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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혜선 Aug 25. 2020

투쟁 끝에 남는 것

<어 굿 맨> & 빌 티 존스

텅 빈 공연장, 그는 시름에 잠겨 있다. 어떻게 이 객석을 채울 수 있을까. 카메라는 미국의 안무가 빌 티 존스(Bill T. Jones)와 그가 이끄는 아니 제인 컴퍼니(Arnie Zane Company)가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 탄생 200주년 기념 공연을 준비하는 과정을 따라 간다. 존스에게 링컨은 영웅이었다. 미국의 이주 노동자 가정에서 자란 그는 성장하는 동안 늘 생각했다. 백인이 주류를 이루는 곳에서 흑인은 신중해야 한다고. 어린 시절 그에게 링컨은 자신 이 무조건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백인이었다. 



그는 노예 제도를 다룬 이 작품을 사람들이 과연 보러 올지, 어쩌면 상업적인 공연처럼 꾸며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작품은 시작부터 노예를 사고파는 비극적 공간을 재현한다. 150여 년 전만 해도 사람을 사고파는 장사가 버젓이 존재했다. 이를 담아내는 무용수들의 움직임은 상상만으로도 참혹하지 않은가. 


그동안 존스는 인종에서부터 동성애까지 인간의 정체성과 맞닿은, 우리 시대가 지닌 과제를 작품에 담아왔다. 극장과 현실 사이의 경계를 넘나들며 1백여 편의 작품을 선보였는데, 이 영화에선 한 편의 작품을 무대에 올리기까지의 심적 변화를 보여준다. 그는 잠을 설친다. 초기에는 자신이 링컨의 이야기를 담을 만한 그릇이 되는지 걱정한다. 링컨 암살 후 시중에는 관련 책만 1만 5천 권 이상 출간됐다. 자신의 작품이 진부한 이야기가 될지, 사 실적인 이야기가 될지, 당최 확신이 없다. 지인들은 무용 작품에서 명확한 목소리를 전달하는 것이 얼마나 낯선 일인지 우려를 표한다. 걱정을 안고 그는 방대한 자료를 샅샅이 살피는데, 파헤치면 파헤칠수록 링컨의 또 다른 면모를 발견하게 된다. 


“나도 내 영웅의 이런 면까지는 알고 싶지는 않았어.” 


링컨은 영웅이 아니었다. 백인 우월주의자였던 링컨의 기록을 보면서 존스는 자신 안에 존재했던 편견을 짚어본다. 그는 대중이 알고 있는 정보를 바로잡고, 자신도 링컨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작업 말미에 이를수록 링컨과 미국에 대한 감정은 연민으로 바뀐다. 마침내 그는 그저 ‘내가 살고 싶은 세상’을 담겠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 세상은 리더의 역할이 중요한, 원칙에 대해 논의할 수 있는 사회다. 그렇다면 그는 어떤 리더일까. 주변 사람들은 그를 두고 “불같은 사람”이라 평한다. 존스는 자신의 단원들을 한계까지 끌고 간다. 명확한 걸 좋아하는 그이기에 무용수들에게 서슴없이 지적하고, 때로는 다그친다. 동작을 만들다 보면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 일쑤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변덕을 잘 알고 있다. 잘 모르면 모르겠다고, 잘못했을 땐 미안하다고 솔직히 말한다. 

“그래. 이 세상은 거지 같지. 근데 위대한 사람은 이렇게 말하는 거야. 너도 할 수 있어! 공연이 끝났을 때 이 메시지가 남았으면 해. 나와 함께 버텨줘. 알았지?” 


지난 5월, 비무장 흑인이 백인 경찰관 손에 목숨을 잃었다. 2012년 미국 사회를 달궜던 트레이본 마틴(Trayvon Martin) 사건 이후에도 미국 경찰들은 꾸준히 흑인을 상대로 폭력을 행사했다. 이번 사건은 현장 목격자가 영상을 소셜 미디어에 올리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많은 이들이 분노했다. 존재 자체만으로 불평등을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하루에도 몇 번씩 이 잔혹한 장면을 떠올렸을 것이다. 1863년 링컨 대통령의 노예 해방 선언, 1964년 인종 차별을 금지하는 연방 민권법 제정이 이뤄졌지만, 여전히 차별은 존재한다. 6월에 이르러 미국 전역으로 항의 시위가 확산됐고, 일부는 폭력 시위로 번지기도 했다. 이 극단적 투쟁의 끝에는 대체 무엇이 남을까.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가 돼야 한다고 링컨은 말했다. 하지만 국민들은 서로를 끔찍이 싫어한다. 빌 티 존스 역시 링컨이 남긴 말에서 무엇이 빠졌는 지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풀리지 않는 숙제에 시름하던 그는 우연히 기차가 지나가는 모습을 발견한다. 그리곤 마침 내 무릎을 친다. 민주주의로 가는 과정은 마치 기차 여행과 같았다. 때로는 경로를 벗어나기도 하지만 그래도 꿋꿋이 한길로 가는 것. 끝까지 가야지만 아름다운 결과를 얻어낼 수 있는, 모든 투쟁이란 그런 것이다. 


“링컨이 남긴 유산 때문에 우린 고단한 여정을 계속 이어가고 있죠.” 


공연 시작 5분 전, 존스는 단원들을 따뜻하게 안아준다. 이후 백스테이지에서 공연을 지켜보는 그의 눈동자는 짙게 가라앉는다. 고단한 여정을 마쳤지만,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아 보인다.


글_ 장혜선

사진_ Kartemquin Fil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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