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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두빛초록 Apr 15. 2022

쉬운 난임은 없다.

동결이식은 쉬울줄 알았지


화학적 유산 후 2달이 넘도록 월경이 없어 결국 유도주사를 처방받고, 주사를 맞은지 4일만에 월경이 시작되어 시험관 2차에 돌입하게 되었다.

이번텀에는 동결배아이식을 하기로 해서 과배란이나 난자채취 없이 자궁내막을 두껍게 만드는 약제를 복용하기로 했다.
프로기노바 라는 작은 하늘색 알약을 아침 저녁으로 2알씩 총 하루 4알,
다낭성난소를 가진 사람들에게 처방된다는 액토스라는 하얀 알약을 저녁 식후 즉시 1알.
의사선생님은 그다지 권하지 않는다고 하셨지만, 많은 사람들이 혈행개선과 혈전억제를 위해 복용하고 있다는 아스피린 저녁 식후 1알.
주사도, 질정도 없는 작은 알약 6알.
약 18일정도 약제를 복용한 후에 초음파로 자궁내막을 관찰하여 일정 두께 이상이 되면, 착상을 위한 준비가 되었다는 판단을 하고 동결배아를 이식하게 된다.

난자채취를 먼저 진행하는 신선배아 이식때는 하루에 2~3개의 주사를 맞고, 병원도 일주일에 2-3번씩 가야했다면
동결배아이식은 첫 처방시 1번, 자궁내막 확인 시 1번, 이식 시 1번, 총 3번만 병원을 방문하면 된다니 참으로 간단해보였다.
진료실에서 동결배아 이식에 관한 설명을 들은 나는 간단한 과정에 기뻐 마스크 안으로 웃음을 지었다.
의사선생님도 쉽다, 간단하다, 라고 몇번이고 반복해서 말씀하셨기에 이번엔 정말 아무런 힘든 것 없이 해낼 수 있으리라 믿었다.

시험관 과정을 너무 얕봤기 때문일까, 
약제를 복용하기 시작한지 이틀만에 온갖 부작용이 몸과 정신을 아득하게 했다.

두통으로 시작해서 하루종일 머리가 멍 하고 눈꺼풀과 몸이 무거워서 축축 쳐졌다.
소화도 잘 안되거니와, 어지러움과 때때로 찾아오는 메스꺼움속에 사무실에서 나는 영락없이 병든 닭처럼 앉아 일해야했다.
몸은 어찌나 퉁퉁 부어오르는지, 약을 복용하는 내내 과식이나 고열량의 간식 한번 먹은 적 없지만 아랫배는 점차 볼록해졌고
팔 다리가 퉁퉁 부어올라 그 통증으로 밤에는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액토스를 복용하고나면 잠들기 전에 꼭 일정 시간동안 호흡곤란이 찾아왔다.
콧물이 있는 것도 아닌데, 코 안쪽 점막이 부어올라서인지 호흡할 통로가 좁아져서 숨쉬기가 힘들어 의식적으로 숨을 크게 몰아쉬어야했다.

무엇보다 가장 이겨내기 힘든 부작용은 우울감과 불안감이었다.
분명히 약을 먹기 전에는 가끔 우울해도 좋아하는 활동을 하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고, 공원을 뛰고나면 빠르게 좋아졌는데
약을 먹은 후로는 계속해서 우울감이 나를 떠나지 않았다.

하루종일 "왜 나만 이런 고생을 해야하나. 다른사람들은 자연임신으로 예쁘고 건강한 아이를 한번에 잘도 낳는데..."
"왜 하필 나만..? 왜 하필 나한테 이런일이" 라는 생각과
"계속해서 나만 안되면 어떡해야하지, 어떻게 하면 좋지.. 나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는데..너무 무섭고 불안하고 두렵다.'라는 부정적인 생각들이 맴돌았다.
시험관시술의 끝이 , 도무지 보이 지 않아, 너무 아득해서 막막했다.

약때문에 몸이 부어서 호흡곤란이 오는것인지, 막막한 생각들에 숨이막혀 호흡곤란이 오는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밤들이었다.

이번주는 마음이 참 많이 힘들었다.
나보다 한참 늦게 결혼한 중학교 동창도, 사촌언니도, 사촌동생도, 스터디를 같이했던 동생도 모두 임신소식을 전해왔다.
그 때마다 마음이 무너지고 두껍고 날카로운 쇳덩이로 갈퀴어졌다.
"나만 안된다." 라는 생각이 귀에, 마음에 울려 떠나질 않았다.


