뭘 모르는지도 모르는 상태
2024년 5월 23일
보이스 아티스트가 된다-7일차
@오디션
어제 오디션을 치렀다. 긴장도 긴장이지만 당혹스러운 느낌이었다. 사실 그동안 공채용 대본을 녹음할 때에는 아무 생각도 없었다. 그냥 신기하고 재미있기만 했다. 어차피 될 가능성도 낮고 돼도 골아픈 일이 펼쳐질 것이라는 생각이 많아서다.
그런데 어제는 달랐다. 노력해서 구하고자 한다면 구할 수 있는, 실현 가능성이 있는 일이라고 생각을 하니 아노미 상태가 됐다. 뭘 읽는지도 모르겠고 뭘 하는지도 모르겠는 상태. 녹음실에서 진땀을 뻘뻘 흘리기만 하다 나왔다. 더군다나 아무런 연습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방금 받은 대본을 읽는 건 처음이었다! 아 이런 것도 연습을 해야 하는구나. 내가 뭘 못하는지를 모르니까 뭘 연습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지금 다시 그때 그 상황을 떠올려도 동료가 참 잘했다는 것, 근데 난 뭘 하는지 모르겠다는 것, 여긴 어디, 나는 누구, 하다 얼떨결에 녹음실에서 나온 느낌이다.
오디션이 끝나고 나서 선배와 선생님이 몇 가지를 알려주셨을 때 내 수준을 딱 깨달았다.(짚어줬다거나 지적하는 수준이 아니다. 모든 게 엉망일 때는 지적도 불가능하다.)
'아, 난 뭘 모르는지도 모르는 상태구나.'
글자도 못 뗀 상태에서 논문을 쓰겠다고 덤빈 꼴이다. '밟고'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알려주셨을 때 그 생각이 머리를 땅, 때렸다. 덧셈 뺄셈도 못하면서 미적분을 하겠다고 샤프 들고 덤비는 꼴(나는 아직도 미적분을 할 줄 모른다).
수업을 좋아하는 이유
오디션을 치르고나서 머리가 멍-해져 있는데 앞에서 선생님이 어떻게 하면 되는지 시범을 보여주셨다. 그걸 딱 들으니까 웃음이 나왔다. 일단 내가 잘 못하는 건 알겠는데, 왜 선생님이 하는 건 듣기가 좋은지도 모르겠고, 같은 사람인데 참 이상하구나,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 손을 대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다가 그냥 백지가 됐다.
별로 힘을 들이지 않고 툭툭 읽는 느낌인데 찰졌다. 뭔가 쫀득하게 귀에 착착 감기는 느낌.
그때부터는 그냥 여기가 콘서트구나, 팬들이 가수들 콘서트 가면 이런 느낌이구나 하는 느낌으로 와 진짜 듣기가 좋다, 재밌다, 나도 저렇게 해보고 싶다, 하는 몽글몽글한 마음으로 해맑게 앉아 있었다. 그렇게 있으니까 진짜 재밌었다. 다시 그 상황을 생각해도 웃음이 난다.
정말 순수하고 온전하게 오디션의 시작부터 수업이 끝난 10시까지 다 잊고 몰입했고 아주 즐거웠다. 어제 기사가 많았고 잠을 잘 자지 못해서 피곤했고 어깨가 무척 결렸는데 싹 잊고 있었다.
그러다 이 글을 쓰다보니 내가 왜 성우수업, 보이스 아트 수업을 좋아하는지를 깨달았다. 나는 그런 음성 연기를 듣는 게 정말 좋구나 하고 생각했다.
보는 건 너무 헤비하다. 느끼기까지 하는 것도 너무 부담스럽다. 그런데 듣거나 읽는 것만은 대부분 좋았던 것 같다. 심지어 최고 아티스트들이 직접 텍스트를 읽어주다니. 와 감각의 사치다.
그러다 올 1월이었나, 성우 수업을 처음 들었을 때 일지를 적은 것을 읽었다. 아주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아 대충 또박또박 읽으면 되지 않겠나 하고 수업에 들어갔다가, 선생님이 시를 읽고 감정을 풀이하고 그걸 연기하는 그 모습에 반해서 인생에 대한 영감을 얻어서는 글을 쏟아낸 그런 날이었다.
사실 지금도 그렇다. 어제 두 시간밖에 못 잤는데... 학교 수업을 째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잘 계획이었는데 결국은 어제 오디션 대본을 읽다가 다른 성우의 낭독본을 듣다가 귀한 경험이었구나 싶어 또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다.
좀 살아있기를 잘한 것 같다. 이렇게 재밌는 일도 있으니. 못해도 즐거우니 그것으로 되었다. 마음이 꺄르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