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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도 고양이 Mar 11. 2024

한쪽 눈이 밤하늘을 닮은 고양이

랑이를 고양이 별로 보내고 나서 나는 다시 고양이를 삶에 들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몇 해가 지나고, 내가 한적한 시골 길가에 있던 아버지의 가게 안에 작은 카페를 차리게 되었을 때, 막연히 그런 생각을 했다. 집에는 고양이가 없더라도 밥 먹고 가는 길손님 고양이라도 있으면 좋겠다 싶은 생각. 이루어지기 어려운 일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이런 시골 마을에 고양이라고는 개처럼 목줄을 채워 집 앞마당에 묶어놓고 키우는 뒷집 노인이라든가 정도 있고 나머진 높고 낮은 산으로 둘러싸인 동네라, 산에서 고라니가 내려왔으면 내려왔지 고양이는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혹시 산 고양이가 있을지도 모르잖아? 하는 마음에 가게에 고양이 간식이라든가 하는 작은 것들을 사다 놓기도 하고, 혹시 고양이가 올지 모른다며 아내가 사다 놓은 길고양이 집을 조립해 덩그러니 놓아보았을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가게 마당 구석에 있는 아버지 작업실에 자꾸 고양이 같은 게 돌아다닌다며 이상하다고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옳다구나 하고 이때를 위해서 준비했다며 간식을 꺼내 들고 고양이를 찾았다. 확실히 고앵이들이었다. 왜 이런 시골 동네에 이렇게 귀엽게 생긴 고양이들이 있는지 의아했지만 아무튼 고양이들이었다. 너무 사람을 경계해서 간식을 놓고 멀찍이 떨어져 보니 코를 박고 먹는다. 세상에.



아버지 작업실 뒤편에 쌓아놓은 나무 사이에는 고양이 한 마리가 비집고 들어가 새끼 다섯 마리를 낳았다. 이게 무슨 복인가 싶어 잠깐 행복했다. 매일 고양이 구경을 가고 작은 고양이들이 여기저기 뛰어노는 걸 보면서 신기해했다. 벼리는 그렇게 따뜻해 보이던 고양이 무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 구석에 쌓아둔 낡은 방수포 위에서 발견되었다.


-


벼리를 보고 알 수 있었다. 무리에 어울리지 못하고 죽어가는 고양이. 한쪽 눈은 까맣게 되어 가까이서 보지 않으면 꼭 없는 것 같이 보이고, 뼈가 드러날 정도로 말랐는데 몸은 주먹만 하고 털은 듬성듬성 빠져있어 고양이 같지도 않아 보였다. 오히려 생김새는 쥐에 더 가까웠을까.



밥이라도 먹으라고 가까이 두면 코를 킁킁거리며 몸을 일으켰지만 다른 고양이들이 어떻게 알아채고 달려와 벼리에게 하악 하며 밀어내고 밥을 빼앗아먹었다. 벼리는 별다른 저항도 못하고 작게 야옹야옹 울다가 다시 방수포 위로 올라가 몸을 말고 가만히 있고 했다. 며칠 동안 관찰한 결과, 나는 이 고양이들에게 피부병이 퍼지는 중이란 걸 알았고, 털이 듬성듬성한 고양이들의 밥그릇에 고양이 항생제를 사 와 으깨서 뿌려주었다.


그리고 다른 고양이들이 코를 박고 먹는 동안 벼리 먹을 밥을 따로 덜어 항생제를 뿌리고 방수포 위에 놓아주었다. 벼리는 바들바들 떨며 삐약거리는 소리와 함께 일어나 밥을 먹기 시작했다. 골골거리면서 밥에 입을 대보느라 이상한 소리가 났지만, 한두 입 먹더니 온 힘을 다해서 밥을 먹었다. 그날 이후로 벼리는 조금씩 나를 따라다녔다. 다른 고양이들은 저마다 노느라 바쁘고 사람만 보면 도망 다녔지만 벼리는 강아지 같았다.



