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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bert 이홍규 Feb 12. 2021

[원서 서평] 『반지의 성탑』, 도로시 더넷

1554년. 러시아 제국의 차르는 후에 러시아 역사상 가장 극과 극의 평가를 받는 군주인 이반 4세(Ivan IV, 1530 - 1584)였다. 이반 뇌제(Ivan the Terrible)라는 별명으로도 불리는 그는 불과 3살의 나이에 부친 바실리 3세가 타계하자 어머니 엘레나 글린스카야의 섭정 아래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엘레나는 러시아의 봉건 귀족인 보야르들과 협력해 정치 기반을 닦는데 실패하고 불과 5년 후 의문스러운 이유로 세상을 떠난다.


이반 4세는 어린 나이부터 왕을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키우려는 보야르들에게 육체적, 정신적으로 학대당하면서 자랐다. 때문에 복수의 기회만을 노리던 그는 1547년, 성인이 되어 친정을 펼치게 되자 자신을 차르라고 칭하고, 모스크바 대공국을 러시아 제국(차르국)으로 부르면서 절대 왕권을 천명하였다. 그는 보야르들을 포함한 신하와 백성을 자신의 기분에 따라 잔인하게 숙청하면서 러시아를 전제 군주 국가로 변모시켰다.


알렉산더 리토브첸코 作,〈영국인 탐험가 제롬 호지에게 보물을 자랑하는 이반 4세〉(1875) [출처: Wikimedia Commons]


한편, 이반 4세는 이러한 권력을 이용하여 러시아를 개혁하고 유럽의 선진국 대열에 참여하고자 하는 열망 또한 간절한 계몽 군주의 모습도 가지고 있었다. 이반 4세는 의회 제도를 도입해 일반 시민을 국정에 참여시켰고, 이는 보야르 귀족들의 견제라는 효과 및, 러시아라는 국가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또한 스트렐치라는 이름의 최초 상비군을 창설해 군사력을 강화시켰다.


1554년, 리처드 챈슬러(Richard Chancellor, 1521 - 1556)라는 잉글랜드인 탐험가는 '모스코비 상사 (Muscovy Company)'라고 불리게 되는 잉글랜드 상단 소속으로 모스크바에 도착해, 잉글랜드와 러시아의 통상조약 체결을 맺게 된다. 챈슬러는 1555년 다시 러시아로 돌아가 잉글랜드와 러시아 사이 무역을 중재하는 한편, 러시아가 잉글랜드로 보내는 첫 번째 대사인 오시프 네페야(Osip Nepeja, ? ~ 1750)와 함께 잉글랜드로 돌아가는 배에 오른다.


1556년. 리처드 챈슬러와 오시프 네페야를 기다리고 있는 잉글랜드의 국왕은 헨리 8세의 장녀이자, 후에 여왕에 오르는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 1533 - 1603)의 이복 언니인 메리 1세(Mary I, 1516 - 1558)가 통치하고 있었다. 37살이라는 나이에 왕위에 오른 메리 1세는 종교개혁을 선포한 부친과는 달리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고, 실제로 즉위하자마자 가톨릭 복권 정책을 펼치면서 잉글랜드 내에서도 종교 갈등이 극심해졌다.


또한 메리 1세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5세의 아들이자, 스페인의 왕세자인 펠리페 왕자(Philip II, 1527 - 1598)와 결혼을 하였는데, 잉글랜드의 귀족과 국민들 입장에서는 대국에 합병이 되는 과정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물론 펠리페 왕자는 메리 1세의 통치권에 간섭하지 않았지만, 만약 두 군주 사이에 적자가 태어나게 되면, 그에게 스페인과 잉글랜드의 왕관이 모두 넘어가는 것이다.


