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
백석의 삶은 식민의 시대가 열리면서 시작된다. 그는 식민지 시인으로, 그리고 다시 분단의 시인으로 살아야 했다. 젊은 백석은 시를 쓰면서 식민의 시대를 살아냈고, 분단 이후 북녘의 고향에 남은 탓에 오랫동안 잊힌 시인이 되었다. 그 시대를 지나온 이들이 그러했듯이 그 역시 혹독한 시간들을 지나왔다. 야만의 시대는 시인의 재능을 훼손해 어둠 속에 가두고 말았다. 하지만 운명을 어쩌랴. 우리는 지금 식민지 시대에 쓴 시로 젊은 백석을 만나고 있다.
백석의 시에는 늘 각주가 따라온다. 그는 북방의 언어를 자유로이 구사했고, 시시콜콜하다고 할 만큼 다양한 풍물들을 다뤘다. 시를 읽을 때 단어의 뜻을 정확히 알아야 하나 하면서도 각주에는 눈이 가게 마련이다. 그렇게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백석의 시가 가난한 조선의 땅에서 살아가는 슬프고 선한 사람들의 삶에 바싹 다가가 있음을 알게 된다. 연민은 가득하나 지나침이 없고, 슬픔은 짙되 통제되고 있다. 미미하지만 정겨운 사물들은 그의 탁월한 표현 속에서 따뜻하게 살아있다.
그런데 1938년 백석은 뜻밖의 시 한 편을 발표한다. 바로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이다. 비유의 은밀함으로 표현되던 백석의 사랑, <통영>에서는 맑은 물에 원색의 수채물감이 번져가듯 사랑의 감정이 애틋하게 퍼져갔다. '천희(千姬)'로 불리는 여인에 대한 사랑을 품은 화자의 눈에 들어온 바닷가 객줏집 마당의 풍경은 에로틱 그 자체였다.
저문 유월의 바닷가에선 조개도 울을 저녁 소라방등이 붉으레한 마당에 김냄새 나는 비가 나렸다.
- <통영>에서
격정은 준비되고 있었을까? 언젠가는 터져 나올 수밖에 없을 감정들은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나 보다. 절제가 사라지고 격정이 직설적으로 표현된 시가 바로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일 것이다. 이전의 시들에 비해 이질적이다. 사랑을 고백하고, 연인과 자신만을 위해 설계된 공간을 상상하고, 그 공간으로의 이주가 사랑의 완성으로 이어지리라 확신은 어떠한 은유에도 기대지 않고 있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가난한 나'는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고 '산골'로 가야 한다고 한다. ‘더러워’에는 어떤 비유도 없다. 격정의 폭발로 인한 직설은 시 전체로 번진다. ‘산골’은 ‘세상‘과 대척된다. 그들의 사랑을 훼손하려는 것들에 맞서는 유일한 선택, 사랑의 지속이 가능한 길은 ‘산골로 가’는 것이다. 세상의 그 무엇도 보지 않겠다는 것이니 스스로 청맹(靑盲)의 길을 택한 것이다. 아무도 찾을 수 없는, 은밀한 천국인 '산골'! 오로지 '나타샤'와 자신만을 위한 세계, 그 세계는 순수해야 한다. 희부연 하늘에서 순백의 눈이 내려 쌓인다. 눈은 마치 그들의 사랑을 위한 송가 hymn처럼 펄럭인다. 눈과 '나의 세상', 그리고 사랑은 서로 인과가 된다. 눈은 '가난한 나'의 사랑 때문에 내리고, 내리는 눈은 '나타샤'와의 사랑을 위한 축복이며 그것은 순수를 더한다. 사랑의 격정에 휩싸인 이가 자신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리 많지 않다. ’베르테르’가 ‘로테’를 위한 선택이 그러했듯이 말이다. ‘나타샤’를 사랑한 ‘가난한 나’는 세상을 떠나 동화와도 같은 공간으로 가야만 자신의 사랑을 지킬 수 있다고 확신한 것이다. 사랑에 빠진 이는 자신의 사랑이 ‘아니올 리 없다’고 확신하는 것이다.
