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 오상식이 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언니는 좋은 팀장이 될 거야.”
신입 카피라이터 시절, 회의에 들어가기 전 자신의 카피가 말이 되는가를 좀 같이 봐달라던 동기에게 몇 마디 건네자 그녀가 나를 올망올망 바라보며 했던 말이다. 언니는 ‘동기부여’를 할 줄 안다면서. 내가 정확히 뭐라고 했길래 그런 피드백을 들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데, 대략 ‘너의 카피와 그 속에 담긴 생각을 보니 너는 참 번뜩이는 단초를 잡아내는 능력이 좋은 것 같다, 다만 네가 아는 그것을 너의 팀장과 선배들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도록 이런 이런 것을 덧붙여 가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다’는 식의, ‘말이 되는가’ 보다는 좀 더 말이 되는 이야기를 하려고 애썼던 것 같다.
내가 건넨 말이 그녀의 회의에 얼마나 도움이 되었을까는 몰라도, 답례로 돌려받은 말이 당시 광고라고는 1도 모르면서 경력을 내던지고 중고 신입으로 들어와 ‘내가제일바보병’으로 고전하던 내게 큰 위안이 되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그래 어쩌면, 내가 가진 능력치란 지금 연차에서 써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몰라. 언젠가 팀장이 된다면, 나는 이렇게 누군가의 장점을 찾아내 주고, 더 성장하기 위한 조언도 건네며 비로소 제대로 된 ‘능력 발휘’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 뒤로도 종종, 직장인으로 성장하는 동안 내 능력이나 환경이 어딘가 모자라다 느낄 때면 생각했다. 아직은 ‘때’가 아니어서 그렇다고. 그때까지의 나는 일에서 부침을 겪는 것이 당연할지 모른다고. 그리고 시간은 흘러, ‘그때’는 찾아왔다.
이미 시장에 나와 있는 수많은 ‘초보 팀장의 수난기’들이 얻고 있는 열렬한 공감이 보여주듯, 당연하게도 나의 팀장 스토리 또한 어질어질한 수난사로 쓰이는 중이다. 팀의 리더가 되기 전, 프로젝트 리더를 2년 가까이 하면서 겪었던 ‘별별일’들도 ‘사람’이 나의 책임 리스트에 올라오자 별 참고 자료가 되지 못했다. 내가 진짜 저 사람처럼은 되지 말아야지, 하며 십수 년간 이를 갈고 모아 왔던 ‘팀장 오답 노트’는 어쩐지 점차 그들을 이해하도록 돕는 사례집이 되었다. ‘쉰 소리 하고 있네’ 하며 세모눈을 주었던 수많은 자기 계발서들의 리더십 코칭을 갈급히 찾아보기에 이르렀는데, 새삼 이렇게나 심난한 일들을 다들 아무렇지 않게 해내고 있었다는 사실에 더 기가 눌렸다. ‘잘 알아주는 것’ 하나면 좋은 팀장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것은, 모골이 송연한 오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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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속 팀장들은 둘 중의 한 캐릭터로 표현된다. 오상식이거나, 백승수이거나. '미생'의 오상식 차장은 회사에서는 종종 무능력자로 무시받지만, 허구한 날 사고만 치고 다니는 장그래를 '우리 애'로 끌어안는 인품을 가진 덕장(德將)이자 팀을 위해 회사와 싸워 주는 용장(勇將)이다. '스토브리그'의 백승수 단장은 쿠션어도 배려도 모르는 지만 잘난 독재자의 표본이지만, 뭐 하나 틀린 말도 실패도 없어 큰 소리 한번 치지 않고도 다른 이들의 입을 다물게 하는 지장(智將)이다. 실무자일 때의 나는, 내가 팀장이 된다면 당연하게도 오상식이 될 거라 생각했다. 내가 실무를 할 때 어려웠던 이런저런 것들을, 세심하게 살피고 팀원이 납득할 수 있는 부드러운 피드백을 건네야지. 아무리 힘들어도 어디 가서 절대 우리 팀 깎아내릴 말과 행동은 하지 말아야지. 존재만으로도 팀원들에게 자발적 동기부여가 될 수 있는 든든한 창과 방패가 되어야지.
현실은 오상식의 순진함과 백승수의 예민함을 장착한 눈물 나는 혼종의 모양새다. 능력과 성품 모두, 아니 하나라도 좋은 팀장이 되는 것은 정말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 경지에 이른다 해도 ‘모두에게’ 좋은 팀장이란 과연 가능한가. 내가 믿을 만한 사람이 되어 주어야 하는 팀원이 있는가 하면, 먼저 믿어 주어야 하는 팀원도 있다. 가능한 세세한 피드백을 원하는 팀원이 있는 반면, 무슨 말을 해도 마이크로매니징으로 받아들이는 팀원도 있다. 상사와 팀원들 사이 온도차와 시차를 원활히 조율해야 하는 입장에서, 만렙을 찍은 실무와 쪼렙 노템으로 시작한 리더의 업무 사이의 갭도 서둘러 메꿔야 한다. 불만이나 힘듦이 밀려와도, 이전처럼 맘 편히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는 없다. 이 모든 퀘스트를 수행하는 도중 ‘나’는 나도 모르게 뒷전이 되니 역시 ‘모두에게’ 좋은 팀장이 되기란 아직은 불가능하다. 그래, 드라마는 드라마지.
하루의 끝엔 진종일 팀원들과 상사의 표정과 뉘앙스를 양 쪽으로 살피느라 녹초가 되었으면서도, 그래도 뭔갈 더 잘해볼 수도 있지 않았을까를 되짚는 내가 남는다. 뭐, 애초에 내가 남에게 그렇게 대단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오만일 수 있겠다. 하지만 과거 누구 하나의 어떤 한 마디 때문에 회사생활 자체가 지옥이었던 나날도 있었고 보니 나의 모자람 하나가 혹 누군가의 하루를 헤집어놓지는 않았을지가 무척 신경이 쓰이는 건 사실이다. 내가 걱정한다고 이미 지난 일과 아직 모자란 경험을 어떻게 할 수는 없을 테니 부디, 그런 일이 너무 자주는 벌어지지 않기를.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내가 나 또한 돌보며 갈 수 있기를 바라볼 뿐.
좋은 팀장이란 대체 뭘까. 좋은 팀장이 되는 언젠가의 ‘그때’는 과연 찾아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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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후에도 퇴근할 수 없는 일에 대한 고민 이야기. 일하는 우리들의 달고 쓴 천일야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