(左) 메리 1세, (右) 펠리페 2세 [출처: Wikimedia Commons]


하지만 메리 1세는 건강이 좋지 않았고, 늦은 나이에 결혼하였기 때문에 임신에 어려움을 겪었는데, 펠리페 왕자 또한 정략결혼에 가까웠던 부부 사이를 달갑게 여기지 않아 대부분 스페인에 머물러 있었다. 그녀는 1554년, 임신 초기 증상을 보였고, 1555년, 필리페 왕자가 잉글랜드를 방문하여 출산 준비를 시작했다. 중간에 왕자가 태어났다는 잘못된 소식이 런던에 흘러나가 축제가 벌어지기도 할 정도로 온 나라가 그녀의 임신에 주목했지만, 예정일이 몇 개월이나 넘어가자 상상임신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메리 1세의 후사가 없는 것이 점점 명백해지면서, 귀족과 백성들은 다음 왕위 계승자인 그녀의 이복 여동생 엘리자베스에게 주목하기 시작했다. 엘리자베스는 메리 1세의 왕위 내내 강한 견제를 받고 있었고, 심지어 모반 혐의를 써서 런던탑에 수감되기도 하였는데, 결국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이 되었다. 왕관의 행방은 잉글랜드라는 국가의 종교적 미래와도 깊은 관련이 있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메리 1세와는 달리, 엘리자베스는 잉글랜드 국교회와 입장을 함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국내에서 인기가 떨어지자, 메리 1세는 남편 펠리페가 시작한 전쟁인 스페인-프랑스 전쟁에 스페인 연합군으로 참전을 결정한다.


도로시 더넷의 6부작 역사소설 《라이몬드 연대기》의 5부, 『반지의 성탑』은 다른 모든 동료들이 고향으로 귀국한 가운데, 드라구트의 정부이자, 오스만 제국의 킹메이커인 키아야 카툰과 함께 러시아로 넘어간 라이몬드의 야망을 다루고 있다. 라이몬드는 이반 4세를 도와 군사 제도 개혁 및 상비군 창설을 이끌고, 자신의 카리스마와 뛰어난 기술을 사용해 이 새로운 국가를 발전시키고 대국의 기반을 닦는데 집중한다.


1555년, 러시아의 궁정을 방문한 리처드 챈슬러는 수중에 필리파 소머빌의 편지를 가지고 있다. 잉글랜드로 돌아가 메리 1세의 시녀가 된 필리파 소머빌은 라이몬드의 출생의 비밀을 파헤치게 되고, 자신이 찾아낸 사실을 라이몬드에게 알리면서 그가 고국으로 돌아오기를 요청한다. 하지만 러시아 제국의 대장군, '보에보다 볼쇼이 (Voevoda Bolshoi)'로 임명된 라이몬드는 젊은 국가, 러시아의 무한한 가능성에 자신의 운명을 걸고, 이 나라를 강대국으로 만들기 위한 원대한 꿈을 꾸며, 고향과 모든 소통을 거부한다.


이반 4세는 그런 라이몬드에게 광기에 가까운 집착과 소유욕을 보이지만, 오시프 네페야를 잉글랜드 대사로 보내면서 현지의 정치 상황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라이몬드 또한 동행할 것을 지시한다. 라이몬드는 필리파 소머빌, 그리고 자신의 출생의 비밀이 기다리고 있는 잉글랜드로 돌아가는 뱃길에 오른다.


지난 4부 동안, 라이몬드의 활극이 대부분 그를 향한 음모에 대처하기 위한 생존 본능에서 시작되었다면, 『반지의 성탑』에서 라이몬드는 드디어 본인의 능력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무대에 주인공으로 올라, 본인의 야망과 결정에 따른 모험을 시작한다. 개인이 운명을 바꾸어 나갈 수 있는 시대, '르네상스'의 영웅을 그리고 싶었다는 더넷의 목적이 드디어 이루어진 것이다.


르네상스 영웅의 야망

이제는 '귀젤'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불리는 키아야 카툰의 인도로 러시아에 도착한 라이몬드는, 프랑스에서 활동 중이던 세인트 메리 용병단의 정예 인원을 초대하여 러시아에 기반을 닦기 시작한다. 모든 것이 얼어붙은 날씨와, 아직 서유럽에 비해 문명화가 되지 않은 러시아지만, 라이몬드는 이 나라가 가진 가능성과 사랑에 빠진다.


