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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바이킹 Mar 11. 2023

엄빠가 부모님이 되던 날

#2. 부모님



“부모님 잘 계시지?”

대화를 여는 질문이 아무렇지 않다. 동생은, 남편은, 시부모님은, 때로는 지난번 싸웠다던 시누이에게까지 안녕하시냐 회진을 도는 별일 없는 삼십 대의 안부. 몇 년 전까지의 우리에게 친구끼리 가족 친지의 안부를 묻는다는 것은 일상 밖의 일이었다. 기껏해야 네 프사에 있는 지금 ‘이 남친’이 그때의 ‘그 남친’인가를 확인하는 것 정도였지, ‘부모님 잘 계시느냐’고? 서로의 부모님을 아는 오랜 사이라 해도 그분들이 ‘잘 계시는가’에 대한 문제를 벼르던 브런치를 먹으러 만난 우리가 확인할 일은 아니었다. 엄마, 아빠도 아닌 ‘부모님’이라는 나이 든 단어를 써 가면서는 더더욱.


누가 가르쳐 주었거나 일부러 쓰려고 노력한 것이 아닌데, 시간이 입에 올려붙여준 말들이 있다. 어느새 잦아진 은행이나 관공서와의 통화에 자연스럽게 “수고하십니다,” 붙이는 첫마디, 선배와의 카톡에서 발견되는 ‘얼집’, ‘육퇴’와 같은 줄임말들, 말을 하면서도 ‘악, 이 말을 쓰는 날이 오다니’ 싶지만 딱히 대체할 말도 없는 “요즘 애들” 같은 표현들. 첫 번째는 참 묻고 부탁할 것이 많은 사회생활의 시간이 쌓였다는 말, 두 번째는 선배가 사랑하는 아이와의 시간을 쌓는 중이라는 말, 마지막은 문자 그대로 내가 요즘의 시간에 더 이상 애들은 아니라는 말이다. ‘부모님 잘 계시냐’의 “부모님”은, 오랜 시간 ‘엄마와 아빠’로 계셨던 그분들과 이제부터는 달라진 시간을 지나게 되리라는 말이다.


어릴 적 종종 드라마에서 ‘철없다고 설정된’ 주인공이 “넌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엄마, 아빠냐”는 핀잔을 듣는 장면을 본 기억이 남아 있다. 막연히 ‘아, 나이가 들면 엄마 아빠를 다르게 불러야 하는 거구나’하는 생각과 “그 나이”란 어느 정도의 나이일까에 대한 가늠을 동시에 해보았던 기억. 또 다른 드라마와 영화에서는 역시 ‘어리거나 철없는’ 주인공에게 주변 어른으로 설정된 등장인물이 소리쳤다. “아부지 뭐하시노!” 혹은, “어머니 모셔 와, 당장!”

잘못은 주인공이 했는데 죄 없는 아부지와 어무니가 호출되는 이유는, 그가 아무리 주인공이라 한들 말 그대로 아직은 어리고 철없는 존재, 자신의 인생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유치원 쌤이 시키는 대로 종이 카네이션 위에 “엄마 아빠 사랑해요”를 삐뚤빼뚤 적던 때를 지나, 서러움에 북받쳐 “우리 엄마한테 이를 거야!” 하며 목놓아 울던 시절을 한참 넘은 때까지도, 내 인생에 대한 책임은 누가 봐도 내가 아닌 엄마 아빠에게 있었다. 우리가 사회적으로 ‘한 사람’이 되기까지엔 꽤 오랜 시간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긴 책임이 필요했다.


*


꼭 언제부터라고 집어낼 수 없는 어떤 시간 속에서, 그 책임의 시소는 차츰차츰 반대편으로 기울었다. 스마트폰 사용법을, 인터넷으로 무거운 양조간장을 주문하는 법을, 카톡 프로필에 어떻게 하면 꽃 사진을 넣을 수 있는가를 알려드리면서, 가족 여행이 ‘따라가는 것’이 아닌 ‘모시고 가는 것’이 되면서, 가족 행사 장소의 예약자 명단과 결제 카드 위에 적힌 ‘성함’이 나를 가리키면서, 철마다 필요한 계절 옷들과 잔뜩 영어가 써진 영양제들을 수시로 챙겨 나르면서, 손잡고 주기적으로 방문하는 곳이 놀이동산이 아닌 병원이 되면서. 오랜 시간 한쪽에 쌓여 있던 책임의 지분을 조금씩 나눠 가지며, 엄마와 아빠는 그렇게 천천히 나의 ‘부모님’이 되었다.


여느 때처럼 카페에 노트북을 펴놓고 앉아 있는데 테이블 건너편에서 나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겠다고 작정한 데시벨의 목소리가 날아와 꽂힌다. 스트레칭을 하는 척, 슥 하고 쳐다보니 환갑 정도로 보이는 아버지와 이십 초반쯤의 딸이 나란히 앉아 마찬가지로 노트북을 들여다보고 있다. "아니, 왜 이걸 모르냐고." 아하, 뭔갈 가르쳐 드리는 중이로군. "대체 이걸 왜 눌러봐? 아니이, 그니까 모르는데 왜 눌러보냐고. 하 씨 진짜 이걸 왜 눌러보↘︎냐↗︎고→오!" 아, 가르쳐 '드리는' 중은 아닌 것 같다. 딸이 목적 잃은 타박과 추궁을 이어가는 동안, 입이 없는 아버지는 살짝 발개진 얼굴로 웃고만 있다. 저걸 콱. 속으로는 오만 소리를 퍼붓고 있지만, 바로 지난 주말의 나의 지랄을 떠올리면 할 말도 없다. 자식들은 슬프게도 다 똑같다.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에는 시한부 선고를 받은 주인공 ‘정원’이 곧 홀로 남겨질 아버지에게 TV 사용법을 알려 주는 장면이 있다. “전! 원! 누르고!! 사! 번!!! 아이씨!!!” 빽! 소리 지르고 팍, 자리를 박차는 정원의 쿵쿵거리는 발소리에, 눈을 질끈 감아버리는 자식이 나 혼자는 아닐 것이다.



