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집에 이사 온 지 어느새 10개월. 좋기만 했던 집의 단점이 슬슬 보이기 시작했다. 먼저, 여름철이면 하수구 냄새가 심하다. 트랩을 설치해도 소용없어서 세탁실 쪽 방은 사용하기를 포기했다. 생각보다 낡기도 했다. 처음에는 마냥 깨끗해 보였는데 그래도 10살은 먹은 집이라 여기저기 낡은 흔적들이 보였다. 특히, 물 닿는 부분이 많은 화장실엔 녹슨 부분이 많아 눈에 걸린다. 언제 한번 다 갈아버려야지!라고 생각하지만, 시간도 비용도 현실만큼 녹록지 않다.
하지만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때'는 언제나 찾아오기 마련. 얼마 전부터 화장실에 작은 문제가 하나둘씩 생겼다. 먼저 세면대와 하수구를 연결하는 호스가 툭 빠졌다. 덕분에 세수하려고 세면대 수도꼭지를 틀면 발까지 씻을 수 있는 효율적인 시스템이 되었다. 어느 날에는 화장실 문을 열고 나오는데 핀이 툭 빠졌다. 잠금장치가 고장 났다! 당장 큰 불편함은 없었지만 손님이 오거나, 잘못 화장실 문을 닫아버렸을 때 열리지 않는 난감한 상황을 마주하게 될 것이었다. 화룡점정으로 세면대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찌나 덜컹이던지 세수를 할 때마다 세면대가 무너지는 건 아닌지 신경을 바짝 곤두세워야 했다.
지금이다!
마침 집에 있는 시간도 많겠다. 집 1층 철물점에 SOS를 쳤다. 집으로 올라온 아저씨는 5분 만에 사태를 파악하더니 연장을 들고 와서 뚝딱뚝딱 고쳐나갔다. 몇 달 동안 나를 괴롭히던 문제가 해결되기 위해 필요한 시간은 딱 20분. 물론 7만 원과 함께이긴 했지만 말이다. 내칠 새라 세면대를 고치기 위해서도 사람을 불었고, 불안하게 흔들리던 세면대는 10분 만에 단단한 지반을 가지게 되었다.
순식간에 문제를 해결하고 나니 그동안 왜 안 했는지 허탈함이 생겼다. 하지만 이내 공간을 돌볼 줄 아는 사람이 됐다는 기쁨도 함께 찾아왔다. 확실히 나는 코로나 이후로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졌고, 그러다 보니 어디가 마음에 들지 않고 어디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가 보인다. 무턱대고 사모았던 것들을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들(필수품만을 말하진 않는다)이 무엇인지 가늠해보며 나에 대해 더 알아가고 있다. 아직도 갈길은 멀다. 조금만 신경을 못 쓰면 온 물건이 집안을 점령한다. 지금 글을 쓰는 책상 위도 치운다고 치웠는데, 여전히 너무 다양한 물건들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휴가가 필요한 때였다. 번아웃에 가까운 증상들이 나타났다. 언제나 무기력하고 신나는 일이 없다. 회사에 가기 싫어 울지는 않았지만, 진짜로 회사에 안 갔다. 회사가 싫거나 미운 건 아니었다. 그저, 함께 점심을 먹으며 대화를 나누는 그 시간이 버겁게 느껴졌다. 의견이 필요한 순간에 대화를 시도하기보다는 지레짐작 포기하는 나날이 늘어갔다.
회사에서는 일주일에 한 번씩 1:1 미팅을 한다. 평소에는 쉬어가는 시간이지만, 가끔은 피하고 싶은 시간이다. 괜찮지 않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은데, 막상 물어보면 괜찮은 척을 잘 못하는 성격이라 늘 본심을 들키는. 그리고 후련하기라도 하면 다행인데 자주 찝찌름한 감정만 남아서는 더 기분이 가라앉는. 하지만 1:1을 하는 목요일은 매주 성실하게도 돌아왔고, 나는 결국 말해버렸다. "저, 요즘 회사가 너무 재미없어요. 힘든 건 아니거든요. 그런데 동기부여가 전혀 안 돼요."