마치 숨을 쉬면 입김이 나올 것 같이 생생하게 묘사되는 16세기 모스크바에서, 라이몬드와 세인트 메리의 용병들이 추운 날씨와 거친 성정의 러시아 땅에 적응해가는 과정은 시리즈 중 가장 이질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라이몬드는 지난 4부작 동안, 단 한 번도 자신의 의지로 무언가를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모든 행동은 자신, 또는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이들을 위협하는 외부 상황에 대한 대처였다.


『반지의 성탑』에서 그는 처음으로 본인이 소원하는 목적을 위하여 움직인다. 군사, 예술, 문학, 종교, 건축 등 자신이 배운 모든 능력을 한계까지 사용하고, 하나의 문명을 완성한다는, 고차원의 자아실현을 시작한다. 재미있게도, 대하 역사소설을 좋아하고 그만큼 많이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목적을 가지고 움직이는 주인공은 생소하게 다가온다. 대부분 역사소설이나 활극은, 셰익스피어, 월터 스콧, 알렉상드르 뒤마의 작품에서 보이듯, 복수나 치정을 중심으로 소설이 전개가 되는데, 이 작품 내 라이몬드가 보여주는 목적의식은 그야말로 20세기의 전문경영인을 떠올리게 만들 정도로 현대적인 특징이 있다.


물론 전문 역사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더넷이 견지하는 '르네상스'적인 인물상이 21세기에 와서 르네상스 시대를 바라보는 역사관과 비교하면 다분히 낭만적인 구석이 있는 것은 감안해야 한다. 하지만 마키아벨리의 군주관과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예술적 재능을 섞어 놓은 듯한 라이몬드의 인물상이 마냥 시대를 앞서갔다고 평하기에도 어렵다. '르네상스' 시대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근대의 전조가 아니었을지는 몰라도, 라이몬드는 지극히 르네상스에 어울리는 영웅이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반지의 성탑』의 전반부는 야생의 발톱을 간직한 러시아를 무대로, 진취적인 라이몬드와 세인트 메리 용병단의 활동을 따라가면서 미국의 개척시대, 그것도 건국 초기에 있었던 루이스 클라크 탐험과 같은 인상을 준다. 리처드 챈슬러의 역사적 행적을 통해 라이몬드의 이야기를 조명하는 서사적 장치 또한 이러한 프런티어 연출의 일부라고 해석할 수 있다.


라이몬드와 리처드 챈슬러가 램포즈냐를 향한 여정에 올라, 썰매를 타고 러시아의 설원을 질주하는 장면은 잭 런던이 그리는 야생보다 거친 생기로 가득 차 있고, 루이스 라모르가 그리는 서부보다 서정적이다.


원문:

They swept through the dark day and were running still when moonlight unveiled the snow and the Dancers shimmered, green and white, in the limitless spaces above and streamed over the snowfields towards them, cold as alchemists' fire.

On such a night, no one spoke. The four sledges soared through horizonless space, wreathed above and below with vapours of light, shot with trembling colour. Above the fear and his aching body and the pain of the pure and terrible air in his lungs Diccon Chancellor dwelled, with his heart on his wife and his sons, and his soul in a limbo far farther than that, and experienced happiness.


번역:

그들은 어둑한 낮 동안 쉬지 않고 질주하였고, 어느새 달빛이 눈 위에 드리워지자, 끝을 알 수 없는 머리 위 하늘을 무대로 오로라가 푸르스름한 빛으로 춤추며 그들 앞에 깔린 설원을 마치 연금술사의 불처럼 차갑게 태우고 있었다.

이런 밤이면,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4개의 썰매는 뿌연 빛이 머리 위와 발아래 사방을 흔들리는 색으로 물들이는, 지평선 없는 공간 사이를 가르며 나아갔다. 정신적 두려움과 신체적 고통을 넘어서, 맑고 무섭도록 차가운 공기가 폐를 가득 채우는 것을 느끼며, 리처드 디콘 챈슬러의 심장은 그의 부인과 자식들을 향해 있었지만, 그의 영혼은 훨씬 멀리 있는 어딘가의 연옥을 부유하면서, 행복을 경험했다.

