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거좀 더 줘봐 바요
나는 멘사 회비를 내기 싫어 준회원에 머물러있는 사람이자, 어려운 매듭 푸는 일에 집착하고 좋아하며, 바둑 아마 6단에 지도보급사를 갖추신 아버지의 아들이자, 넷마블에서 오목이라면 누구도 따라올 수 없었던 엄마의 아들입니다. 두 분과 어렸을 때부터 추상전략 보드게임으로 다양한 내기를 했고, 방금 전에도 아버지께 쿼리도를 털려 만원을 잃고 돌아온 사내입니다.
이렇게 써두면 내가 왜 방탈출 카페에 빠지고 열광하며 문제에 빠져 살았는지 바로 이해될 거예요. 아무튼 뭔가를 풀어내는 행위에 대한 흥미는 저에겐 상당히 원초적인 쾌락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근데 방탈출 카페는 좀 비싸단 말이에요.
가볼 만 하긴 한데, 점점 뭔가... 그렇습니다. 설계의 한계라고 하면 좋을까요. 뻔한 자물쇠와 자물쇠를 여는 문제와 문제를 푸는 힌트의 조합에 인위적임을 느끼고 그 인위적인 것에 가격을 생각해 보면, 원래 생각했던 그런 자연스러운 추리나 문제 풀이의 맛보다는 작은 숨은 그림 찾기 테마 카페 같은 느낌이 들더라고요.
그러다가 방탈출과 추리를 테마로 한 보드게임에 손을 대기 시작했습니다.
재밌습니다. 그러니까 트릭이라고 할까요. 보통 추리물이나 스릴러물의 콘텐츠를 보면, 소설이나 영화는 크 콘텐츠 포맷이 주는 특성으로 콘텐츠 내의 내용 외적인 측면에서 생각하지도 못한 반전을 딱 등장시킬 때 주는 쾌감이 상당합니다. 이런 부분이 보드게임에 적용된 걸 보고 환장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결국 그런 매력 때문에 이 분야에 발을 들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나름 한계라고 할까요, 그런 게 보이더라고요. 방탈출 카페가 많아졌을 때처럼, 뭔가 문제가 인위적이고, 그래서 푸는 맛이 좀 시들해졌습니다. 예를 들자면, 누가 서랍을 봉해놓은 4자리 수 자물쇠의 비밀번호 힌트를, 그 위에 걸어놓은 액자 속에 이상한 형태로 꼬아서 표시를 해놓고, 그렇게 표시해 놓았다고 다른 캐비닛 안에 있는 금고에 적어놓았겠어요. 이제 그런 게 반복되다 보면 꽤 질리는 맛이 됩니다. 가끔 구성물이나, 뭔가의 서술 트릭으로 새로운 반전을 주는 시도도 있었지만, 그런 게 뭔가 확 와닿지는 못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디텍티브 시리즈는 뭔가 반대편에 있습니다.
예전에 어디 라디오에서 들은 말이 항상 머릿속에 있어요. 수사, 추리는 생각보다 드라이하다는 말이었습니다. 밖으로 나가 탐문하고 인터뷰하고 흔적을 조사하고, 얼기설기 퍼져있는 정보들 중에서 유의미한 걸 취합하고, 거기서 하나 둘 이런저런 기법을 활용해 하나의 결과를 쫓아가는 과정이, 어떤 추리물이 주는 쾌감이나 반전의 묘미, 범인은 바로 너야! 하는 식의 어떤 명확한 결과물을 만들지는 못한다고요. 디텍티브 시리즈가 그런 느낌이지요.
이 책은 그 두 사이에 묘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명쾌한 문제와 답변이 준비되어 있지만, 그걸 찾아가는 과정은 조금 모호할 수 있어요. 굉장히 넓은 범위에서 하나하나 뜯어가 보며 접근해야 합니다. 물론 디텍티브 시리즈라든가 어떤 수사의 영역처럼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막막하게 만드는 그런 느낌은 아닙니다.
일러스트 안에서 증거를 조사할 수 있게 해 주고, 각 증거는 반드시 어떤 의미를 가지고 해답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장치를 가지고 있어요. 그러니 실제적인 추리와 게임 상에서의 추리가 묘하게 섞여있는 기분인 거지요. 가장 멋진 부분은 이런 부분입니다. 시체가 있다고 해서 이게 타살일까요? 먼저 타살인 정황부터 살펴야 하는 게 이 책의 묘미입니다. 타살인 게 맞다면 동기가 있는 용의자들은 적어도, 이 콘텐츠 내에서 제시하는 살인의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것도 찾아야 한다는 거지요.
물론 이 책은 그런 문제의 모음이어야 하기 때문에, 사실 이 시체가 있는 이곳은 범죄 현장이 아니었습니다- 할리는 없지만, 그걸 찾아볼 수 있게 마련했다는 점은 상당히 좋습니다. 적어도 거기에서 시작해야 하는 거니까요.
그리고 좋은 건, 이 안에서 뭔가 의심이 드는 부분은 검색으로 정보를 모아야 합니다. 필요하다면 SNS 계정을 직접 찾아야 하고, 필요하다면 등장하는 물체의 이름이나, 다양한 정보를 찾아내야 하는 경우도 있어요. 사실 이건 1권이 정말 어려운 포인트였는데 3권에 와서는 많이 정제된 걸 볼 수 있었습니다. 1,2,3권 모두 추천할 만 하지만 유독 3권이 재밌었던 점이 거기에 있었어요.
물론 좀 아쉬운 부분도 있었습니다. 아 이게 스포가 되니까 자세히는 말을 못 하는 게 아쉬운데, 각 사건마다 범행의 동기를 물어보는 질문이 있어요. 근데 아무리 생각하고 뒤져봐도 동기가 안 나오는데 해답에 쓰여있는 동기를 보고 울분이 치미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가끔은 이걸 가지고 이걸 유추할 수 있나? 싶은 부분도 없진 않았고요. 하지만 불가능 한 건 아니기에, 이것도 하나의 높이 사줄 만한 시도라고 봐도 괜찮았습니다.
인터넷이 안 되어도 책 내부에 문제풀이에 지장이 없도록 인쇄한 페이지들이 있어요. 이것도 높은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역시 많은 상황을 고려하는 건, 몰입을 해치더라도 결론에 다다를 수 없는 것보다 나으니까요.
아무튼 굉장히 마음에 드는 콘텐츠입니다. 카인의 턱뼈 어떻게든 완독 해보려고 노력하다가 좌절해서 뭔가 우울했는데, 때마침 가볍지만 잘 만든 추리 콘텐츠가 도착해서 재밌게 푹 쉰 것 같아 마음이 좋습니다. 이 기운으로 카인의 턱뼈를 풀어보는 게 올해 목표입니다. 개 힘들어요 진짜.
이 작가의 다른 콘텐츠도 나온다고 해서 선주문해놓았는데, 이 시리즈도 계속 지속되었으면 좋겠어요. 히헿 추리물은 최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