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을 품고 읽는다는 것
피드백
선배께서 수업 시간에 피드백을 주셨는데 "성우처럼 읽지 않아서 좋다"고 하셨다. 그러나 성우처럼 읽는 게 무엇인지 몰랐을 뿐이다.
공부가 길지 않아서 그렇다 고 그동안은 그렇게 생각했는데 지금은 공부가 너무 모자라서 그런가 싶다. <님의 침묵>을 과제 시로 받고 나서 유튜브에 검색을 많이 해봤는데 마음에 와 닿게 읽는 분이 적었다. 애초에 성우 관련 콘텐츠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그렇지만 핑계다. 성우처럼 읽는 건 뭘까. 시를 성우처럼 읽는 건 뭘까.
시
시를 읽은 건 참 오랜만이다. 그것도 소리내어 읽은 건 정말 몇 년 만이다. 내가 외웠던 마지막 시는 최승자의 <삼십세>다. 읽을 때마다 마음이 푹 젖어들만큼 아픈 시.
이건 정말 딴 소리인데 나는 시대의 고통을 타고나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한다. 타인을 넘어서서 우리의 아픔까지 모두 짊어지고 아픈 사람. 나는 그런 사람이 시인, 예술가, 무당이 되는 거라고 생각한다.
최승자는 그런 사람이라고 본다. 내 아픔을 대신 노래해주는 사람. 시대 탓에 앓는 것을 아프다고 울어주는 사람. 그의 시를 읽을 때마다 나 대신 아파주는 것 같아 고맙다. 덕분에 제가 건강하게 삽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이왕 아플 거면 나도 시대로 아픈 사람이고 싶었다. 기꺼이 대신 아파주고도 싶었다. 예수가 부러울 때도 있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시대로, 사회로, 사람으로 아프고 싶지 않다. 그 어떤 것으로도 아프고 싶지 않다. 아프지 않은 삶이 있고 최소한 덜 아픈 삶이 있다는 걸 알았다. 그런 일상을 잠깐이나마 누리고나니 아픔을 쳐다도 보기가 싫었다. 그러고 나서 시를 읽은 적이 없다.
<님의 침묵>
과제 시로 <님의 침묵>을 받고 고민했다. 처음 생각한 님은 연인이었는데 점차 아픔, 고통 그 자체를 님으로 생각할 수는 없을까 싶었다.
나는 깜깜한 밤에 학교 교정을 걸어 내려오는 걸 정말 싫어한다. 그 20분이 그렇게 사무친다. 전화 너머로 들리는 숨소리조차 싫은데 그리운 시간. 하필 지난 주에는 학교 축제 기간이라서 교정이 시끌벅적했다.
그때 내가 보낸 님은 내 20대 초반이었다.
하루종일 마감에 쫓기며 무슨 소식이 뜰까 가슴을 졸이다 퇴근하면 잠깐 좋고 오래 허무하다. 이게 내가 바랐던 직업이었나.
그때 내가 보낸 님은 기자의 꿈이었다.
이상하게 눈을 뜰 때부터 감을 때까지 완벽하게 충만한 날이 있었다. 그 날은 어쩐지 내내 외롭지 않았다. 곁에 있는 모든 것이 나를 채웠다.
그때 내가 보낸 님은 고독이었다.
여러 님을 보내고 보낼 때마다 들어봤다. 고독을 침묵시켰을 때는 밝았고 20대 초반을 보냈을 때는 씁쓸했고 기자를 보냈을 때는 자신감이 없게 느껴졌다. 이걸 다시 지난 주 수업 녹음본과 대조해보니 감정을 품은 채 발화하는 것의 차이가 작게나마 느껴졌다.
그렇구나. 외우는 게 아니구나. 머리도 안 좋은데 자꾸 외우려들지 말아야겠다.
수치
지난 주부터 이번 주 화요일까지 잡아먹힌 감정이다. 이 사건 얘기가 나올 때마다 발작 버튼을 눌린 듯 울고불고 징징댔다. 아 물론 남편이랑 개 앞에서만. 하... 정말 E도 아니면서 외향적인 척은 오지게 해 대서 여기저기서 연락이 오는데 이 건물에서 뛰어 내릴까 저 건물에서 뛰어내릴까 고민을 오지게 했다.
뮤지컬 <영웅>을 보면서 내내 내 손가락을 자르시오, 그 목줄에 내 목을 거시오 싶었다. 좁은 좌석에 갇혀서 공황 오는 줄.
스스로 완벽하지 않고 완벽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스스로에게 걸어둔 기대치를 충족시키질 못하면 용서가 안 된다. 아니 그러면 새로운 걸 하지를 말든가 왜 그렇게 카페인에는 취약해서는 맨날 뭘 또 일을 벌여서는 그르케 사고를 치나. 이 미친 사람이 진짜...
나는 우주먼지다. 나는 우주먼지다. 우주먼지다. 우주 먼지조차 못 된다. 우주 먼지조차 못 된다. 우주 먼지조차 못 된다. 시간 속에 나는 무다. 나는 없다. 이걸 좀 명심을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