숙명의 굴레

『반지의 성탑』의 원서 제목인 『The Ringed Castle』은 16세기 유럽 정치를 체스에 비교해온 명명법을 이어나간다. 체스 게임 중 하나의 지정된 말을 사용하여 체크메이트를 하는 일종의 핸디캡 적용 미니 게임이 있는데, 해당 말을 표시하기 위하여 반지를 올려둔다. 이러한 말을 'ringed piece' 즉, 반지 쓴 말이라고 부른다. 즉, 『반지의 성탑』이라는 제목은 체스 말 중, 성탑을 의미하는 룩을 사용하여 체크메이트를 해야만 하는 미니게임을 의미한다. 전작들과는 달리 이번 작품에서는 제목의 의미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상황이 서사적으로 등장하지 않아, 의미를 유추해볼 수밖에 없다.


전작인 『유황을 받은 병정』부터, 라이몬드는 신기하게도 예언과 별점(horoscope)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다른 모든 부분에서는 이성적 판단을 가장 우선시하는 그의 모습을 생각해보면 의아한 설정일 수도 있지만, 작중에 나오는 별점은 유의미한 복선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설득력 있는 서사 장치의 일부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라이몬드가 러시아에서 펼쳐가는 야망은, 지난 4부에서 그가 바꾸어 놓은 주변 인물들의 인생과 그전부터 라이몬드를 쫓아다녔던 과거의 망령으로부터 일시적인 도피에 불과할 뿐이다. 그리고 그것을 일깨워주는 인물이, 어느새 시리즈의 또 다른 주인공으로 부상한 필리파 소머빌이다.


라이몬드의 아들을 찾으러 지중해를 헤집고 다녔던 15세의 겁 없는 소녀는 어느새 메리 1세의 시녀(lady in waiting)가 되어 폭풍우와도 같은 유럽 정치 한가운데에서 균형감각을 발휘한다. 그녀는 어느새 라이몬드와 비견할 수 있는 거시적 이해 감각으로 국제 정치를 이야기하고, 순식간에 라틴어로 바꾸어 고전 문학을 인용하고, 두운법(alliteration)을 사용한 시를 즉흥적으로 읊어대는 예술적 감각을 보여준다.


하지만 필리파 소머빌과 라이몬드는 비슷한 만큼 다르기도 하다. 라이몬드가 효율을 중시하고, 감정이 결여된 인간관계를 만들기 위해 노력을 기울일 때, 필리파는 연민과 공감을 기반으로 상대를 대한다. 라이몬드가 결과를 중시할 때, 필리파는 과정에 집중한다. 라이몬드가 어떠한 문제를 접할 때 성공이라는 결과를 위한 행동만을 계산한다면, 필리파는 같은 상황에서 행동부터 시작하고, 성공을 위한 안배는 차츰 생각해 나간다.


라이몬드는 필리파와의 대화를 통해, 그가 목표로 하는 자아실현 중심의 인생에 균열이 가는 것을 느끼게 된다. 지금까지 라이몬드가 자신의 능력으로 만들어낸 지위- 유럽 최고의 용병단 대장, 신생 러시아 제국의 대장군 모두 그의 숙명으로부터 회피한 결과일 뿐이다.


라이몬드는 자신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체스판 위의 모든 말을 사용했다. 하지만, 『반지의 성탑』이 끝나면서 라이몬드는 이 지독한 체스게임을 끝내기 위해서는 단 하나의 말을 사용해 체크메이트를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바로 룩- 일직선으로 움직이며, 움직임이 정직해 초반의 난전에는 사용이 어렵지만, 엔드게임에 그 진가를 발휘하는 체스 말이다. 라이몬드는 도망쳐온 과거와 마주하면서 이 대하사극은 종장, 『체크메이트』로 이어진다.


(끝)


『The Ringed Castle』(1971), Dorothy Dunnett

https://www.goodreads.com/book/show/351198.The_Ringed_Cas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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