그때는 이름이 없었다. 고양이들에게 이름 붙이는 일에 그렇게 의미두지 않았다. 벼리도 마찬가지라 근처 가서 고양아~ 하고 부르면 벼리가 고개를 내밀었다. 재밌는 건 한 발 걷고 야옹, 한 발 걷고 하악, 하면서 다가온다는 거였다. 둘 중 하나만 하면 안 될까. 벼리는 날이 갈수록 털이 차고 하악 거리는 횟수도 줄었다. 눈은 까만 것이 계속 마음 쓰였는데 아내가 이것만은 병원에 가서 물어보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혹시 너무 정들까 봐, 너무 마음 쏟을까 봐 몇 번을 망설였고, 결국 데리고 가보았다. 병원에서는 아무래도 어릴 때 뭔가에 의해 눈이 다친 것 같다고, 그 흉터가 남은 건데 안압도 정상이고 시력도 있는 것 같다 했다. 다만 정상적으로는 보이지 않을 텐데 워낙 어릴 때라 이대로 적응한 것 같다고.


이름을 주자는 아내의 말에 뭐가 좋겠냐 물으니, 눈이 까만 게 꼭 밤하늘을 닮았다고, 다행히도 여기는 별이 많이 뜨는 동네이니 눈에 별을 담고 살라고 별, 벼리라고 불러주자고 했다.


그때부터 쥐를 닮았던 작은 회색 고양이는 우리에게 벼리가 되었다.


-

-


몰래 가게 뒷문을 살짝 열어두었다. 날이 점점 추워지는 탓이었다. 벼리는 날 따라 잽싸게 안으로 들어왔고 실내의 따뜻함에 적응하면서 밥을 먹고 나가고 싶은 때는 자유롭게 나갔다가 들어오고 싶으면 문 앞에 서서 나를 불렀다. 너는 어디 고양이이길래 여기까지 와서 밥을 얻어먹고 가니, 하면서도 간식 같은 걸 사 와서 열심히 주었다. 해가 지면 꼭 뛰어나가서 작업장 뒤편 수풀 너머로 사라졌다. 저쪽 언덕 너머에 마을이라도 있나 보다, 하고 그래 잠은 집에 가서 자야지, 대신에 너 꼭 여기 와서 맛있는 거 얻어먹고 갔다 하고 은혜 갚으러 와야 한다. 하고 벼리가 사라진 곳을 빤히 보고 가고 했다.



조금 건강과 기운을 찾은 벼리는 완전한 애교쟁이였다. 사람 발치에 졸졸 따라다니며 온몸을 부비고 누가 어떻게 만지고 안아도 골골거리며 좋아했다. 밥이라도 들고 있으면 목이 빠져라 보고 있다가 발톱도 못 세운 앞발을 들어 내 손을 쥐고 보챘다. 기분 좋았지만 한편으로는 무서웠다. 너무 정들면 떼어낼 때 곤란한데, 하고. 다른 고양이들은 어느덧 훌쩍 커지더니 드문드문 보이다가 저마다 살길 찾아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가끔 산에서 꼭 호랑이마냥 어슬렁어슬렁 내려오는 게 보일 뿐이었다.


그날은 조금 이상했다. 아무리 벼리가 자유롭게 돌아다닌다 해도 하루에 꼭 두어 번은 밥을 먹으러 왔는데 오늘은 안 온다. 이제 날이 추워지니 주인도 집 안에 들였나 보지, 하고 아버지는 괜찮을 거라 하셨다. 하지만 아버지도 내심 기다리셨는지 해만 지면 벼리가 뛰어가던 방향을 보며 벼리야, 하고 불러보셨다. 나는 영 내키지 않아 한 번 그 길로 가보기로 했다. 벼리 주인이라도 만나면 멋쩍게 인사하며 요 밑에 카페 사장인데요, 고양이가 너무 귀여워서 밥도 주고 했어요, 하고 가볍게 인사나 건네고 벼리나 보고 올 요량으로.


그렇게 벼리가 뛰어갔을 길을 가며 나는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집 같은 게 있을 리가, 마을 같은 게 있을 리가. 이 한적한 시골 동네에서 사방이 높고 낮은 산으로 둘러싸여 고라니라도 내려왔으면 내려왔지 얼어 죽을 놈의 고양이는 무슨 고양이가. 포장도 안된 돌길을 따라 올라간 곳은 광활하게 산을 깎아내며 토지공사하다가 멈춰있던 거대한 공사판이었고, 뭔지 모를 어울리지 않는 라면박스 하나가 뒹굴고 있었다. 이 언덕 너머에 마을이라도 있을 줄 알았던 내가 어리석었다. 한 번이라도 의심해 볼걸. 여기 고양이가 올리가 없는데 괜히 귀여워하는 마음에 나도 모르게 눈이 멀어서. 시발. 나쁜 새끼들. 시발.


