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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빈공방 Feb 04. 2021

책을 읽지 않는 남자를 만나보았다

함께 책을 읽으며 끝내주는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남자가 있고,

책 읽는 내 옆을 묵묵히 지키는 남자가 있다. 축구를 보든 잠을 자든 나를 구경하든 하면서.

타고난 책벌레이자 수다쟁이인 나는 본래 전자에 더 강렬하게 이끌렸다.

형이상과 만약의 영역으로 함께 떠날 수 있는 사람에게 내 시간을 할애하고 싶었다.


그런데 나보다도 책을 많이 읽던 남자(A)와 사귀었을 때보다

데미안 한 권을 두 달에 걸쳐 근근이 읽어내는 남자(B)와 만나는 요즘,

책을 대하는 내 태도가 더 마음에 든다.


어릴 때는 책 속의 세계로 완전히 빠져들기 위해서 책을 읽었다면, 회사원이 되고 난 이후에는 누군가를 감명시키기 위해서 혹은 '책을 읽는 나'라는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독서를 했던 것 같다. 책을 계속 곁에 두고 읽기는 했지만 - 내재에서 외재로, 희열에서 의무감으로, 무언가 근본적인 것이 변질되어 있었다. 특히 A와 만날 때는 멋들어진 단어를 베껴오기 위해서 책장을 펼친 날들이 많았다. 마음의 결, 공명, 스키마 같은 단어들을 쓰는 사람이 되기 위해. '지적이고 어딘가 꼬여있고 취향이 분명한' 나를 좋아한다는 사람에게 난 언제나 고전을 원서로 읽고 최은영의 신보를 찾아보는 애인이고 싶었다.


나도 비슷한 이유들로 A를 좋아했다.

추운 겨울날이면 에스프레소에 어울리는 책을 찾아 추천해주고, 생일에는 [The Picture of Dorian Gray] 펭귄 클래식 에디션을 사다 주던 사람.


그와 나는 알랭 드 보통과 오스카 와일드,
신경숙의 문장을 빌려 애정을 표했다.

문장으로 밥 벌어먹고사는 사람들이 심혈을 기울여 고른 단어들은 그와 나의 사랑을 더 특별한 것으로, 거쳐온 우울을 더 필연적인 것으로, 향해갈 지향점을 더 세련된 것으로 만들어주었다.

둘도 없는 이상주의자인 내게 있어 문학적인 맥락을 공유한다는 것은 연애의 필수조건과도 같았다.

그래서 A가 취직한 이후 책을 읽지 않게 됨으로 인해 조금씩 비어가던 순간에 다다라서도, 나는 자꾸만 책을 사서 모았고 그에게도 책을 선물했다. 읽어. 잊지 마. 하는 다소 처절한 마음으로.

책이라는 둘 사이의 언어가 어떤 소수민족의 그것처럼 사라지는 것이 공포스러웠다.

결국 대학교 도서관에서 세상으로 나오는 과정에서 품에 안은 책을 다 놓아버린 그와,

책과 둘만 남겨지면 곧잘 외로움에 휩싸여 몇 장 넘기지도 못하고 책을 덮어버리던 나는 -

어느 책에도 남기지 못할 문장들을 끝으로 둘의 서사를 종결하였다.



다른 남자를 만났다. B.

집은 책 몇 권 없이 휑하고, 리디북스로 자기 계발서나 주식 관련 서적만 가끔 보는 사람이다.

거의 매일 야근을 하고, 시간이 남으면 운동을 하고 영화를 볼지언정 책을 읽지는 않는다.

나는 처음에 그게 견딜 수가 없어서 그에게 몇 번이나 독서를 강권했다. 부탁도 하고 꼬셔도 봤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장난스레 받아쳤다. "책 많이 읽어서 네가 어떻게 됐는 지를 봐."

나는 뭐래, 하다가도 곧 맞아 그렇지 - 하고 수긍해버렸다. 확실히 정신은 B 쪽이 월등히 건강하니까. 그리고 쉬이 설득당하지 않는 그의 성격을 잘 아는 만큼, '애인과의 독서 클럽'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대신 그의 옆에서 나 혼자 책을 읽는 대안을 마련했다. 그의 어깨를 목받침 삼아, 배 위에 걸쳐진 두터운 팔뚝을 독서대 삼아. 그리고 내가 그 시간을 즐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남자를 곁에 두고 독서를 하고 있노라면 읽고 있는 책에 대해 부차적인 생각을 하지 않게 된다.


비가 오고 있었다라기보다는 아주 가늘고 매우 싸늘한 안개가 엉켜서 풍경을 온통 물의 장막으로 뒤덮고 있었다.


하는 장 그로니에의 문장을 보면서 표현력을 나노 단위로 평가하거나, 사용된 단어의 수려함에 대한 동의를 구하려 하거나, 장 그로니에가 피웠던 담배 종류를 궁금해하지 않는다.

이 문장을 '어떻게' 좋아하고 싶은지, '왜' 좋아한다고 '설명'해야 할 지를 고민하지 않는다.

그저 감탄한다. 내 머릿속에 그 날의 풍경을 그림처럼 그려준 그로니에 아저씨께 내적 박수를 보낼 뿐이다.

옆에서 유튜브를 보는 B에게 구태여 보여주지도 않는다. 공감이나 반응을 기대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내가 읽는 모든 문장은 다 내 것이 된다.

