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환 <목마와 숙녀> 2
화자가 마주한 현실은 냉혹하기만 합니다. 그의 꿈은 진전하지 못한 채 현실에 침식당하고 맙니다. 시는 ‘버림', '떠남', '떨어짐', '상심', '부서짐' 등 부정의 시어들로 가득합니다. <목마와 숙녀>는 부정어의 절제가 없다는 점에서 '과도한 센티멘털'이라는 비판을 받습니다. 시 전체를 지배하는 슬픔의 연원이 무엇인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만히 보면 상실과 절망에 허덕이며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두리번거리는 한 젊은이의 모습이 어른거립니다. 안타깝습니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傷心)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서진다
'과도한 센티멘털' 때문인지, 시인은 세상을 떠난 후 10년이 되어서 시인 김수영으로부터 혹독한 비난을 받게 됩니다. 그는 박인환의 시어가 ‘낡은 말'이라고 단정합니다. 그리고 '그처럼 재주가 없고 그처럼 시인으로서의 소양이 없고 그처럼 경박하고 그처럼 값싼 유행의 숭배자'는 없다거나 '신문기사만큼도 못한 것을 시라고 쓰고 갔다'라고 합니다. 세상을 떠난 후배 시인을 이렇게 평한다는 게 일반적이지 않습니다. 그는 글의 말미에 박인환의 자유로움, 댄디함에 대한 추억을 담기는 했지만, '코스튬'만 화려한 시인, 즉 포장만 그럴싸한 시인으로 낙인을 찍습니다. 김수영이 왜 그런 혹평을 했는지 그의 글에서는 근거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열등감 때문이라는 소문도 있는데 그것도 확인된 바 없습니다. 아무튼 박인환은 곱지 않은 주변의 시선을 받으며 줄곧 시를 쓰고 발표합니다.
인생(人生)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낡은 잡지(雜誌)의 표지(表紙)처럼 통속(通俗)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와 숙녀>에서 가장 근사해 보이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약간 의미가 엉켜 잘 와닿지 않습니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통속적이다'가 잘 연결되지 않습니다. 선정적 사진으로 채워진 잡지의 표지와 같은 인생, 한탄할 무엇도 없다고 합니다. 우리의 삶이 과연 그렇게 통속적일까요? 그렇게 생각하는 이도 있겠죠.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은 아마도 비관주의자일 겁니다.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박인환의 절제되지 않은 글쓰기, 그가 쏟아놓는 상실의 정서에서 그의 내면에 자리한 깊은 상처를 보게 됩니다. 야만의 전쟁으로 인한 트라우마, 자신의 감성과 현실의 부조화로 인한 절망, 그런 것들 말입니다. 그 상태에서는 감정 제어가 가능해 보이지 않습니다. 정제된 시어의 배열보다는 추상화의 조각들 같은 비현실적 이미지들의 난무로 시를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목마와 숙녀>를 센티멘털 판타지로 읽었습니다.
인생이 통속하다는 이십 대 청년의 단언에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그는 그런 말을 하면서 떠남을 준비했던 것은 아닐까요? 복원 불가능해 보이는 현실, 폐허로 가득한 도시, 살아남은 자들의 절망과 고통, 그의 눈에는 모든 게 공포였을 것입니다. 황량한 폐허에 머무르기보다는 그 현실을 벗어나고 싶었을 겁니다. 공포에 짓눌릴 때, 거기에 맞설 어떤 힘도 없을 때, 일단 그곳을 벗어나려는 몸부림의 모습, 그것이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생각했습니다. 자신도 그렇게 떠나고자 꿈을 꾸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가 사흘간 폭음을 하면서 마지막 순간 만난 형상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