마지막으론 바로 옆에 있던 동갑내기 직장동료가 임신 소식을 전했다.
나는 진심으로 축하해줄 수 없었다. 그저 허공에 멍하니 침울한 눈동자로 '아, 네'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최선이었다.
마음을 누가 무거운 쇳망치로 몇번이고 때렸던 걸까, 징하니 우리게 아팠다.
그리곤 계속해서 입덧증상을 호소했다. 밥을 못먹은지 몇주가 되었으며, 음식 냄새만 맡아도 구역질이 올라오고, 구토와 설사가 반복되자 몸에 기력이 없어 버티기 힘들다했다.
앞으로 자리를 오래 비울일이 있을테니 이해해달라고 했다.


계속해서 본인이 얼마나 힘든지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몇일 전에는 밤중에 응급실에 실려가서 링겔을 맞고 간신히 출근했고, 오늘도 퇴근하자마자 링겔을 맞아야 한다고 했다.
집에 가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이 그저 누워서 올라오는 구토와 싸우다 지쳐 잠든다고 했다.

그만듣고싶었다.
궁금하지않았다.
알고싶지도 않았고 한번도 물어보지 않았다.

미안하게도 나는 임신 축하한다는 말은 커녕 '그래 힘들겠구나 어쩌니.'같은 위로가 되는 입에발린말 조차 할 수 없었다.
그저 자연임신에 성공한 것이 얼마나 축복인줄도 모르고 본인 힘들고 억울한 것들만 나열하는 태도가 보기 불편했다.
본인만 힘든 시간들을 보내고 있는 것 처럼 내게 다 이해해주기를 원하는 것도 너무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으로 보였다.
나 또한 시험관시술을 하느라 수면마취를하고, 그러다 입원을하고, 링겔을 하루에 5통씩 맞고, 차마 일어나 앉지도 못할 정도의 시간을 보냈음에도
그 어디에도 이야기한 적 없이 아무렇지 않게 출근하여 업무를 봤건만, 그 누구에게 나의 상태가 이러하니 나를 좀 이해하고 받아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나도 너무 힘든데, 자기만 힘든 것 처럼 이야기하는게 치가 떨렸다.
마치 어떠한 병을 가지고 있는데 언제쯤 나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어 몇번이고 이미 힘든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에게
나는 곧 나을것인데 치료과정이 너무 힘드니 나를 좀 도와다오. 하는 꼴 같아 우스웠다.
어떠한 동정도 느낄 수 없었다.

너무 화가나서 남은 오후의 시간을 한마디도 하지않고 싸늘하게 보냈다.
그도 그럴것이 그녀는 예전에 내가 화학적유산을 한 일을을 두고
"그것도 유산이라고 해요?"라는 천진난만한 질문을 눈을 동그랗게 뜨며 던졌다.
같은 여성으로서 유산을 겪은 사람이 얼마나 마음이 아플지는 아주 조금도 이해하는 것 없는 태도가 놀라웠다.
그러면서 본인은 유산하기 싫고, 유산할까봐 무서우니 몸을 잘 챙겨야한다고 이야기한다니. 소시오패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결국 퇴근길에 나는 아주 정중히, 부탁했다.
유산을 겪은 마음에 그런 질문은 너무 상처가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본인도 이제 유산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았으니 더이상 그러한 말을 내게 하지말아달라고 했다.
난임을 겪는 사람은 주변의 임신소식이 참 마음아프고, 입덧증상을 겪는 것 또한 힘들 것을 알면서도 그저 부러운 일이니
더이상 내게 입덧증상이 어떠한지 구체적으로 길게 말하지 말아달라고 했다.
계속해서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더욱 불안해지고, 초조해지고, 나만 안되는 것 같아 불행해지기 마련이니 자주 자리를 비우는 것은 몸이 너무 힘들어서 그런것으로 이해를 하더라도 내게 증상에 대한 이야기는 그만해달라고 했다.

임신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진심으로 축하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이번주에 내리 5명의 임신소식을 들으니 나는 대체 왜 이렇게 살아야하는가, 에 대한 좌절과 혼란으로 예민한 상태였다고 미안하다했다.
축하한다고 전했다.

그러한 말을 구구절절 늘어놓아야한다는 사실이 너무도 비참했다.
누구나 축하해야하고, 마땅히 축하받아야할 임신소식에 나는 왜 그리하지 못하는지 속상하고, 또 비참했다.


