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미널 승강장에 서있는 고속버스 사이로 작은 봉고차 한 대가 들어온다. 차가 멈추자 문이 열리며 도저히 그 안에 다 탈 수 없을 것 같은 인원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다. 엄마 품에 안긴 아주 어린 아기부터 신체의 일부를 접고 왔을 것이 분명한 큰 체구의 남자까지 승객은 다양하고 제각각이었다. 얼굴은 다들 땀범벅에, 뭐라고 하는진 모르겠지만 내리면서도 뭔가 다들 말이 많다. 오, 이런 터미널에 저런 봉고차도 오는구나. 신기하지만 나는 타기 싫군.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저 멀리서 누군가 내게 뛰어오며 소리친다. 저 사람은 내가 아까 티켓을 구매했던 창구의 직원인데? 바닥에 앉아있다가 엉덩이를 탈탈 털며 급히 일어났다. 직원은 봉고차를 검지 손가락으로 거칠게 가리키며 다시 한번 소리쳤다.
"albarracín!!!"
그 봉고차에 차마 다 탈 수 없을 것 같은 인원이 다시 한번 탑승을 완료했다. 나는 체구도 작은데 발목이 접혔고, 모든 승객은 나를 쳐다본다. 마드리드나 바르셀로나 같은 관광지에서는 느낄 수 없는 이 압도되는 시선. 태어나서 동양인을 처음 보는 것 같은 순수한 호기심의 눈빛. 나바로라는 이름의 이 작은 봉고차는 몸 어딘가 하나씩 구겨진 우리들을 싣고 알바라신을 향해 출발했다.
봉고차가 기이한 형상의 돌산을 옆에 끼고 한 시간 정도를 쌩쌩 달려 나를 내려준 곳은, 정류장 표지판 하나 없는 허허벌판이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직사광선이 따갑게 온 몸을 찔러댔다. 주위를 둘러봐도 자연 외에 무언가 인공적인 존재가 (도로 외에는) 하나도 눈에 띄지 않았다. 그때는 그냥 조금 어이없는 정도였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마을은 뭐든 정말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까지만 만들어 놓는 것 같다.
구글맵을 이용해 예약해둔 호텔로 어렵게 찾아가 문을 두드렸으나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분위기로 봐서는 누군가 나오는 게 더 이상할 것 같은 그림 같은 곳이었다. 언젠가 읽었던 추리소설에서 상상했던 여주인이 운영하는 시골에 작은 숙박업소 같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쯤, 오래된 나무계단이 삐그덕거리는 소리를 내며 정말 숏컷의 중년 여자가 등장했다. 그녀는 잠시 낮잠을 자고 있었다며 겸연쩍게 웃었는데, 24시간 내내 멤버를 바꿔가며 리셉션을 지키는 마드리드의 호스텔 분위기와는 확실히 다르게 느껴졌다.
숙박비를 지불하고, 열쇠를 받고, 방에 대한 이런저런 설명을 듣는 동안 속으로 생각했던 건, 이 곳에는 정말 아무런 소음도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여주인이 편히 쉬라며 방을 떠나고 나자 그 고요는 더욱 명백해졌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자니, 사람 소리는 물론이고 기계가 작동하는 작은 소음조차 들리지 않았다. 처음에는 이 세상에 나 혼자 존재하는 느낌이었다가, 고요가 지속될수록 점점 여기가 어딘지, 내가 누군지도 희미해지는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침묵에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이상한 기분과 갑자기 밀려드는 엄청난 외로움에 당황해 서둘러 문을 열고 방을 나왔다. 나무 바닥은 내가 걸을 때마다 삐걱댔지만 그 소리라도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소품이 하나하나 오래돼 보이는, 가정집 거실 같은 느낌의 로비는 불은 꺼져 있었지만 정오의 햇살을 한 몸에 받아 아늑하고 따뜻한 느낌을 풍겼다. 햇볕을 받아 밝게 드러난 낡은 소파의 헤진 가죽이나 그 위를 부유하는 먼지 입자 같은 것이 하나의 익숙한 풍경으로 다가와 외로운 마음을 안심케 했다.
로비를 지나쳐 복도 끝에 문 틈으로 빛이 새어 나오는 나무 문을 열자 뒷마당 같은 것이 나타났다. 이 네모진 마당은 받아낼 수 있을 만큼의 햇볕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는 것 같았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뜨거운 공기 속에 멍하니 서있다가 문득 어제는 18인실 도미토리에서 잤으나 오늘은 호텔 더블룸에 체크인을 하게 된 이유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방으로 들어가 꼬질 해진 옷가지들을 열심히 빨아서 가지고 나왔다.
햇볕을 보고 빨랫감을 생각하다니. 나도 다 컸구나.
빨래를 널고 나와 길을 따라 걷는데, 어디가 마을의 (나름대로) 번화가인지 찾을 수가 없다. 뭘 좀 먹고 싶은데 식당도 없고, 길 가는 사람한테 물어보고 싶은데 지나가는 사람이 없다. 우연히 나무 그늘 밑에 앉아 계신 할아버지를 발견하고 근처에 마트가 없냐고 물으니 무심한 손 끝이 닿은 곳엔 일반 가정집의 외관을 한 작은 구멍가게가 있었다. 샌드위치는 없는데 와사비맛 팝콘을 파는 조금 특이한 그곳에서 감자칩과 납작 복숭아를 샀다.
