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이프 오브 뮤직: 알렉상드르 데스플라>
음악으로 기억되는 영화가 있다. 피터 웨버(Peter Webber) 감독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가 유독 그랬다. 네덜란드 화가인 요하네스 페르메이르(Johannes Vermeer)가 그린 동명 그림을 소재로 한 작품으로, 한 소녀가 천재 화가의 집에 하녀로 들어가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둘은 애틋한 기류를 형성하며 은밀하게 그림 작업을 이어가는데, 이때 영화의 주제곡인 ‘그리트의 테마(Griet’s Theme)’가 흘러나온다. 신비한 플루트 선율은 소녀의 요동치는 감정과 맞닿는다. 이 음악은 뇌리에 날카롭게 각인되어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그림만 봐도 귓가에 맴돌 지경이다. 음악을 만든 알렉상드르 데스플라(Alexandre Desplat)의 존재는 좀 더 후에 알게 됐다.
영화 <탄생Birth>의 오프닝 음악에는 묘한 끌림이 있다. 특별한 이야기 없이 작품 초반부터 음악만으로 영화에 집중하게 만든다. 데스플라의 음악은 마치 영화 시나리오와 같이 이야기를 전개한다. 영화 <르누아르Renoir>의 질 부르도스(Gilles Bourdos) 감독은 “어떤 순간에는 데스플라가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 음악을 통해 개입한다”고 느껴진다 했다. 오랫동안 데스플라와 호흡을 맞춰온 자크 오디아르(Jacques Audiard) 감독은 “데스플라의 음악을 통해 영화가 확장된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했다.
데스플라의 이름이 한국에 알려진 건, 아마도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The Grand Budapest Hotel)>의 영향이 클 것이다. 그는 오래전부터 할리우드에서 활약했지만 국내에선 유독 인지도가 없었다. 웨스 앤더슨(Wes Anderson) 감독의 영화가 국내에서 화제가 된 것도 흔치 않은 일인데,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흥행으로 음악을 맡은 데스플라까지 덩달아 세간의 이목을 이끌었다. 그림 같은 영상미에 더해진 데스플라의 음악은 영화의 색채를 부각시킨다. 이 영화로 그는 2015년 아카데미에서 음악상을 받았다. 첫 아카데미 트로피를 거머쥔 지 얼마 지나지 않아 2018년에는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The Shape of Water)>으로 두 번째 아카데미 음악상을 수상하는 성과를 거뒀다. 얼마 전 타계한 영화음악의 거장 엔니오 모리코네(Ennio Morricone)도 아카데미 음악상은 단 한 번 수상했을 뿐이니, 현재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데스플라의 이력은 앞으로도 주목할 만하다.
다큐멘터리 영화 <셰이프 오브 뮤직: 알렉상드르 데스플라(In the Tracks of Alexandre Desplat)>는 그에 대한 첫 기록물이다. 이 다큐멘터리에는 그의 비밀스러운 작업 방식이 등장하는데, 영화 한 편을 완성하기까지의 모습이 파편적으로 나열된다. 데스플라는 팀을 꾸리지 않고 모든 작업을 혼자 해낸다. 영화에는 작업실에서 홀로 음표를 그리는 그의 모습이 등장한다. 팀으로 작업한다면 가족도 더 자주 만나고 휴가도 많이 가겠지만, 원하는 대로 곡을 쓰지 못하는 것이 그에겐 훨씬 괴로운 일이라고 한다. 고독감이 가득한 작은방에는 꽤 오랫동안 피아노와 데스플라만 존재한다. 골방에 숨은 자신을 기다려주는 단 몇 사람만 옆에 있다면, 세상은 그 자체로 충만한 법이다.
데스플라의 음악을 지탱해주는 몇몇 사람들의 인터뷰를 영화에서 만날 수 있다. 그는 뼈대가 되는 선율을 완성한 후에는 작업 파트너들에게 의존한다. 곡을 완성한 후 동료 첼리스트 뱅상 시갈(Vincent Ségal)에게 전화해 작업실로 부른다. 두 사람은 조그만 작업실에서 즉흥 연주를 하며 적합한 악기 소리를 찾아간다. 그러다보면 새벽 5시가 돼서야 잠들기 일쑤. 배우자인 도미니크 레모니에르(Dominique Lemonnier)가 리더로 있는 트래픽 퀸텟(Traffic Quintet)도 데스플라에겐 중요한 존재다. 1995년 창단된 이 팀은 데스플라의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 녹음에 계속 참여해왔다.
흔히 음악의 분위기로 작곡가의 성격을 유추하기도 한다. 예컨대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으면 장난스러운 면모를, 말러의 음악을 들으면 완고한 의지를 엿볼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환상성이 강한 데스플라의 음악을 듣다 보면, 이 곡을 쓴 사람은 대체 어떤 사람일지 호기심이 일어난다. 또 뭔가 괴팍한 사람일 것 같다고나 할까. 한데 이 다큐멘터리를 보면 그의 유연성에 새삼 놀란다. 데스플라는 캐스팅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애초에 작품을 거절한다. 하나의 영화를 만드는 건 함께 배를 타고 떠나는 여행이니 원치 않는 사람과 오랜 시간 한 배로 항해하는 건 지독히도 끔찍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는 협업의 중요성을 재차 강조한다. 혹여 영화감독이 음악에 대한 불만을 토로해도 차분히 귀담아듣는다. 그의 작업 과정을 살피는 것은 한 편의 스릴러를 보는 것과 비슷하다. 결말에 가까워져도 당최 마음을 놓지 않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험한 길을 면밀히 주시하는 신중함을 그를 통해 배운다. 이토록 사려 깊게 탄생한 음악이기에 기억 속에 강렬하게 머무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