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괴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펼친다. 의무적 독서가 아니라 편안하다. 또 책을 선택하면서 아무런 강제도 없었다. 선택의 이유를 굳이 제시하라면 조금 무료했고 거기서 벗어나려고 했다. 그리고 괴테의 작품 정도면 중도에 책을 접을 가능성이 낮을 거라는 믿음도 작용했다. 물론 마음 한편에는 괴테를 꼼꼼하게 읽고 싶은 생각이 있기는 했다. 읽기를 시작하자 머리에 목베개를 하고 의자에 몸을 묻었다. 빛나는 문장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몇 페이지를 넘기자 저절로 상체가 들렸다. 지면을 가득 채운 아름다운 문장들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천박한 대중문화에 지쳐가던 중 대가의 품격 있고 아름다운 문장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런 경험은 나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닐 게다. 내가 독서를 하면서 이런 몰입을 경험하게 되다니, 놀라울 뿐이었다.
몰입!
‘몰입’은 영어로 ‘immersion’, 이 단어는 ‘물속에 잠김’의 뜻도 가지고 있다. ’스며듦’의 의미이다. 맞아, 책으로 스며드는 느낌이었다. ‘아! 이런 책이었구나!‘ 읽기를 멈출 수 없었다. 조금 과장을 하자면 ’베르테르’의 비극적 죽음을 거쳐 작품이 끝날 때까지 괴테의 문장이 주는 축복에 휩싸였다. 나는 마음속으로 괴테와 번역가에게 깊은 경의를 표했다.
예전의 번역문 중에는 아무리 읽어도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는 것들이 많았다. 많은 시간이 흐른 후 완벽한 문장을 구사하는 뛰어난 번역가와 능력 있는 편집자들의 수고로 독자들은 원전이 지닌 고유한 아름다움을 접할 수 있게 됐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여러 번역본이 있지만 모두 괴테의 비범하고 품위 있는 문장을 만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번역본을 보다가 한 출판사의 표지화가 눈에 띄었다. 제목은 <도둑맞은 키스>, 18세기 프랑스의 풍속화가 프라고나르의 작품이다. 그는 화려하면서도 유쾌하고 관능적인 그림을 그린 화가인데, 주로 귀족들에게 그림을 그려주며 명성과 부를 이루었다고 한다.
이 그림은 남녀의 은밀한 만남을 소재로 하고 있다. 이제 소년기를 막 지난 것처럼 보이는 청년은 문 뒤에 숨어 있다가 갑자기 튀어나온 자세이다. 문 뒤는 컴컴해 환한 방안과 대비된다. 청년은 어두운 곳에서 몸을 숨긴 채 내내 여인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린 듯하다. 여인의 자세도 심상치 않다. 청년은 여인의 손에 자신의 손을 가볍게 포갤 뿐 완력을 사용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데 여인은 청년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있다. 열린 방문 저편에는 다른 이들이 보이고, 여인은 자신들의 밀회를 들킬까 걱정스러운 시선을 문 쪽으로 보낸다. 여인이 잡아끄는 천은 그들의 밀회에 필요한 도구였을까. 어두운 방을 향해 몸을 돌린 여인, 열정에 사로잡힌 청년, 밀회 공간을 포착한 프라고나르의 그림은 생생하다. 편집자의 표지화 선택은 약혼한 샤를로테를 사랑해 그녀에게 갑작스레 키스를 퍼부은 젊은 괴테의 일화 때문일 것이다. 화가의 관능과 ‘베르테르‘의 격정이 어울리는지는 잘 모르겠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출간되자 독일은 물론 유럽 사회 전체가 충격에 빠진다. 당시 독일의 문맹률이 80%를 넘었다고 하니 환호와 비난, 충격은 대체로 상류층에서 일어났을 것이다. 당시에는 ‘베르테르’가 입었던 푸른색 연미복이 유행하고 ‘베르테르’의 죽음을 모방하는 자살이 연속돼 논란이 일게 된다. 이 현상으로 이후 ‘베르테르 효과’라는 사회학 용어가 만들어지게 된다. 그리고 괴테는 자살을 옹호했다는 논란에 휩싸이게 된다.
괴테의 자살 옹호는 사실에 가깝게 보인다. 작품에서 ‘베르테르’는 자살을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며 ‘알베르트’(로테의 약혼자)와 논쟁을 벌인다. ‘알베르트’는 자살을 ‘나약하거나 격정에 사로잡힌 이들이 판단력을 상실한 상태에서 취하는 행동’으로 규정하고 비판한다. ‘알베르트’는 냉철한 합리주의를 따르는 인물임이 분명하다. 반면 ‘베르테르’는 ‘육체적, 정신적 고통의 극한에 다다른 인간이 회생 불가능의 상태에 이르면 냉철한 이성의 판단이 정지’된다고 주장하면서, 그때 행해지는 자살은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역설한다. ‘알베르트’와 ‘베르테르’의 논쟁은 이성과 감정의 충돌 양상을 보여주는데, 사랑에 실패한 젊은 괴테는 자신에게 닥친 기막힌 운명에 맞서는 하나의 방식으로 자살을 상정하고 그것을 미화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텍스트 밖에서도 괴테는 ‘베르테르’의 죽음으로 인한 논란에 대해 항변을 한다.