사랑의 격정이라 하면 단번에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괴테 이전에도, 그보다 아주 오래전부터 시대를 달리하며 수없이 다뤄진 주제이리라. 그리스 여성 시인 사포가 있다.
"당신을 잠시 본 순간부터 나는 더 이상 한마디 말로 할 수 없었어요. 내 혀는 부서지고, 내 살갗 밑으로는 어떤 미세한 불길이 스며들어 내 눈은 보지도 못하고, 내 귀는 윙윙거리며, 온통 땀으로 적셔진 내 몸은 갑작스런 전율에 사로잡혔어요. 나는 풀잎보다 더 파랗게 되어 곧 죽을 것만 같았어요."
수천 년 전의 사랑도 이토록 절절했고 격정은 넘쳤다.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풀잎보다 더 파랗게 되어 곧 죽을 것만 같'다니, 이런 격정의 사랑을 경험한 이가 얼마나 될까.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가난한 나'도 사랑에 빠져 있다. 그러니까 두 시의 화자가 모두 ‘사랑에 빠져 있다'. 여기서 사랑하다'와 '사랑에 빠지다'를 구분해 본다. 둘은 구분이 가능한가?
'사랑하다'는 '너를'을 포함하면서 ’나는 너를 사랑해!'가 되어야 의미가 완성된다. '너'가 있어야 완전한 문형으로 자연스러운 흐름을 지니게 된다. 허공에 대고 '사랑해'라고 하면 아무런 의미 없는 발화가 되고 만다. '-을/를'의 목적어가 기재되거나 특정의 대상을 바라보며 '사랑해'라고 해야 된다. 하지만 '사랑에 빠지다'는 다르다. 대상과는 무관하게 자신만의 충동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상대의 답을 기다리는 '나는 너를 사랑해!'와 달리 '~와 사랑에 빠졌어!'는 자신의 욕망을 표현하고 있다. 사랑에 빠지는 것은 대상과의 교류도 없이 가능하다. 그저 자신의 욕망에 사로잡힐 뿐이다.
그래서 '나는 사랑에 빠졌어!'는 명백한 정신 착란 상태에 들어 있는 자기의 고백이다. 착란의 상황으로 스스로를 몰아가는 극단적인 이기심이 발현되면서 그는 점점 어리석게 돼 종국에는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은 어리석다.'라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어리석음 만큼은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롤랑 바르트는 '사랑으로 인한 모든 감정들은 파렴치하다'라고 말한다. '파렴치'의 부정적 의미 때문에 번역 이전의 단어가 궁금하다. '파렴치'라는 단어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개인의 사랑이란 그만큼 극단적이고 '편협'할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바르트는 개인의 사랑을 '사회의 규율과 억압을 뚫고 나와 대지를 향해 자신만의 외설스러운 사랑을 외친, 위대함이 없는 것이 사랑의 고백'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토록 극단적이고 편협하고 외설스럽고 위대함이 없는, 사소하고 어리석은 사랑에 빠진다고 한들 부끄러운 삶과 거리는 멀다. 그래서 '나타샤'를 사랑하는 '가난한 나'는 격정에 휩싸인 채 사랑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삶 전체를 놓고 볼 때 격정의 시기는 극히 제한적이다. 제한된 시기에도 그 격정은 수차례 찾아오지 않는다. 어쩌면 삶에서 단 한 번 찾아올 것 같은 격정의 시간, 너무나 고귀하게 여겨지는 시간은 어느 순간 연기처럼 사라지고 만다. 격정의 시간이 있었던가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이들은 이렇게 백석의 시를 통해, 괴테의 품격 있는 문장을 통해, 사포의 절절한 시를 통해 격정의 아름다움을 만나게 된다. 문학을 통해 격정을 만날 때 내가 마치 그 시간 속에서 재생되는 상상을 한다. 그래서 문학을, 시를 가까이하게 되는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