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막길도 괜찮아요
대학시절, 유럽에서 보낸 교환학생 학기가 끝이 났을 때. 아쉬움도 잠시, 나는 또다른 꿈을 꿨다.
본교로 돌아가면 꼼짝없이 공부해야 했지만, 첫 자취생활을 앞두고 마냥 설렌 것이다. 엄마가 방을 얻어놓았다는 서울역으로 향하며 집채만 한 이민가방이 무거운 줄도 몰랐다.
그 시절 내가 등반한 곳은 집으로 올라가는 길이었다. 서울역은 입국 몇 달 전 네덜란드에서 엄마 전화를 받고 지하철 노선도를 보며 찍은 곳이다. 위치상 중심이라 막연히 좋을 것으로 생각했다.
실제로 학교에서 서울역까지는 지하철로 5분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역에서 집까지는 더 오래 걸어야 하는 게 함정이었다. 눈 오는 날 썰매를 탈 수 있는 경사는 덤이었다.
나보다 며칠 늦게 도착한 하우스메이트, 친오빠를 마중 나가 집까지 가는 길을 안내했다.
“이리로 가면 15분밖에 안 걸려.”
나는 오빠에게 지름길을 알려주며 우쭐했지만, 오르막길은 우리 자취생활의 복선과 같았다.
4학년이 된 나는 전과 달리 학점을 지나치게 의식하며 공부했고 졸업을 못할까 걱정하며 시험을 쳤다. 그러다 서울역에서 집까지 숨도 차지 않고 오르게 됐을 때쯤, 취업 준비를 시작했다. 자기소개서, 인적성 시험, 면접... 한 판을 깨면 더 높은 산이 있는 코스로 안내받았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불합격인 문자를 받은 밤에는 벼랑 끝에 선 것 같았다.
그 시각, 옆방에서는 요리학교를 갓 졸업하고 상경한 오빠가 이불속에서 고민에 빠져 있었다. 그는 셰프 꿈나무에서 요식업 비관론자로 변해가는 중이었다. 주방에서 선임에게 일을 배우던 오빠는 군대에 다시 간 것 같다며 나만큼 세차게 머리를 뜯었다.
내가 대기업에서 중견, 아니 소기업도 좋다고 눈을 낮췄을 때, 오빠는 눈을 밖으로 돌렸다. 요리를 할 거면 임금이 높은 호주에서 하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해, 출국 계획을 세운 것이다.
이제 오빠를 괴롭히는 것은 선임이 아니아 영어 점수였다. 책상을 일찌감치 떠나 주방으로 간 오빠가 영어라니. 십 년 만에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오빠는 오를 수 없는 나무를 쳐다보는 사람 같았다.
그럼에도 종일 책상에 붙어 있었고, 엄마카드로 치킨을 시키며 파이팅을 외쳤다.
실력은 기어가듯 늘었지만, 집의 계약기간이 끝나갈 쯤에 오빠는 합격점수를 넘었다. 다행히 나도 취업을 못 하면 짐을 싸겠다고 선언한 날을 앞두고 직장인이 됐다.
오빠가 호주로 떠난 후, 나는 지하철역에서 집까지 걸어가는 시간을 잘 체크해 새집을 얻었다. 물론 높은 곳에 있는 집은 선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르막은 없어도 그만큼의 불편은 꼭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여름에 신나게 계약했던 역세권 집은 겨울에 너무 추웠고, 다음 집에서는 층간소음이라는 괴물을 만났다. 계약직에서 정규직으로, 원룸에서 투룸으로, 자취방에서 신혼살림으로 집과 함께 내 사정도 나아졌지만, 평지만 걷는 날은 오지 않았다.
네 번째 집에서 나는 마침내 오르막길 피하기를 체념했다. 대신 오르막길은 절벽이 아니기에 계단을 오르듯 찬찬히 가면 되고, 미끄러진다고 죽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제 발걸음이 경쾌해질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