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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빈공방 Jan 01. 2021

여름 같은 2021년이기를

이제야 청춘의 문을 두드리는 서른 살



서른이 되었다. 어느새, 라는 말과 함께 벌써?가 따라붙고, 나는 잠시 패닉을 멈추고 생각해보기로 한다. 너무나 익숙한 패턴이다 이건. 다 산 늙은이처럼 가상의 관짝에 못을 박는 행태는. 스물한 살의 내가 스무 살 새내기들을 보며 혀를 찼던 것, 스물여덟의 내가 일본으로 떠나며 그것이 인생의 마지막 막이라고 생각했던 것, 다 하나의 착각에서 비롯되지 않았던가. 내가 다 컸다는. 


나는 어른일까? 얼마 전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과 만나 서른을 논하면서 하나같이 동의했던 것이 있다. 도무지 스스로가 어른 같지가 않다는 것이다. 가정을 책임지고 있지도 않고, 현명하거나 부자이지도 않은데 무슨 어른이야. 다만, 열심히 일을 하고 있긴 하다. 가방끈을 늘리는 중이거나. 이전에 비해 흑백 논리를 내세우지 않게 되었고, 쉬이 남을 판단하는 성급함도 버렸다. 기분과 태도를 분리했고 건강검진을 챙겨 받는다. 그렇게 나이 듦에 따라 변한 모습들을 이모저모 짚어보다가, 17살에 만난 친구 셋은 마침내 선언했다. 


우리는 너무 어릴 때부터 애늙은이였어서 차이를 잘 모르겠는 거야.

과연,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은 어딘가가 닮아있다. 보통 집단 내에서 책임을 지는 사람들이다. 확률적으로는 K-장녀가 많고, 외동이거나 막내여도 실질적으로는 그 집의 가장 역할을 하는 밀레니얼들. MT를 가면 술 게임 대신 설거지를 하고, 술자리가 끝나면 모두를 택시에 태워 보내는 사람들. 스물셋부터 자격증을 따모으며 일찌감치 제 살길을 묵묵히 찾아 나선 일개미들. 나는 그런 그들이 편하고, 대견하고, 가엽다. 물론 이런 그룹 안에서도 성격과 매력은 천차만별이지만, 본질이 애늙은이인 친구들이. 각자 자기만의 방식으로 어린 날들을 즐기긴 했어도 너무 일찍 옳은 길을 정해버린 내 사람들은 - 적어도 나는 - 여름을 건너뛴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해치워야만 했던 것들을 어느 정도 이루고 어딘가 조금 자유로워진 서른의 초입에서 이제서야 젊음을 펼쳐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부모님과 사회가 내게 자꾸만 무거운 성인의 짐을 지우려 하는 이 순간에 말이다. 타투가, 공연이, 실수가, 사랑이 하고 싶다. 나중에 혹 아이를 낳는다면 “엄마는 서른부터 미친 망아지처럼 살기 시작했어”라고 담담하게 말해보고 싶다. 그래 봤자 회사를 때려치는 일도, 부모님과 대판 싸우고 밥상을 엎을 용기까지는 안나겠지만 말이다. 


그저 - 이제 1/3 쯤 무르게 살아온 내 인생에 선명한 색으로 가득한 여름을 선물하고 싶다. 



그래, 어차피 1월 한 달 애써보고 치울 계획을 늘어놓지는 않겠다. 이미 운동, 공부, 돈 모으기 같은 뻔해서 더 어려운 단어들은 내 다이어리 안에 잘 수납되어 있다. 2021년에 공공연히 표현할 다짐은 하나다. 


여름처럼 살겠다.


여름. 나는 7월에 태어났고, 해가 길어지기 시작하면 자꾸만 신이 나는 사람이다. 추위에 약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때 그나마 내가 가장 살아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무더운 날씨를 핑계로 옷을 덜 입고, 생각을 덜 하고, 책임을 덜 질 수 있는 계절. 굳이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피부로 와닿는 기분 좋음들 - 부지런히 걷는 맨다리들, 빗소리, 해가 길어 느껴지는 여유, 자꾸만 믿고 싶은 청춘이 - 나를 들뜨게 하곤 했다. 


이제는 물리적인 여름을 기다리는 대신
내 안의 여름을 풍성하게 키워내고 싶다. 

꽃샘추위에도 내가 뜨겁도록, 점잖은 가을에도 무모하게 시도하도록, 다시 추워져도 언제고 얼음을 녹일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작년은 훌륭하게 혼란스러웠고, 올해까지 이어지는 그 소용돌이 위로 돛단배를 띄워본다. 스스로를 수장시키던 수많은 질문들에서 눈을 돌리고 대신 현재의 감각과 경험에 집중할 것이다. 시제와 실체가 불분명한 감정들에는 조금 무뎌질 거고, 다른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해 살 테다. 무엇을 하든, 나는 지금 즐거운가?라는 질문을 던질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더 즐거울 궁리를 할 거다. 이런저런 실수를 저지를 거고, 어설프게 수습할 거고, 실패할 거고, 그 끝에 건진 기쁨을 최대한으로 즐길 것이다. 


이제야 제가 쓰고 태어난 껍데기가 조금 편안해진 나는 드디어 인생에 뛰어들 준비가 된 마음으로 다이빙대 위에 선다. 아마 여전히 마스크가 필수일, 그러나 회복의 기미를 보이는 2021년이 푸른 여름 바다처럼 일렁인다. 


skidmorecontemporaryart.com


Happy New Yea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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