그녀는 내게 그동안 본인도 눈치보느라 몇주를 참고 참다가 더이상 몸이 힘들어 안되겠어서 말한 것인데 그거 하나 이해해주지 못하냐고 서운하고 상처받았다고 했다. 그런 반응일줄은 몰랐다고 했다.

그 말이 또 한번 상처가 되어 가슴에 못이 박혔다.


나는 왜 또 이러한 원망을 받아야하는 것인가.


내가 자리비우는 것을, 몸이 힘든 것을 이해해주지 못한다고 하지 않았는데, 도대체 왜 나에게 이런말들을 퍼붓는 것인가.
나는 내 마음이 힘든것을 어떻게든 외면하고 꾹 눌러참으며 웃으면서 축하해주고 모든 것들을 귀를 열고 마음을 다해 들어줘야만 하는 의무가 ,
그러한 법이 어디 있단 말인가.
너무도 이기적인 태도에 치가 떨렸다.

그녀는 그렇게 한바탕 엄청난 말들을 쏟아내더니, 마음이 편해졌는지,
본인은 내게 상처를 줄 생각이 없었는데, 말주변이 부족해 상처를 주었던 것 같다.
상처받지마라. 그렇게 받아들였다면 진심으로 미안하다 했다. 그리고 앞으로 나와 정말 친하게 잘 지내고 싶다 했다.
하지만 그 사과는 내 마음에 닿지 않았다.

참 쉽다 생각했다.
그렇게 큰 상처를 주고도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면 나는 사르르 풀려서 다시 웃으며 잘 지내야하는건지, 웃겼다.
얼마전에본 드라마 소년심판에서처럼 자백하고, 반성하면 죄값을 반으로 덜어주는 것 처럼 내 마음도 그렇게 잘못과 상처를 사과란 이름으로 깨끗하게 지워야하는거인지, 그 불가능한 일을 내게 요구하니 나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냥, 더이상의 다툼을 나누기에 내 몸이 너무 힘들었다.
참으로 당당하고 자기중심적인 태도에 나는 기가질려 머리까지 멍해진 상태여서
그냥 별 말 없이 회사 문 밖을 나섰다.

남편과 함께 차를 타고 돌아가는길,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너무 비참해서.
하필이면 가는 길에 타이어 펑크까지 나선 고된 몸을 어서 집에 누이지도 못하고 밤 10시까지 정비를 해야했다.
하염없이 나는 눈물을 흘리면서 주변에 수선이 가능한 타이어가게를 알아보고 전화했다.
몸과 마음이 힘들어도 할일을 먼저 해야한다는 사실이 참 무겁게 느껴졌다.

늦은 밤에도 계속해서, 하염없이 눈물이 흐르고, 세상을 원망하며 목놓아 울었다.
누군가를 탓하면 안된다는걸 알면서도, 겨우 내 마음 하나 어찌하지 못해 남편을 탓했다.
다 너때문이라고, 너때문이라고 울부짖었다.
원망하지 말아달라는 부탁을 분명히 들어놓고, 속마음으로는 그리해서 좋아질 것도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원망한다고 내 마음이 편안해지지 않는다는걸 알면서도 자꾸만 어리석게도 표현을 참 못나게도 했다.

잠도 오지 않았다.
울다 지쳐 잠이 들었다가도 새벽잠엔 자연임신에 성공해서 행복해하는 주변 지인들이 자꾸만 나왔다.
나와는 달리 산부인과 진료실에서 선명한 아기집을 확인하고, 규칙적으로 힘차게 뛰는 아기심장소리를 부부가 함께 들으며
아주 환한 표정으로 의사선생님께 감사하다고 말하는, 그 한없이 밝은 감동의 표정이 자꾸만 확대되어 꿈에 나왔다.
나는 그럴 수 없을 것만 같다는 불안감. 공포감이 밀려와서 괴로움에 치떠는 눈물이 잠을 깨웠다.
나는 보지도 않았던 그 표정이, 아주 생생하게, 내가 본 듯이 뇌리에 남아 나를 괴롭혔다.

나는 과연 어떻게 해야 이 상황에서 벗어나서 편안하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모든게 잘 될것인데 무엇이 걱정인가', '예쁘고 건강한 아이가 찾아와서 우리가정이 더욱 행복해지리라.'하는 믿음을 가지고
새로운 마음으로 웃으며 날들을 맞이할 수 있을것일까, 가능한 일일까,

이모든게 나의 그릇이 작아서일까.
하염없이 가슴이 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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