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90년대에 대학을 다녔다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가 지난주 공개된 네 편의 에피소드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어느 곳을 가더라도 지금 몇 화를 보고 있느냐며 드라마의 ‘진도’를 묻고, 각종 클립 영상들과 서로의 눈물 포인트를 나누는 리뷰들이 어느새 온라인 피드를 점령한 것을 보면 세대를 초월한 공감을 불러일으킨 수작(秀作)임은 분명한 것 같다.
마지막 화에는 병원에 입원한 아빠가 딸에게 엄마와의 옛이야기를 들려주는 장면이 나온다. 아주 진귀한 무용담을 늘어놓는 듯한 아빠의 몸짓과 세상 그런 희한한 일도 있었냐는 듯 깔깔 웃는 딸의 모습에서, 어릴 적 그분들의 옛이야기를 해주시던 부모님과 눈을 휘둥그레 뜨고 듣는 나의 모습이 겹쳤다. 너무 가난해 소풍날 세 남매가 1원 하나를 셋으로 갈라 눈깔사탕을 사 먹었다는 이야기, 밤이면 호롱불 옆에서 고사리손으로 새끼를 비벼 꼬았다는 이야기, 아궁이에 밥 짓는 엄마 옆에 열심히 잔 나뭇가지를 주워다 날랐다는 이야기 등 부모님의 그 시절 이야기는 말 그대로 어디 시대극에나 나올 법한 옛날의 이야기였다.
그런데, 요즘 부모들의 옛이야기는 과거와는 조금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청소년기를 보내는 학생들의 부모 세대는 90년대와 2000년대 초반에 대학을 다녔다. 어릴 적 뽀로로는 없었어도 뽀뽀뽀가 나오는 TV는 집집마다 있었고, 학창 시절 스마트폰은 없었지만 삐삐와 2D 폴더폰이 있었으며, 단어만 없었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은 아이돌 ‘덕질’도 실컷 해본 세대다. 그러니까 이천 원 하던 짜장면이 팔천 원이 되고, 오백 원 하던 버스비가 천오백 원이 되었을지언정, 부모가 자라던 시절의 이야기가 그 자녀들에게 마치 다른 세상의 이야기를 듣는 것과 같은 격세지감을 주지는 않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주변의 40대, 50대 부모들 중 자녀들과 같은 가수를 좋아하고, 나란히 표를 끊어 콘서트에 가는 경우를 종종 본다. 다시금 유행하는 Y2K 감성과 90년대를 패러디한 TV 프로그램, 옛날 드라마들을 실컷 볼 수 있는 유튜브 등의 영향으로 요즘의 자녀 세대는 부모 세대의 사회와 문화를 비교적 친근하게 느끼고, 부모 세대는 그들의 자랄 적과 크게 다르지 않은 요즘 세대의 문화를 함께 소비한다. 가요무대를 보고 ‘7080 포크송 100선’을 흥얼거리는 부모를 ‘구세대’라 여기던 자녀, 아이돌 그룹의 춤과 랩은 음악도 아니라며 혀를 차던 부모와는 많이 달라진 모습이다.
물론 여전히 부모는 자식을 못 이기고, 자식은 영영 부모 속을 모른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지금의 우리가 예전의 서로에 비해 가까이 있다는 것이다. 아주 조금의 대화로도 성큼 다가설 수 있는 거리에. 제주 방언인 ‘폭싹 속았수다’는 표준말로 ‘무척 수고하셨습니다’라는 뜻이다. 이번 주말에는 드라마 봤냐는 말로 고마움과 미안함을 퉁치기보다, 부모님 참 수고하셨다고, 너희들 참 수고하고 있다고 서로 한마디씩 건네보는 건 어떨까.
이 글은 2025년 4월 5일 자 한국경제신문 'MZ 톡톡'에도 실렸습니다.
사진 출처/ 넷플릭스 '폭싹 속았수다'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