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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수산책 Dec 24. 2023

'목마'를 타고 폐허를 떠난 시인

박인환 <목마와 숙녀> 1

  불운한 시대를 살아내야 했던 한 시인이 있었습니다. 그에게 닥친 운명은 지독히도 가혹했습니다. 식민의 영토에서 태어나 살육과 파괴의 시간을 지나야 했던 이들이 그러했듯 그 운명을 받아들이며 살아남기에 급급했습니다.

시인 박인환(1926~1956)

참혹한 시간 속에서도 꿈의 영역은 은밀하게 준비됩니다. 문학청년 박인환은 그의 꿈을 꾸었습니다. 잘 빗어 올린 머리, 스카프에 넥타이, 두툼한 코트, 그 시절 부릴 수 있는 멋은 다 부린 모습 속에는 그의 꿈이 깃든 듯합니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후 그에게 '명동백작'이라 붙은 별칭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는 ‘마리서사'라는 서점을 엽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서점은 열정 가득한 주인의 꿈으로 존재합니다. 저는 오늘의 독립서점에서 '마리서사'의 열정을 봅니다. 종로 낙원상가의 ’ 마리서사‘에는 여러 예술인들이 모였습니다. 해방기 서울의 한 복판 스무 평 남짓의 공간에서는 젊은 예술가들이 격론을 벌이고 있습니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가 생각났습니다. 영화를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주인공 길이 파리에서 시간 여행을 떠나 피츠제랄드, 헤밍웨이, 피카소, 달리, 고갱 등을 만나는 영화죠. 그래서인지 일찍이 '마리서사'는 파리의 예술가들이 모여든 '몽마르트르'에 비견되기도 했습니다. 그리 오래가지 않았지만 '마리서사'를 만난 당시의 예술가들은 그 공간을 사랑했고, 그 공간을 통해 예술적 영감을 받았을 것입니다.

전쟁 중 간신히 살아남은 박인환은 이후 시와 산문을 쓰고 발표했지만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 많은 이들이 기억하는 시인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뜻밖의 경로를 통해 대중들에게 알려집니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로 시작하는 그의 시 <세월이 가면>은 한 여성 가수의 노래로 사람들에게 알려집니다. <목마와 숙녀>의 센티멘털을 그대로 살린 그 가수의 시낭송도 인기를 얻어 지금도 그 낭송으로 시를 기억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박인환은 대중의 감성에 다가간 시인임에 분명합니다.


아주 우연한 기회에 <목마와 숙녀>를 다시 읽게 됐습니다. 시를 읽으면서 여러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중 하나가 시대와의 이질적 관계였습니다. <목마와 숙녀>는 전쟁 직후 쓰인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뉴스나 영화를 통해 전쟁의 참상을 접합니다. 총소리, 폭격, 화염, 그리고 파괴된 도시, 공포에 질린 사람들, 부상자들의 절규 등을 화면으로 만납니다. 전쟁은 인간의 존엄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반문명의 총체입니다. 그런 시대에서 나온 <목마와 숙녀>가 온통 센티멘털 투성이라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시를 이루는 문장들 사이의 긴밀함은 낮습니다. 하지만 문장들을 독립시켜놓고 보면 나름대로 완성돼 있습니다. 그리고 센티멘털이 넘쳐 납니다.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사치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시인이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꿈도, 그의 길도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그는 한 권의 시집을 내고는 식민지 시인 이상의 죽음을 애도하는 폭음을 사흘 동안 이어가다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납니다. 그의 나이 29세!

<목마와 숙녀>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첫 문장을 보세요.  '버지니아 울프'와 '숙녀의 옷자락'은 같은 지위에 놓입니다. 그래서 둘은 등가일 텐데 과연 그러한가요? 버지니아 울프가 여성이라서 '숙녀'가 나온 것일까요?  <등대로>, <댈러웨이 부인>을 쓴 ‘버지니아 울프'는 삶 전체가 비극이었던 영국의 소설가입니다. 10대에 발병한 정신질환으로 고통을 받다가 20대에 아버지의 죽음을 맞으면서 극단적 선택을 시도하게 됩니다. 그녀는 투병을 이어가다 50대 후반인 1941년 테임즈강에서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합니다.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한 그녀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 둘의 ‘떠남’에는 연관성이 있을까요?

상상을 해 보았습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넘실대는 폐허의 거리를 젊은 박인환이 걷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시를 쓰고, 친구들과 문학 이야기로 밤을 새우고 싶은 청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현실은 절망으로 가득합니다. 현실이 나아질 가능성은 없습니다. 그래서 현실을 떠나 환상 속으로 들어가는 꿈을 꾸기 시작합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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