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5월 4일 월요일
날씨 : 흐림→맑음
기록자 : 야림
크게 변화할 일이 없는 일상을 사는 요즘 나는 자꾸만 뒤를 돌아보고, 다 지나간 일을 책상 위에 올려두고 요리조리 들춰보고 해부해보고 다시 꼬매보며 지낸다. 안그래도 걸음이 느린 나는 과거를 돌아보느라 자꾸만 뒤처지는 기분이 든다. 그래도 어쩌겠어 걸음이 빠른 지난 날이 자꾸만 내 앞에 찾아오는 걸.
1/
S는 지어진 지 거의 30~40년은 되었을 오래된 맨션에 산다. '벽돌색의 건물일 것', '거울을 열면 안에 수납장이 있는 화장실이 있을 것'과 같은 제법 영화에서나 본 이미지를 중심으로 집을 찾았단 이야기를 들었을 때 참 그사람답다고 생각했다. (여담으로 그는 키가 너무 커서 그 거울 앞에 서면 정작 자신이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그의 집에 처음 놀러간 날 그의 공간 곳곳에서 다다미와 향의 냄새가 났다. 내가 S와 처음 만난 건 그가 일하고 있는 펍에서였기 때문에(그것도 손님과 점원으로) 기억에 없지만 언젠가 그와 함께 걸을 때 나던 그의 냄새가 이 공간으로부터 비롯했다는 걸 그때 알게 됐다. 그 외에도 삐그덕거리는 교자상, 할머니집에서 본 것 같은 형광등 갓, 이가 나간 사발, 주방에 놓인 작은 스툴(그는 보통 주방에서 밥을 먹는다고 한다), 넘쳐날듯 빡빡하게 꽂혀있는 수많은 책들, 하늘색 욕조같은 것들을 보니 그사람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후로 갈 때마다 그의 방은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책상 앞에는 서울에 다녀갔을 때 기념품으로 가져온 엽서나 달력이, 본인이 다녀간 곳을 일본어 또는 서툰 한국어로 적어넣은 제로퍼제로의 서울지도가 (대체 왜?) 화장실에, 같이 갔던 전시회 티켓같은 것들이 대문 귀퉁이에. 나름 질서를 갖고 어지럽혀진 상태로 천천히 추억이 늘어나고 있었다.
2/
일본인 친구 M이 내 신발을 보고 귀엽다면서 '이 신발을 신어야 비로소 야림이라는 느낌이 난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나서 여러 번 바닥의 신발을 쳐다봤다. 곰돌이도 강아지도 아닌, 네발로 다니는 핑크색 캐릭터가 그려진 반스 슬립온. 언제쯤 일까, 글쎄 한 6년 전에 받았을까. 사랑했던 사람한테 받았던 선물이다. 내가 너무나 갖고싶어하는 모습을 보고 몰래 준비해준 서프라이즈 선물이었다. 신발을 선물하면 도망간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그 이야기가 무색하게도 나는 항상 그 신발을 신고서 그사람을 만나러 갔었다. 참 많은 걸 받았는데 거르고나니 그와의 시간을 추억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이것 뿐이다. 이제는 사라진 해방촌 단골카페 사장님을 흉내내며 걷거나, 열심히 메뉴를 분석하여 언젠가 그사람의 집에서 만들어먹기도 했다. 당시 그는 친구와 작은 집에서 동거를 하고 있었는데 함께 사는 친구의 자리는 언제나 어지럽게 무언가 잔뜩 쌓여있는 반면, 그의 자리만큼은 각 물건들이 행과 열을 맞춰 가지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의 집에 다녀온 날이면 '아 이사람이랑 결혼하면 나는 꽤나 잔소리 들을 거야'하며 괜히 어지러운 내 방을 뒤집어 엎기도 했다. 그런 그와 나는 당시에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유로 헤어졌고 이제는 그저 좋은 친구로 남아 서로의 안부정도나 간간이 묻는 미지근한 사이가 되었다. 그때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우리는 너무나 잘 알기에. 함께 가던 곳들이 자꾸 사라지고, 그와 주고받은 사랑의 말들은 점점 희미해진다. 그 시절의 나와 그사람을 이어주는 이 신발을 나는 언제까지 쥐고 있을까.
3/
가족들과 함께 살 때 쓰던 방만한 사이즈의 집에 사는 지금, 물건을 많이 들일 수가 없으니 과거가 담뿍 녹아있는 물건만 추리고 추려 일본에 데려왔다. 나와 동그라미의 피, 땀, 눈물이 녹아있는 아파트패턴의 가방이라든지, 지난 회사에서 승진 기념 선물로 친구 J가 선물해준 작은 조명이라든지, 야림의 흑역사를 들춰볼 수 있는 아이팟 나노 같은 것들. 각 물건들의 틈 사이에, 심지어 그 주변에까지도 당시의 추억이 덕지덕지 붙어있으니 이것들은 제법 자리를 차지한다. 방을 한 번 둘러본다. 이곳에 담아둔 추억을 새로운 공간에 펼쳐 놓으면 그대로 그 추억들은 살아 숨쉬겠지, 그것이 물건이라면. 그러나 때로는 그것이 물건이 아니라 사람이라면 우리는 자꾸만 잊혀지고 잊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찌할 수 없다. 추억의 마지막 정거장은 목소리라고 누군가 그랬다. 떠올리고 싶은 그 누군가의 목소리가 기억나지 않으면 이제 그 사람은 저멀리 떠나는 거라고. 아직은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떠나보내고싶지 않은 욕심쟁이인 나는 오늘도 잊지않으려고 꽉 찬 이 작은 방에 또 다시 새로운 틈을 내고, 그 목소리들을 조금씩 물건에 새겨넣는다.
추억팔이에 심취한 나머지 그안에 함몰되면 안되겠지만 그럼에도 가끔 꺼내볼 추억이 있는 삶이라 (그것이 좋은 기억이든, 슬픈 기억이든간에) 여하튼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다. 요즘처럼 아무도 만나지 못하고 방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해야하는 때면 더욱이. (적어도 상상력을 기르는 데에는 아주 탁월한 것 같다)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지내는 요즘의 내게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추억은 내게 자꾸만 말을 걸어온다. 예전의 나와는 비교할 수 없을만치 변해버린 나는 당장 어제의 일도, 6년 전의 일도, 10년 전의 일도 놓지를 못하고 눈물 짓고 머리를 싸맨다. 눈물이 모여 닳아빠져버린 신발이 되기도 하고 부치지 못한 편지가 되기도 한다. 사람은 추억을 먹고 산다고 하지 않는가. 난 아마도 계속 이렇게 추억을 야금야금 베어먹으며 당분간을 보내야할 것 같다. 오늘도 나는 장을 보러 나선다. 뒷축이 다 까지고 색이 바래버린 이 신발을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