사전에 확인하는 리스트다. 내용 중에는 내 기준에서 좀 엽기적인 것도 있다. 산모가 원한다면 하반신 쪽에 거울을 두고 아이 낳는 장면을 직접 지켜볼 수도 있고, 아이 머리가 질 바깥으로 나왔을 때 직접 손으로 만져볼 수도 있다. 이렇게 일일이 확인하는 이유는 분만 경험의 주체가 산모라는 인식 때문인 것 같다. 물론 의료진들이 현장에서 가장 안전하고 효과적인 방식을 안내하겠지만, 산모 역시 과정의 중요한 일부이니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의료진에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듯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되도록 아프지 않게, 안전하고 건강하게 출산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이건 어떻게 하고 싶냐, 저건 어떻게 하고 싶냐며 꼬치꼬치 물어보니 성가시고 피곤한 마음이 먼저 들었다. 그럼에도 날짜가 점점 다가오니 나도 내가 원하는 이상적인 분만의 모습이 없는 것은 아니더라. 되도록 자연스러운 방식을 택하고 싶고, 스스로 계속 움직일 수 있도록 몸의 자율성도 되도록 보장되었으면 하는 것과 약물은 내가 요청할 때에 주입하는 것, 사적인 부분이 존중되는 것 등등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당일 상상할 수 없는 진통으로 마음이 정 반대로 바뀔 수도 있겠지만 이런 기회를 통해 자신의 출산 장면을 미리 상상해보고, 내 생각을 전달해 존중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지금은 처음만큼 부담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출산 용품들도 준비했다. 기저귀 갈이대, 카시트, 이불, 아기 수건, 이불, 옷, 욕조 등등 출산 관련 용품들은 대부분 형님을 통해 물려받았다. 조카의 유리 젖병도 받았는데, 현재 이 브랜드 젖병들이 리뉴얼되어 내가 받은 젖병에 맞는 젖꼭지를 사이즈 별로 찾는 것이 너무 힘들어졌다. 모유 수유를 할 계획이지만 처음부터 잘 되리란 보장이 없으니 초반에 쓰일 신생아용 젖병이 필요했다. 혹시나 싶어 무료로 받은 젖병 샘플을 확인해봤다(출산 관련 샘플 용품들을 공짜로 미리 받아 볼 수 있는 키트들이 많이 있다). 안타깝게도 3개 모두 미세 플라스틱 이슈가 있는 PP 재질들로 만들어져 있어서 쓰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뒤늦게 아마존에서 유리젖병 2개를 다시 주문했다. 조금 더 일찍 알아보고 미리 소독해서 준비하지 못해 아쉽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많은 물건들을 물려받아도 필요한 것 투성이었다. 더군다나 그중 마음에 드는 것을 선택하기란 정말 쉽지 않았다. 특히 한국에서 왕성하게 잘 쓰이는 물건들을 이곳에서 찾기 어려울 때, 혹은 더 비쌀 때 강한 안타까움이 올라왔다. 작은 면 수건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길래 검색해봤는데 한국만큼 얇고 쉽게 마르면서고 질 좋게 느껴지는 건 별로 안보였다. 며칠 간의 폭풍 검색 끝에 무지로 된 유기농 면 가제 수건을 필요한 만큼 구입할 수 있었다. 미국 사람들은 아기 목욕을 주방 싱크대나 욕실 세면대에서 한다. 그래서 그물처럼 생겨 아기를 눕혀 씻길 수 있는 상품을 더 많이 볼 수 있다. 유튜브를 검색해서 봤는데 이 방식은 허리는 편할 것 같았지만 내겐 영 낯설었다. 한국 조리원에서 알려주는 방식이 더 좋은 것 같았다. 그러려면 적당한 크기의 세숫대야 2개만 있으면 되는데 이곳에서는 그 흔한 것도 맞춰 구하기 어렵다. 결국 형님께 미리 받은 아기 욕조와 열탕 소독을 위해 따로 구입한 스테인리스 볼 2개를 활용해 보려고 한다. 동생 말에 의하면 아기 옷에 뭍은 얼룩들은 과탄산소다로 애벌빨래하면 깨끗해진단다. 한국에서는 다이소만 가도 싼 가격에 살 수 있는 것이 이곳에서는 우선 찾기가 어렵고, 인터넷을 통해 구매한다 해도 더 비싼 돈을 주고 필요보다 더 많은 양을 대량으로 구매해야 한다. 검색해보니 여기 엄마들은 옥시크린이나 베이킹소다와 식초 섞은 물을 쓰기도 한다는데, 나도 일단은 그렇게 써봐야겠다. 아무래도 나에게 가장 익숙하고 안심할 수 있는 돌봄은 조카들을 통해, 친구들의 앞선 경험을 통해 보고 들었던 한국의 방식이다. 그러다 보니 은연중에 문화가 다른 두 나라를 자꾸 비교하며 실망하는 나를 발견한다. 양 쪽의 좋은 것들을 모두 취하고 싶어 스스로를 괴롭히는 욕심도 본다. 완벽한 상황이 어디 있겠는가? 유연하고 발 빠르게 적응하는 것이 필요한 것 같다. 흘러가는 데로, 내가 하는 것이 최선이라 믿어주는 것도 중요한 것 같다. 그래, 최근에 재밌게 본 드라마에서 나왔던 말처럼, 내가 선택한, 그럼으로써 내게 다가온 이 상황을 ‘환대’해주자! ㅎㅎㅎ
또 한 가지 챙긴 건 여행이다. 출산 전 남편과 함께 인근 바닷가를 1박 2일 다녀왔다. 이제 당분간 이렇게 둘이 여행할 일은 없겠지. 조용하고 아늑한 숙소에서 드라마를 몰아서 보기도 하고, 남편은 아침 서핑을 다녀오기도 하고, 근처 카페에서 달콤한 디저트를 시켜 먹으며 오랜만에 데이트를 했다. 자유로운 여행자 기분을 느낄 수 있어 기분이 상쾌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어그적 걸음을 걸으며 몇 가지 집안 일도 마무리했다. 청소기를 돌리고, 미리 닦아 놓았던 아기 용품들도 다시 한번 닦아 놓았다. 점심에는 남편과 차에 붙은 개털들을 청소하고 아기 카시트도 단단히 여몄다. 이제 병원에 가서 출산만 하면 임신 끝, 육아 시작이다. 코 앞에 닥친 일이고 배는 시도 때도 없이 꿀렁거리는데 세상에, 아직도 실감이 안 난다. 정말 아기가 태어난다고?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은 오늘의 끝에도 물음표가 붙는다. 곧 느낌표로 바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