나는 황망해졌다. 그때부터 간식을 손에 쥐고 벼리를 애타게 찾았다. 만평이 넘는다던 그 넓은 공사장 흙더미를 오르내리고 뒤져가며 벼리를 불렀다.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계속 며칠 전부터 드는 의아함이 머릿속을 괴롭혔다. 어쩐지 기운이 없어 보였다. 어쩐지 밥 양이 점점 줄었다. 어쩐지 가게 주변에, 가게 안에 토사물의 흔적 같은 것이, 설사의 흔적 같은 것들이, 애써 외면했던 것들이 하나둘 떠올라 나를 목졸랐다.


한 편으로는 이대로 찾지 않는 게 맞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이게 그저 밥 주는 길손님 고양이와 주인이 나눌 수 있는, 나름의 깔끔한 인사가 아닐까.

하고.


그렇게 포기해야 하나 하고 가게로 다시 돌아가는 길이었다. 길도 없어 찬바람 맞고 거친 가지만 무식하게 잔뜩 자라 무릎까지 올라온 죽은 잡초더미 사이를 해치며 연신 벼리를 부르면서 가던 와중에 바람 사이로 희미하게 야옹,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더 크게 벼리를 부르며 잡초더미를 뒤졌다. 그렇게 한참을 뒤지던 중, 잡초 가지 사이로 익숙한 회색 실루엣이 보였다. 벼리는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소리도 안 내고 다소곳하게 앉아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간식 먹자 벼리야. 하고 내민 손에, 그 좋아하던 간식에 대고 벼리의 망설임이 보였다. 

직감적으로 알았다. 여기가 네가 고른, 너 죽을 자리구나.


밤이면 뛰어가던 그 언덕너머 공사판도 보이고 먼발치라도 우리 가게가 한눈에 보이는, 그러면서 숨기도 좋은 여기가. 다가가면 어디론가 튀어나갈 것 같아 나도 더 움직이지 못했다. 한참을 늦가을 바람맞으며 한참을 서있다가 끝내 먼저 움직인 건 벼리였다. 체념한 듯이 다가와 손을 핥았고 나는 그대로 벼리를 들어 병원으로 갔다.


-


토요일이라 오전진료 밖에 안 해서 지금은 검사하기가 어려워요. 검사를 해서 뭔가 발견된다고 해도 조치가 어려워요. 2차 병원으로 가시는 수밖에 없는데 그러기에 부담이시라면 일단은 주말 동안 버텨보고 월요일에 바로 방문해 주세요.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건 왜인지 아시죠?


밥을 먹으니까요?


네 밥을 먹으니까 아직은 희망이 있어요. 밥 잘 먹게 도와주시고 따뜻하게 유지해 주시고. 주말 동안에라도 벼리가 어딘가 이상하다, 하면 2차 병원으로 가셔야 해요. 큰 문제 가아니라면 월요일까지 있어보고 


-


2차 병원. 단어만 먼저 들었을 때 연관되어 떠오른 단어는 병원비, 였다. 가장 가까운 병원이 한 시간 반 정도 걸리는 거리라는 걸 제외하고라도 당장 이 고양이에게 들일 병원비가 더 걱정이었다. 생명을 돈으로 치환할 수 있을까. 관계를 돈으로 치환할 수 있을까. 들여야 하는 돈이 형편을 벗어날 것 같으면 이렇게 다가오는 낭만적인 질문을 무참히 짓밟는다. 제발 그렇게까지는 아니길, 하고 이 관계가 내 삶의 가벼운 부분으로 다녀가길 바랄 뿐이다.


그래도 그렇게 데려온 벼리는 내 걱정이 무색하게 밥을 꽤 잘 먹었다. 정말 아픈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운은 조금 없어 보였지만 여전히 밥은 잘 먹었다. 그래 그거 다 먹으면 일단 기본 접종부터 하자. 그리고. 그다음은 다시 생각해 보기로 하자. 하고 숨죽여 주말을 보냈다.


-


저번에도 이랬나요?


네?