영국의 한 귀족이 '베르테르'에 의해 야기된 자살 전염병에 대해 괴테를 비난하자, 괴테는 순전히 ‘경제’ 용어로 이렇게 답변하는 것이었다. “당신네들의 상업 체제가 수천 명의 희생자를 낳게 했는데, 왜 그중 몇 명을 '베르테르'에게 허용하지 못한단 말입니까?”
롤랑 바르트, <사랑의 단상>에서
그는 특이하게 경제 용어를 사용하면서 자신과 ‘베르테르’에게 쏟아지는 비난에 맞서고자 했다. 이 항변은 롤랑 바르트의 책에 실려 있는데, 바르트 역시 정교한 논리로 괴테를 옹호한다. 그는 ‘알베르트’와 ‘베르트르’를 각각 경제 체제의 상징으로 보며, ‘알베르트’를 합리적 경제, ‘베르트르’를 소비적 경제와 연결시켰다. 이 대립을 설명하면서 바르트는 ‘알베르트’를 ‘속물’로 규정한다. ‘알베르트’는 ‘베르테르’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의 시간을 잘 분배하시오. 그리고 당신의 재산을 잘 계산하시오.”라는 훈계를 한다. ‘알베르트’는 재산과 행복을 잘 관리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반면에 ‘베르테르’는 시간이나 재능, 재산을 계산하지 않고 자신이 가진 모든 것, 심지어 목숨까지 ‘낭비’하는 ‘젊은 연인’이다. ‘베르트르’는 자신의 행위에 따른 어떠한 보상도 생각하지 않고 오직 로테만을 향해 자신의 사랑을 모두 소비하는 인물인 것이다. ’베르테르‘에 대한 바르트의 '편애'가 두드러져 보인다.
바르트의 논의는 좀 더 복잡해진다. 그의 현란한 수사를 조금만 더 보자. 바르트는 ‘알베르트’를 부르주아의 포식 경제와 연결시킨다. 여기서 ‘포식’이 ‘배부르게 먹음’인지 ‘다른 동물을 잡아먹음’인지 명확하지는 않은데 문맥을 보면 전자에 가까워 보인다. 그러니까 ‘알베르트’는 자신의 물질적 욕망을 채우는, 냉철한 합리주의자이자 부르주아인 것이다. 그런데 ‘베르트르’는 ‘분산, 낭비, 광란’의 경제를 추구한 인물인 것이다. 바르트는 비경제적이라는 의미에 가까운, ‘변태적 경제’라는 용어까지 사용하는데, 결국 ‘베르트르’는 미숙한 열정에 사로잡혀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을 소비하고 마는 비경제적 인물로 규정된다.
바르트의 논의를 이렇게 장황하게 다룬 이유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경제적 관점에서 바라본 해석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르트는 ‘베르트르’의 ‘로테’에 대한 사랑을 ‘계산이 가능하지 않은 사랑’, ‘무한 소비’, ‘충일’이라는 단계를 나눠 분석한다. 바르트는 열정에 사로잡힌 연인에게서 ‘사랑의 계산’이란 것을 찾아낸다. 이때의 ‘계산’이란 손익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연인의 마음을 얻지 못해 조바심이 난, 사랑에 빠진 이가 끊임없이 하는 ‘살펴봄’이다. 사랑에 빠진 이는 연인에게서 언뜻 보이는 우울한 낯빛, 그것이 나의 실수나 소홀함 때문인지, 아니면 나에 대한 실망 때문인지, 내내 살피게 된다는 것이다. 혹시 연인의 마음에 드는 말을 하지 못해 연인이 슬퍼한다거나, 연인의 슬픔으로 인해 자신이 받을 상처에서 벗어나는 길이 어딘지, 또 자신이 연인을 향해 보낸 사랑의 언사들이 흡족했는지 되돌아보며 불완전한 단어를 사용한 자신에 대한 자책을 포함한 모든 것이 ‘계산’이요 ‘살펴봄’이라는 것이다. 결국 ‘계산’은 연인으로부터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그와 영영 이별할까 초조해진 상태에서 행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베르트르’는 계산을 뛰어넘는다. 그는 사랑의 과정에서 오로지 ‘소비’만 무한 반복할 뿐이다. 그에게는 로테의 행복만이 우선이었다. 로테와 알베르트, 그리고 자신, 이 슬픈 관계에서 로테의 행복을 위해 자신을 완전하게 ‘소비’하는 길을 선택한다. 그는 기막힌 운명의 수렁에 빠지고 만 것이다. 깊은 수렁에서 헤매던 ‘베르테르’는 간신히 길을 찾는다. 그 길은 로테를 위한 자신의 사라짐, 즉 무한한 소비였다. 하지만 사랑의 소비가 무한으로 이루어질 때 궁극에는 ‘충일(充溢)’의 단계로 이전한다는 것이다. ‘충일’이란 ‘가득 차서 넘치는 상태’이다. 무한한 사랑의 소비가 비약의 단계를 거쳐 찬란하고 고귀한 ‘충일’에 이르는 것이다. 즉 계산이 가능하지 않은 사랑, 베르테르의 로테에 대한 사랑은 ‘충일’이다.