복숭아를 입에 물고 걷는데, 조금은 이런 고요에 적응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절벽 끝에 매달려있는 듯한 집에는 문패는 붙어있으나 사람 소리가 나지 않고, 드문드문 위치한 상점은 문이 열려 있는 대신 불이 꺼져있다. 이따금씩 불어오는 바람소리나 새소리 외에는 작은 대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마을의 길 한복판을 걸으며 처음으로 나는 내 발걸음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얼마쯤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걷다 보니 구시가지로 통하는 길이 나왔다. 알바라신의 구시가지는 중세의 성곽도시 원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마을로서, 내가 이 곳에 마음을 빼앗겨 루트를 전면 수정하게 된 이유도
수백 년 전에서 시간이 멈춘 듯한 구시가지의 아름다운 풍경 때문이었다.
이 계단길을 걷다 보면 이따금씩 맞은편에서 내려오는 관광객으로 보이는(드디어) 중년의 부부들과 마주치곤 했는데, 그들의 옷이 젖은 정도로 보아 앞으로 남은 거리가 얼마나 될지 짐작할 수 있었다. 걷다 지치면 사진을 찍으며 바람에 옷을 말리고, 또 걷다 지치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말을 건네가며 돌계단을 오를수록 마을의 모양을 갖춘 숨어있는 집들이 하나둘씩 얼굴을 내밀었다.
삼십여분 쯤 계단을 올라가자 탁 트인 광장이라기엔 좀 좁지만 어쨌든 마을의 중심 같은 곳이 나왔다. 그곳에 많지 않은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많지 않아도 두 명이상 모여있는 사람들을 발견한 것과, 그들이 마시고 있는 테이블 위의 맥주가 너무 반가워 과장을 전혀 보태지 않고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선글라스를 끼고 셀카봉을 든 사람들은 이 중세 마을에 떨어진 21세기의 시간여행자들 같다고 혼자 생각했는데, 그중에서도 낡은 바 테라스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계시던 할아버지(마을 주민인 듯했다)는 이 곳에 온 지 너무 오래되어 본인이 시간 여행자라는 걸 잊어버린 채 정착해서 살고 있는 사람 같았다.
내가 지나쳐 올라갈 때 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중이셨던 그 할아버지는 내려오는 길에도 그 자리에서 해가 지는 모습을 가만히 보고 계셨다. 얼굴에는 전혀 지루함이 묻어나지 않았다. 아침에 휴대폰 배터리를 충전하고 출근길에 인터넷 뉴스를 탐독하는 것처럼, 해가 질 때에는 그 모습을 바라보는 게 할아버지 하루의 중요한 일과인 것 같았다. 옆에 같이 앉아 석양을 바라보고 싶었지만 해가 다 지기 전에 가보고 싶은 곳이 있어 그러지 못했다. 내려오면서, 석양을 바라보는 일이 하루 우선순위의 상위권에 자리하는 삶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할아버지의 삶과 잘 어울리는 이 작은 도시와 사람들 몰래 어디선가 조용히 흐르는 것 같은 이 곳의 시간에 대해서도 한동안 생각을 멈추지 못했다.
생각해보면 이 곳에서는 지나가는 관광객들이나 호텔 주인, 슈퍼마켓 아저씨와 몇 마디를 주고받은 걸 빼면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마드리드에서 넘치게 많은 대화를 주고받았던 걸 생각하면 거의 삼일 간의 묵언 수행이나 다름없다. 찾아가서 볼만한 박물관이나 유적지, 맛집은커녕 기념품샵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하루 종일 걷기만 했던 삼일이었다.
그러나 이 곳에서 내 운동화가 돌길을 밟는 소리, 어느 집 화단에 핀 이름 모를 보라색 꽃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 같은 것을 들었다. 고양이가 걷는데 소리가 난다는 것도 알았다. 하도 심심해서 저녁 내내 숙소 앞 벤치에 앉아 붉던 하늘이 차츰 깜깜해져 가는, 그러면서 별이 보이기 시작하는 과정을 몇 시간씩 구경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도시라고 생각했는데, 딱히 볼 것은 없는 곳이라고 그날 밤 썼던 일기에 적혀있지만 다른 곳이었으면 들을 기회가 없을 , 다른 곳이었으면 보려고 하지 않을 광경을 눈과 귀에 담을 수 있었다.
"teruel!!!"
기사 아저씨의 우렁찬 고함이 전광판 안내를 대신하는 이 곳의 정류장에서 타고 왔던 봉고차에 올라 다시 테루엘로 향한다. 큰 시내로 볼 일이 있어 아침부터 발걸음을 서두른 마을 할아버지, 할머니들과 함께 이 마을을 서서히 빠져나간다. 중간중간 사람들을 태우느라 멈추는 동안 창 밖에 해는 높게 뜨고, 조금씩 소음이 들리고 바삐 걷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내가 떠나온 마을에서의 시간에서 그만큼씩 멀어진다.
그렇게 다음 도시의 시간이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