지금 당장 2차 병원으로 가세요. 지금 입 벌리면서 숨을 간신히 쉬고 있죠? 노력성 호흡이라는 거예요. 이대로라면 검사 도중에 별로 갈 수도 있어요. 저번에는 안 이랬다면 급하게 나빠진 거예요. 한 시가 급해요. 언제 숨이 넘어갈지 몰라요. 당장 출발하셔야 해요.


-


가게로 돌아온 나는 고양이를 차에서 꺼내지도 못한 채로 일단 내렸다. 점점 눈을 감은 고양이는 언제라도 숨이 넘어갈지 모른다는 말을 들은 기분 탓이었는지 쌕쌕거리며 담요 속으로 녹아내리는 것 같이 보였고, 차마 손댈 수 없어 일단 두었다. 가게로 돌아온 나는 멍하게 앉아있었다. 내가 어느 정도까지 해야 하나. 이 선을 넘어가면 나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이 삶에 고양이가 한 마리 더 들어오게 되는 건데. 나는 그럴만한 용기가 있나. 그럴만한 사이인가. 너와 내가.


그런 날 보며 아버지가 한숨을 쉬시며 말씀하셨다. 그래도 몇 년 정 붙이고 같이 살았던 가족이면 당장에라도 달려갈 텐데. 하셨다. 얼마나 같이 살았으면 이럴 때 이런 고민 안 하고 달려갔을까요? 했다. 그래도 한... 2년 정도라도 살았으면 정들고 가족이라 생각도 들고, 그래서 가지 않았을까? 하셨다. 2년. 근데 쟤는 아직 1년도 못 살았는데요? 1년도 못 살고 가족도... 하면서 공사장이 있을 언덕 쪽을 무심히 보았다.


그럼 아버지. 나 얘랑 2년 살았다 치고 병원 데려갈래요.

갔다 와서 같이 2년 살면 되지.



너 죽으러 간 거 맞구나. 근데 나 보고 생각이 바뀌었구나. 그래 너도 그렇게 용기 내본 거라면 나도 용기 내볼게. 그래, 너랑 나랑 가족 하자. 너도 살고 싶다고 나한테 왔는데 살아야지. 가족을 가져볼 기회조차 없이 이대로 가면 너무 가엾잖아. 너도 한 번은 기회가 있어야지. 그러니까 가보자.


노력성 호흡이 보여서 급히 2차 병원으로 가야 한다고 해서 왔어요. 원래 가게에서 밥 주던 바깥 고양이인데요. 피부병도 앓았고 엄청 마르고 눈도 이상한데 안압은 정상이니까 그것 때문에 아픈 건 아닌 것 같아요. 기운이 없어 보이고 설사나 구토 흔적도 더러 보였어요.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어요. 도착하자마자 쏟아내야 할 말을 차에서 연신 읊조렸다. 침착하게 상황을 잘 설명하고 도움을 받자 하고. 어디 하나 놓치는 것 없어야 하니까. 제발 가기 전까지만이라도 숨이 붙어있길. 하며 한 손으로는 틈 날 때마다 벼리를 쓰다듬었다.


그렇게 허겁지겁 병원 문을 들어섰다. 접수대에 줄이 조금 길었다. 나는 줄 사이 사람들을 비집고 들어가 가쁜 숨을 골랐다. 예약하시지 않으셨으면 기다리셔야 - 눈을 질끈 감고 큰 날숨으로 말을 잘랐다. 그리고 다음 날숨에 한 마디씩 뱉었다. 애써 연습해 간 말의 앞부분만 겨우.


노력성 호흡이,

고양이가.


차마 못했던 말은 살려주세요. 였다.

-


두 마디 했을 뿐인데 접수대에 있던 사람들과 어딘가에서 사람들이 달려 나왔다. 나는 벼리가 들어있는 케이지를 넘겨드리고 다리가 풀려 그대로 주저앉을 뻔하다 겨우 정신 차리고 접종이 안 된 고양이라 주의해 달라고 급하게 치료실로 가는 분들의 등 뒤에 말을 던지고 로비의 의자 위에 쓰러지듯 앉았다. 한참을 기다리고 진료실에서 나를 호출했다.