오롯이 나의 독서, 나의 양식이다.


활자보다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 옆에서 - 역설적으로 가장 자유롭게 책에 몰두할 수 있다.

SNS에 과시할 생각 없이 오직 나를 위해 차린 투박한 밥상처럼, 재가공할 예정이 없는 책 읽기는 담백하고 건강하다. 생각보다 알맹이가 부실한 내 사유를 부풀려 과시하거나 무리하여 깨달음을 창출해낼 필요가 없다. 책은 책대로 읽고 삶은 삶대로 살면 된다. 잊고 있던 독서의 맨얼굴을 마주한 기분이다.



물론, 여전히 A가 떠오르는 순간들은 있다.

혼자 보기 아까운 문장을 마주하거나, 빈티지한 디자인의 책갈피 세트를 발견하거나, 좋아하는 아티스트가 에세이집을 냈을 때. 책 그 자체보다는 책이라는 오브제를 둘러싼 것들이 나를 즐겁게 할 때면 말이다.

뭐랄까, 내가 그를 좋아했던 방식과 비슷하달까.

그 사람을 좋아한 것 이상으로 그와 내가 공유하던 세계관을 좋아했다. 도달하지 못할 아름다운 이상과, 그 괴리를 못 본 척하는 의도된 순수함을. 비싸고 예쁜 책들을 (심지어 읽지도 못할 제4의 외국어로 된 것도 있었다) 사다가 책장에 꽂아두고 몇 년 동안 열어보는 일 없이 흐뭇해만 하는 귀여운 허영을.


그러나 나를 기쁘게 하는 방식이 꼭 그것만이 아니었나 보다.

B는 내가 좋아하는 책의 초판본 한정판을 사다 줄 사람은 아니어도, 책을 읽고 있으면 조용히 옆에서 어깨를 주물러주고 입 속에 프로틴 셰이크를 넣어주는 사람이다. (아예 다른 종류의 낭만일지도)

피부에 닿는 감각과 운동하며 흘리는 땀의 가치를 믿고, 현실의 나도 책 속으로 도망치는 나도 한결 같이 취급하는 사람. 그래서 그가 나를 좋아하는 까닭이 '지적이고 창의적이어서'가 아니고 앞뒤도 근본도 없는 '귀여워서'라는 - 정말이지 틀린 - 이유더라도 나는 꽤 만족하는 중이다.


B와 속초에 갔을 때 코스의 일부로 '문우당서림'이라는 유명한 서점을 찾은 적이 있다.

예상보다도 훌륭한 큐레이션에 정신을 놓고 10만 원어치 책을 집어 들고 있을 동안 그는 벽에 붙은 '이 달의 문구' 들을 사진으로 찍으며 헐렁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잠시 못마땅해하다가 이내 신경을 끄기로 하고 나만의 서점 탐방을 즐겼는데, 마침내 결제를 하려고 보니 거진 한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시간 가는 줄 몰랐다며 미안해하는 내 옆에서 그는 그저, 네가 좋아하는 장소에 와서 다행이라고 했다.

네가 보고 싶어 했던 바다는 생각보다 너무 흐리고 작지 않았냐며.


요즘은 [소유냐 존재냐]을 읽고 있다.

에리히 프롬의 책을 읽기 위해서는 독한 술 혹은 커피와 오기에 가까운 끈기가 필요한데, 근 몇 년간 내게 그런 파이팅은 도무지 찾아오지를 않았었다. (비슷한 연유로 니체와 움베르토 에코 읽기를 자주 포기했었다.)


"만약 소유가 곧 나의 존재라면 나의 소유를 잃을 경우 나는 어떤 존재인가?"라는 광활한 질문에 대한 몇 백 페이지 짜리 정언은 아무리 노력해도 도무지 소화되지가 않더라. 특히 근 3년 정도는 소란으로 가득한 마음, 그리고 내 생각을 일일이 공유하고 확인받던 존재의 타락과 (마침내는) 부재가 독서에의 동기를 꺾어놓았었다.


그런데 요 몇 주, 어둑한 방에서 세상모르고 단잠에 빠진 남자를 옆에 두고 아이폰 미니의 작디작은 화면으로 읽는 에리히 프롬은 몇 번이고 밑줄을 긋고 싶은 문장들을 외쳐대고 있었다. 아니 아저씨 이런 분이셨어요?  세 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책의 반을 씹어 삼키고 나니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였다.





타인이 아닌, 오로지 나를 향한 독서가 내게 돌려준 집중력이었다.

한껏 집중해서 읽던 책을 내려놓고 부스럭거리면 그새 품도 숨도 따뜻해진 남자가 긴 몸을 늘이며 기지개를 켠다. 책 읽고 있었어? 하고 웅얼거리는데, 마치 '잘 놀다 왔어?'라고 물어보는 것만 같다. 나는 다녀왔어,라고 속으로 대답하며 그의 품으로 파고든다. 이 사람과 나의 언어는 책이 아니어서 이 관계에서 나는 독서를 희생시킬 필요가 없다. 우리는 정다운 일상의 단어로 하루를 더듬어보고 저녁으로는 쌀국수를 시킨다.


이렇게,

책 읽지 않는 남자와의 연애를 기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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