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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아 May 06. 2020

자고 일어나니 여름이 됐어

2020년 5월 6일

기록자: 수아


추억은 어찌나 걸음이 빠른지, 내 앞에 성큼 나타날 때도 많아. 심지어 혼자 있을 때의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2배는 빠르게 걷는데 말이야.




마스크를 쓰고 다니면서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스스로가 버거워할 정도로 빠르게 걷는다는 걸. 한참을 걷다가 힘들어서 잠시 멈추면 숨을 몰아서 쉬어야 할 정도로.

난 뛰지 않는다... 그냥 걸어서 147이 나오는 거다....


원래도 걸음이 빠른 편이긴 했다. 늘 키가 큰 친구들과 함께였으니까. 180cm가 넘는 장신의 친구들과 걸어가면서 이야기라도 할라치면 늘 종종걸음을 쳐야만 했다. 하지만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느 순간 그 속도에 익숙해진 나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야림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2017년 야림과 동그라미, 뽈과 나는 같은 팀에서 일하는 회사 동료였다. 어쩌다 보니 넷이 속한 팀만 연희동 사옥으로 사무실을 옮기게 되었고, 그곳의 교통이나 편의시설이 얼마나 고약한지 점심 한 번 먹으려면 10~15분은 걸어나가야 하는 게 예삿일이었다. 그 걸음 속에서 우리는 가끔 낯빛이 어두웠고, 많이 소리내어 웃었다.


넷 중에서도 야림은 유독 걸음이 느린 편이다. 나와 뽈은 성미가 급했고(심지어 뽈이 나보다 빠르다;;;) 동그라미는 애초에 보폭이 컸다. (우리 중에 가장 키가 크니까, 다리도 길고 보폭도 넓지 않겠어?) 셋이 이야기를 하면서 걷다가 문득 야림이 보이지 않는다 싶으면 뒤를 돌았다. 그러면 한참 떨어진 곳에서 야림이 아이스 라떼를 들고 느릿느릿 걸어오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늘 전화를 받거나, 메일을 쓰거나, 사진을 찍느라 바쁜 야림을 재촉할 때도 있었고 ‘오겠지!’ 싶어 휘적휘적 다시 걸어갈 때도 있었다.


그때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평범한 일상이, 가끔 떠오를 때가 있다.



요즘은 의도적으로 쉬어가려고 노력한다. 걸음이 빠르다 싶으면 핸드폰에서 시선을 떼고 걸음을 최대한 늦춘다. 내가 느끼기엔 너무 느려서 활짝 핀 벚꽃이나, 초여름이 되면서 파랗게 변해가는 나뭇잎이나, 지나가는 버스 속 사람들의 표정 같은 것들이. 얼마 전부터는 점심멍상도 시작했다. 하루 15분, 점심시간에 짬을 내어 함께 숨쉬기명상을 하는 거다. 딱 하루 참여했지만 벌써 앞의 일들이 기대되기 시작했다. 바쁜 일상 속에 일부러 짬을 낸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를 알기에.


어제는 산속 어드메의 마을을 다녀왔다. 벤치에 앉아 있으면 눈앞으로 산이 펼쳐지는 곳이다. 그곳에 앉아 숨을 쉬었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고. 그렇게 한참을 있다 생각했다. 서른에서 5년쯤 지난 후에는 초록을 볼 수 있는 한적한 곳에 내려와서 살 수 있기를. 혼자가 아닌 여러분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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