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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혜선 Dec 29. 2020

해체된 아름다움

<마르지엘라>와 마르틴 마르지엘라


왜 마음이 바뀌었을까? 처음엔 의아했다. 패션 디자이너 마르틴 마르지엘라(Martin Margiela)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가 개봉된다고 했을 때 스친 생각이다. 마르지엘라는 흔히 말하는 ‘얼굴 없는 디자이너’다. 패션 브랜드는 특히 디자이너의 스타성에 힘입어 성장한다. 한데 그는 기존의 성공 방식과는 정반대의 행보를 보였다. 컬렉션에서조차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고, 캣워크를 걷는 모델들의 얼굴은 복면으로 가렸다. 대중이 옷에만 관심을 가져주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2008년 9월 29일, 파리에서 메종 마르틴 마르지엘라(Maison Martin Margiela) 20주년 기념쇼가 열렸다. 그날 저녁, 마르지엘라는 돌연 패션계를 떠난다. 한창 활동하던 당시 그는 모든 인터뷰를 거부했다. 여전히 그의 얼굴을 확인하려면 수고로운 인터넷 검색 과정을 거쳐야 한다. 어느 매체에서는 마르지엘라가 ‘그’인지 ‘그녀’인지 혼동하더라. 30여 년간 베일에 싸여 있던 그가 어떤 연유로 영화 출연을 결심한 건지, 무엇이 그를 변하게 만든 것 인지….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를 향한 신비로운 감성이 깨질까 영화를 보는 것이 조금은 망설여졌다.

 

1988년부터 시작된 그의 컬렉션은 혁명이었다. 마르지엘라를 두고 ‘20세기 패션계의 앤디 워홀’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가 기존 의복 관습을 파괴한 해체주의자였기 때문이다. 1957년생으로 앤트워프 왕립예술학교에서 패션을 공부했으며, 파리에서 장 폴 고티에(Jean Paul Gaultier)의 어시스턴트로 경력을 쌓았다. 이후 친구 제니 메이렌스(Jenny Meirens)와 함께 메종 마르틴 마르지엘라를 창업해 40여 회의 도발적인 컬렉션을 선보였다. 에르메스 같은 명품 브랜드와 협업하며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그리고 절정의 순간, 그는 사라졌다. 



종종 아름다운 것들을 지키며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마르지엘라는 아름다운 의상의 정답이라고 할 법한 모든 것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의 미적 가치는 기존의 아름다움을 분해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에게 ‘분해’란, 옷을 뒤집어 입거나 절개선, 미완성 부분을 과감히 보여주는 걸 말한다. 또한 깨진 접시나 비닐봉지 등 의외의 재료로 옷을 재단하는 것을 즐겼다. 리사이클링이라는 개념을 최초로 의복에 도입하여 무한한 재생성을 고민한 디자이너다. 그가 얼굴을 알리지 않았던 것처럼, 옷에도 자신의 이름을 넣지 않았다. 텅 비어있는 라벨, 암호로 가득한 라벨은 어느덧 마르지엘라의 상징으로 통한다. 



화이트는 시간의 흔적을 드러내는 연약한 색이다. 영화를 보면 그는 화이트를 두고 “자아를 투영하는 색”이라고 말한다. 메종 마르틴 마르지엘라 설립 초기부터 사무실의 벽과 가구·집기 등 모든 것은 하얀색이었다. 칠할 수 없는 부분은 흰 패브릭을 덮을 정도였다. 그렇게 수년간 일을 하다 보니 그를 지탱하던 자유로움은 휘발됐고, 스트레스는 겹겹이 쌓였다. 순수한 관점으로 세상을 보던 그는 내면의 색이 점점 변질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유명해질수록 하고 있는 일이 분산될까 두려웠다. 끝내 자신의 브랜드가 대기업에 인수되자, 그 시스템 속에 더 이상 자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홀연히 사라진 것은 자신을 지키기 위한 선택이었다. 영화의 라이너 홀체머(Reiner Holzemer) 감독은 “마르 지엘라가 그의 이야기를 직접 얘기해주는 첫 번째 사람이 되어 행복하다”고 했다. 얼굴 없는 그에게는 늘 풍문이 가득했고, 이에 대한 어떤 인터뷰도 여태껏 없었다. 그런 그가 직접 젊은 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기에 뜻깊다. 비록 영화에서조차 얼굴을 드러내진 않지만, 깊고 강한 목소리로 자신이 달려온 시간을 되돌아 걷는다. 업계를 떠난 지 어느덧 12년, 지독했던 압박감에서 한결 자유로워진 듯하다. 세상과 소통할 때조차 목소리를 낸 적이 없던 그이기에, 갑작스러운 영화 출연에 의아한 이들이 있을 수도 있겠다. 홀체머 감독이 말하길, 그는 화나 있었다고 한다. 점점 그를 모방하는 디자이너들이 늘고 있는데, 그 모조품들의 오리지널은 이미 30년 전에 나왔다는 걸 영화를 통해 밝히고 싶었던 것이다. 


미디어가 발달되면서 예술가들이 해야 하는 일이 점점 늘어난다. 대중과 소통하지 않으면 본연의 예술성은 쉽게 잠식되고 만다. 이리도 까다로운 세상에서 예술가가 지켜야 하는 것은 대체 무얼까. 이 영화는 어렸을 적부터 품은 꿈을 지켜온 한 사람의 이야기다. 급변하는 환경 속에서 가장 중요한 걸 지키고자 했던 마르지엘라. 지금 그가 후회하는 건 단 하나다. 마지막 쇼가 있던 저녁, 동료들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떠난 것. 그는 마침내 입을 뗀다. 꿈을 이룰 수 있게 해준 모두에게 감사하다고.


글 _ 장혜선

사진 _ 하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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