*


칠십 먹은 아들한테 백 살 먹은 엄마가 ‘차 조심하라’고 한다는데. 자식이 이처럼 평생 부모에게 ‘걱정되는 존재’라고 한다면, 차 조심 정도는 할 줄 아는 머리 굵은 자식에게 부모란 늘 ‘신경 쓰이는 존재’다. 출처 모를 부채 의식, 죄책감, 미안함, 감사, 원망, 걱정, 안타까움, 짠함, 필요함, 안쓰러움, 그리움. 세상 모든 감정을 가리키는 모든 단어를 다 끌어모아도 끝이 없을 것만 같아, 그냥 '신경 쓰이는' 거로 한다. 같이 살아도, 떨어져 살아도, 잘 해 드려도, 못 해 드려도 어쨌거나 까끌까끌, 알 수 없는 결의 신경이 쓰이는 존재.


물론 덜 굵은 머리를 했을 때도 늘 신경은 쓰였다. 몰래 먹은 떡볶이를 들킬까 봐, 학습지 답안을 베껴 적은 것이 들통날까 봐, 친구들과 계획한 여행에 보내주지 않을까 봐, 내가 한 선택을 달가워하지 않을까 봐 등등. 그러니까 내가 썼던 신경의 본질이 대략 ‘눈치’라는 것으로 심플하게 수렴하던 시절, 그분들은 나의 잘못을 들킬까 두려운 대상이자 원하는 무언가를 하기 위한 도움과 허락을 구해야 하는 존재, 무엇보다 뒤로 넘어져도 나의 코가 -사실은 그 무엇도- 깨지지 않도록 내 뒤에 바싹 붙어 선 커다란 뒷배였다. 무섭지만, 그렇기에 무서울 게 없는 기분. 때로, '내가 그분들의 손바닥 위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들은 묘한 안도감을 주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손바닥 위를 벗어난 세상의 손오공들은 기다렸던 해방감과 함께 뭔지 모를 두려움을 함께 느꼈다. 갑자기 한눈에 들어온 손바닥은 생각보다 작고 약했다. 막연히 영원할 것이었던 존재의 실재를 확인한 순간, 그것의 상실에 대한 공포가 따라붙었다. 시소의 무게 중심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 가볍기 그지없는 나의 엉덩이라는 사실이, 이제부터는 나 스스로가 누군가의 든든한 손바닥이 되어야 한다는 깨달음이 어찌나 공포스러운지, 어느새 어른인 우리는 부모님이라는 단어만 가지고도 눈물을 철철 흘릴 수 있다.


*


부모님과 함께 앉아 속 없이 시청했던 거의 마지막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어른 덕선은 '옛날로 돌아가고 싶은 이유'에 대해 "그 시절의 부모님을 만나고 싶어서"라고 답한다. "젊고, 태산 같았던 부모님..." 하며 말끝을 흐리는 그에게서, 그 시절의 부모님 나이가 되었지만 하나도 태산 같지 않아 불안해 죽을 것만 같은 나의 모습을 본다.


나를 데리러 오던 그분들을 내가 모시러 갈 때, 나 사느라 바쁜 만큼 고스란히 늙어 있는 주말의 그분들을 뵐 때, 뭔지 모를 것이 발바닥에서 가슴 언저리까지 잠시 울컥했다 내려간다. 이제는 별 감정과 사연들이 손댈 수 없이 얽히고설킨 사이라 해도, 그저 그분들이 똥오줌도 못 가리던 어린 나의, 친구에 사랑에 상처받고 뛰어들어오던 여린 나의 엄빠였다는 사실만으로 나는 우리 부모님이 한없이, 한없이 존중받았으면 좋겠다. 지하철 문 앞에서 머뭇거리는 할배라고, 건널목을 빨리 건너지 못하는 할매라고 무시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 딸이 사줬어, 할 수 있는 관상용 안마의자도 하나 턱 놓아드리고 싶고, '효켓팅' 성공해서 임영웅 콘서트 티켓도 카톡 프로필에 걸어 드리고 싶다. 언젠가 반드시 할 후회의 양을 조금이라도 아득바득 줄여 보고 싶다.


오늘 아침에도 찬란한 지랄을 하고야 만 내가 나이를 몇씩이나 더 먹는다고 해서 엄마와 아빠를 어머니, 아버지라 부르거나, 예의를 갖춘 존댓말을 쓰게 되는 날은 오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그럴수록 남들 앞에서는 그토록 힘주어 '저희 어머니', '저희 아버지', 부르는 것이다. '저희 부모님'이라는 말에는, 정작 저는 제대로 해드리지 못하는 존중을 세상으로부터 얻어내려는 자식의 알량한 사랑이 묻어 있다.




photo/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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