농흉, 원인을 알 수 없는 고름이 벼리의 가슴팍에 들어차 모든 장기를 짓누르는 중이라고 했다. 특히 폐가 거의 다 찌그러지고 심장도 쪼그라들어 급하게 주사기를 꽂아 농을 빼냈다고 했다. 다행히도 농이 만들어지는 속도보다 빼는 속도가 빨라 당장은 숨이 넘어가진 않겠지만, 문제는 농만 빠지는 게 아니라는 것. 피가 같이 빠지고 있고 벼리 몸무게가 너무 가벼워서 이대로 계속 제거할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치료 옵션으로 두 가지를 제시해 주셨다. 하나는 뽑아낸 농을 대형 기관으로 보내 병의 원인을 찾아내고 약을 써서 치료하는 것. 이렇게 되면 7일에서 10일 정도 병원에 입원하여 관리받으면서 농을 계속해서 뽑아내며 버티고 분석 결과가 오면 그때 다시 치료를 시작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병원비였다. 내가 각오한 것 보다도 컸다. 큰 정도가 아니라 단위가 달랐다. 마음이 꺾여버릴 만큼.


다른 옵션은 좀 더 현실적이었다. 하루 입원하는 대신 이 병원에서 쓸 수 있는 약을 다 써 보는 것. 모든 약을 다 써가며 차도가 있는지 확인해 보고 제거할 수 있을 만큼 최대한 농을 제거한 뒤에 효과가 그래도 있었던 약을 퇴원 이후에 경구투약 하면서 차도를 바라는 것이었다. 현실적이라고는 하지만 이 경우도 역시 큰 부담이었다. 그래도 각오한 만큼 견딜 수는 있는 정도였다. 선생님은 벼리의 사연을 들으시고, 앞에서 머뭇거리며 한숨 쉬는 나를 보시며 구조해 주어서 고맙다 했다. 그리고 모니터에 띄운 많은 부분에서 누가 봐도 가격일 것 같은 부분의 숫자를 지워주셨다. 후에 알게 된 건 견적서 상에서 인건비를 전부 지워주셨다고 했다.


혹시 모르니 연명치료는 하지 않는다고 체크해 주세요.
호흡기 한 번 대는 순간 우리 모두 힘들어질 거예요.

그게 금전적인 부분이든 마음의 문제이든.


그리고 알아두셔야 해요.

벼리의 지금 상태는 치료를 장담할 수 없어요.


-


케이지 안에 있는 벼리는 배에 붕대를 감고 팔에도 수액 같은 관을 달고 있는 채로 누워있었다. 내가 가니 고개를 들어 나를 보고 야옹, 하고 울 뿐이었다. 이렇게 순하고 착한 고양이는 처음 본다며 선생님은 누가 이런 애를, 하며 분노하셨다. 그렇게 밤을 보내고 벼리는 퇴원했다. 그때부터 벼리와 나는 생을 걸고 함께 견디기 시작했다.


고양이에게 약을 먹이는 일에 트라우마 비슷한 게 남아있던 나는 필건이 좋다는 말에 한 번 사보았다. 간식을 묻혀가며 열심히 연습해고 결국 수월하게 먹일 수 있게 되었다. 3일이 고비라는 말과 함께 잔뜩 받아온 약봉지에서 시간 되면 능숙하게 약 한 알을 꺼내 먹였다. 그때도 이렇게 먹였다면, 하는 생각이 잠시 마음을 지배했던 적도 있었지만 이내 털어내고 지금에 집중하기로 했다. 밤에는 작은 난로를 틀고 전기장판을 켜고 두꺼운 이불 안에 벼리를 잘 넣어두었다.


그런 노력과는 달리 벼리는 점점 기운을 잃어갔다.

고개는 점점 더 쳐지고 숨은 점점 더 옅어져 갔다.


-


3일째 되는 날, 매일같이 전화로 컨디션을 체크하시던 선생님도 가망이 없어 보인다는 전날의 내 대답을 의식하셨는지 전화가 없었다. 아버지는 쓸쓸한 눈으로 좋은 자리 골라 묻어주자는 말씀을 하셨다. 나는 끝까지 약을 먹였고 언제가 마지막이 될지 몰라 만질 때마다 인사를 해주었다. 옅어져 가는 숨 사이에도 골골거리는 고양이를 보며, 내 냄새가 나는 검은 고양이를 혹시 만나게 되면 안부 전해달라고.


-


다음날, 먼저 출근한 아버지께 전화가 걸려왔다. 좋지 않은 마음으로 받은 전화 너머로 흥분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벼리가 살아났다고. 벼리가 일어나서 돌아다닌다고.