이 작품의 정점은 ‘베르테르’는 ‘로테’에게 「오시안의 노래」를 읽어주는 장면일 것이다. 이는 ‘베르트르’가 번역해 ‘로테’에게 전해준 시이다. ‘로테’는 그 시를 바로 읽지 않고 나중에 ‘베르트르’에게 읽어달라고 한다. ‘베르테르’는 ’로테’ 앞에서 <오시안의 노래>를 읽고 ‘로테’는 듣는다. 그리고 그들은 격정에 빠지고 결국 영원한 결별의 길로 들어서고 만다.
어찌하여 그대는 나를 깨우느뇨? 봄바람이여! 그대는 유혹하면서 '나는 천상의 물방울로 적시노라'라고 하는구나. 허나 나 또한 여위고 시들 때가 가까웠노라. 나의 잎사귀를 휘몰아 떨어뜨릴 비바람도 이제 가까웠느니라. 그 언젠가 내 아름다운 모습을 보았던 나그네가 내일 찾아오리라. 그는 들판에서 내 모습을 찾겠지만, 끝내 나를 찾아내지는 못하리라.
<오시안의 노래>의 마지막 부분이다. ‘오시안’은 영국 아일랜드의 전설적 시인인데 이 부분은 고귀한 이들에게 찾아온 비극적 운명을 노래하고 있다. 두 사람은 화자가 처한 운명에 깊이 공감한다. 시를 소리 내어 읽던 ‘베르트르’는 닥쳐올 자신의 운명에 절망하고, ‘로테’는 ‘베르테르의 무서운 의도’를 예감한다. 연인들은 서로를 품에 안고 격렬한 키스를 한다. 격정에 빠진 연인들의 모습을 그린 삽화의 흐릿한 흑백이 애처롭다.
‘로테’는 이내 감정의 격랑에서 벗어나 ‘베르테르’에게 결별을 고한다. “이것이 마지막이에요. 베르테르 씨, 이제 다시는 만나지 않겠어요.” 그렇게 다가온 자신의 운명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 ‘베르테르’는 “로테, 안녕! 영원히 안녕!”이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로테’를 떠난다.
사랑은 무형의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격렬한 숭배의 의식과도 같다. 사랑에 빠진 순간, 연인에 대해서는 무한 숭배와 찬탄만이 가능하다. 연인의 고귀함에 고개를 숙이고, 그 고귀함은 차원을 넘어서며 점점 성스러워진다. ‘베르트르’의 마지막 선택은 너무나 매혹적이고 고결하게 기술된다. 그의 글은 미적 극한에 이르고 그가 마주한 절망은 자신의 완전한 소비를 재촉한다. 그의 선택은 격정을 마무리하고 충일의 상태로 나아가는 극적 성격을 지닌다. 그로써 ‘베르테르’는 자신의 사랑을 완성하고 격정의 긴 여정을 마무리하게 된다.
격정적 사랑은 늘 불길하다. 그 끝에는 불행한 결말이 준비되고 있기에. 그러나 사랑하는 연인들은 결말이 어떠할지 예측하지 않는다. 일단 자신들의 앞에 놓인 길을 떠날 뿐이다. 그리고 닥쳐올 운명에 온전히 자신들을 내맡긴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발표된 지 2백 년이 훨씬 넘은 작품이다. 오늘의 시선으로 인물과 스토리에 대해 판단하기에는 당연히 무리가 있다. 그래서 이 글은 지극히 부분적인 논의에 그치고 있다. ‘베르테르’의 격정이 지닌 특성과 격정의 극한 순간, 이 두 부분을 다루었다. 이 글은 ‘베르트르’의 격정을 이해하는 하나의 길이라는 생각이다. 여러분이 텍스트와의 교감을 이룰 때 더 풍요로운 세계가 펼쳐지리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