다행히 나의 동료는 '숨기는 것보다 솔직히 말하고 같이 해결책을 찾아나가는 것이 낫다'는 주의. 이번에는 두 개의 처방전을 내려줬다. 하나는 주 3일 이상 재택근무하기, 다른 하나는 일주일 동안 휴가 다녀오기.
둘 다 쉽지는 않았다. 막상 재택근무를 하려니 외부 미팅이 너무 많이 잡히는 바람에, 더 바지런히 회사에 나왔다. 시기도 하필 성수기라 숙소 값이 만만치 않았다. 바다가 조금이라도 보이는 곳은 10만 원을 훌쩍 뛰어넘었다. 몇 가지 조건을 포기하면 다녀올 수 있었겠으나, 일주일이나 낸 휴가인데 좋아하는 것을 가까이 두고 싶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떠나기 하루 전 폭우가 쏟아졌다. 부산역이 물에 잠겼고 인명피해가 생겼다. 첫 번째 휴가지로 점찍어놨던 곳이 부산역 근처 초량동이라 가는 걸 포기했다. 재난이 일어난 곳에서 하하호호 웃으며 마음 편할 리가 없었다. 젠장, 이번 휴가는 벌써 망했군.
같은 남쪽이었지만 남해는 다행히 괜찮다고 했다. 이틀을 집에서 푹 쉬고, 짐을 간단히 꾸려 나섰다. "갑자기 그 멀리 남쪽까지 떠날 생각을 왜 한 거야?"라고 다들 물어봤는데, 잘 모르겠다. 떠날 곳은 필요했고, 바다는 보였으면 좋겠고, 가격은 너무 안 비쌌으면 좋겠고, 사람은 좀 적었으면 좋겠고. 그 모든 것을 맞추려다 보니 한 번도 관심을 가져보지 않은 도시 남해로 떠난 것이다.
결과적으로 반은 좋았고, 반은 좋지 않았다. 비가 많이 와서 예쁜 바다를 볼 수 없었다. 내가 숙소를 잡은 곳은 남해의 모서리였고 버스는 3시간에 한 번 정도 다녀 어딘가를 다녀오기도 쉽지 않았다. (언제나 후회하듯이) 혼자 떠난 여행은 심심했고, 처리하지 못하고 온 일들이 자꾸만 마음에 걸려서 이메일과 슬랙을 들여다보았다. 외부에서 온 메일들이 자꾸만 쌓여가는 걸 보면서, 결국 내 마음 편하자며 매일 밤 이메일 업무를 처리하곤 했다. 일단 휴가만 내면, 많은 게 해결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나를 둘러싼 무기력함은 여전해서, 푹 쉬지도 그렇다고 다 집어치우고 다시 일을 할 수도 없는 어정쩡한 나날들을 보내게 되었다.
원래는 남해 후 광주에 가는 일정이었지만,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남은 3일이라도 내 공간에 편히 있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익숙한 곳에서 일어나 커피를 내려먹고, 늘 그 자리에 있는 책에 손을 뻗어 뒤적거리고, 자고 싶을 땐 자고, 거실을 등으로 쓸고 다니고 싶으면 그래도 되는.
요즘엔 뽈이 프리랜서 일을 하느라 바빠, 나랑 놀아줄 시간이 많지 않다. 덕분에 남아도는 시간을 보내려 청소도 하고 집 정리도 하는 중이다. 그러다 보니 묵은 체 같던 화장실도 수리하게 되었고. 무더위에 집 나갔던 의욕도 조금씩 돌아오고 있는 참이다. 하나하나 쓸고 닦고 고쳐나가는 시간들이 더 편안하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시간을 잘 보낸다는 것은 무엇일까. 잘 쉬는 방법은 무엇일까.
매해 여름을 앓는다. 언제나처럼, 나는 이 여름을 조금은 의욕 없이 흘려보낼 것이다. 하지만 그 사이에 무엇이든, 천천히 하나씩 고쳐나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