-


기적 같은 일이었다. 정말 죽은 줄 알았던 고양이가 멀쩡히 일어나서 돌아다녔다. 기적적으로 흉수가 옅어지고 한쪽 폐는 점점 펴졌다. 방심할 수 없는 상태라고는 하지만 회복의 경과가 너무나도 좋았다. 벼리를 진찰하신 선생님께 말씀드렸더니 나보다 더 놀라시면서 그 착한 고양이에게 혹시 안 좋은 소식 들을까 봐 무서워서 전화 못하셨다며 고맙다고, 고맙다고 하셨다.


그날 이후로 벼리는 우리 카페의 스타 고양이가 되었다. 기적같이 살아난 고양이는 아버지의 자랑이 되었고, 내 껌딱지가 되어 졸졸 쫓아다니며 안아달라고 보채는 고양이가 되었다. 손님들에게도 애교가 폭발하며 벼리를 보러 오는 손님마저 생기는 지경이었다. 약은 계속 먹이고 엑스레이도 꾸준히 찍어가며 경과를 봐야 했지만 상관없었다. 오히려 병원 가는 날이 기다려졌다. 매번 갈 때마다 더 나아진 모습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으니까.


약도 아주아주 수월하게 먹일 수 있었다. 트라우마도 잊어버렸다. 약 먹이는 시간이 이 고양이가 나아지는 시간이라고 생각하니 이 또한 즐거웠다. 약봉지를 꺼내면 간식 먹는 줄 알고 무릎으로 뛰어오르는 이 고양이는 참을 수 없이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그렇게 벼리는 내 가족이 되었다. 치료를 종료해도 좋을 것 같다는 말에 날듯이 기뻤다. 여전히 장기들은 다른 건강한 고양이들에 비해 작게 쪼그라든 상태였지만 어떻게든 적응해서 살아가는 동물이 고양이라고 했다. 살도 많이 붙었다. 아무래도 분리불안이 조금 있었던 것 같았는데 결혼하며 신혼집이 안정되자마자 짐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마음이 놓이는지 살도 좀 붙고 해서 중성화 수술도 성공적으로 마쳤고 지금은 아냐가 데리고 온 콩콩이와 함께 막내 노릇을 톡톡히 하며 사는 중이다.



-


아침에 일어나면 벼리가 기척을 귀신같이 읽고 나에게 달려온다. 쪼그려 앉으면 안아달라고 앞발을 들고 내 어깨로 뛰어오른다. 예전에는 너무 가벼워서 있는지도 몰랐는데 요즘은 묵직한 게 팔이 아프다. 그래도 귀여우니까 이대로 아침을 맞는다.


콩콩이와는 사이가 좋은 듯 좋지 않다. 열심히 따라다니면서 다이브 하는데 몇 살 더 살아온 콩콩이는 갑자기 생겨난 막내가 편치 않은지 자꾸 툭툭 때리며 윽박지른다. 그래도 아랑곳하지 않고 쫓아다니며 일방적으로 구애하는 중이다. 이 두 마리 고양이는 우리가 만든 청첩장에도 등장하는데 요즘 우리 집 마스코트가 되어서 손님맞이를 아주 잘 해내는 중이다.


가끔 밖으로 달려 나가려고 하는 때가 있다. 외출냥이 시절이 있어서 그런지, 아니면 내가 밖에 나가니까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자꾸 문 밖으로 튀어나가려는 시도를 한다. 그럴 때마다 붙잡고 말한다. 안돼, 너에게 든 병원비가 얼마인지 알아? 들어올 때는 마음대로였겠지만 나갈 때는 아니란다. 이제 너 마음대로 못 가. 병원비 벌어놓고 가 요놈아. 하고.


-


가끔 자고 있는 벼리를 보면 여러 가지 생각이 겹쳐든다. 랑이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며 너도 갈 때는 이런 모습이겠지, 이게 마지막 모습과 다르지 않겠지 하고 쓰다듬어본다.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좋다며 가늘게 뜬 눈으로 나를 보며 골골거리는 고양이를 보면 그래도 어디선가 용기가 난다. 이게 마지막 모습이겠지만, 우리의 마지막은 정해져 있고 너는 다른 고양이들보다 그 순간이 좀 더 빨리 올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괜찮아.





너랑 나 이제 조금 있으면 2년 살아.

그럼 됐어, 우린 이제 가족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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