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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혜선 Jan 26. 2021

발레리나 김지영

내려오는 길목에서



ⓒ백상현(fij스튜디오)/월간객석

가히 아름다운 봄이었다. 김지영이 국립발레단에서 춤을 춘 모든 시간을 구태여 비유하자면 말이다. 초여름의 길목에서 그는 조용히 마지막을 준비했다. 지난 6월 23일, 김지영은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로 오르는 마지막 전막 발레 ‘지젤’을 마쳤다. 덤덤히 무대를 이끌던 그는 커튼콜에 이르자 어깨를 들썩이며 울었다. 뒤에 서있던 후배 무용수들도 눈물을 훔쳤고, 관객의 눈시울도 덩달아 붉어졌다. 그 밤, 많은 이들이 잠을 설쳤으리라. 그렇게 한국 발레사의 한 장을 넘긴 느낌이었다.

김지영은 1997년 19세 나이에 국립발레단 최연소 단원이 됐다. 데뷔 무대 ‘노트르담의 꼽추’에서는 강수진과 함께 에스메랄다 역에 캐스팅되어 화제를 모았다. 이듬해에는 수석무용수로 승급했다. 2002년 그는 돌연 네덜란드 국립발레단 입단 소식을 전했다. 네덜란드 국립발레단에서 수석무용수로 활약하다가 2009년 ‘신데렐라’로 국립발레단에 복귀했다. 국내에서 김지영의 춤을 다시 볼 수 있는 것은 큰 기쁨이었다. 

퇴단 공연을 마치고 어언 한 달의 시간이 흘렀다. 그새 초복이 지나 무성한 여름이 됐다. 인터뷰를 위해 만난 김지영은 차근차근 새 계절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가 내려오는 길목에는 푸른 기운이 감돌았다.




퇴단 공연이 끝나고 커튼콜에서 어깨를 들썩이며 울더라. 그 울음의 형태가 궁금했다. 울음에도 여러 형태가 있지 않은가. 후련함, 아쉬움, 안도, 기쁨… 등.

커튼콜에서 혼자 남은 내 뒤로 영상이 나왔다. 처음에는 괜찮았는데 내가 어릴 때 춤추던 모습이 나올 때부터 울음이 터졌다. 어릴 적의 나를 보고 놀랐다. 옛날 내 모습에 대한 그리움이었을까. 강수진 단장님이 꽃을 들고 무대에 걸어 나오는 순간에도 되게 많이 눈물이 나왔다. 밑을 보니 오케스트라가 연주하고 있었다. 나를 위해 퇴근도 안 하시고… 고마운 마음이 밀려왔다.


‘지젤’ 이후에도 여전히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지난주에는 성남아트센터에서 열린 ‘SCM 코리아 발레 갈라 시리즈’에 섰다. 이제는 조금 쉴 수 있나.

긴장을 늦추지 못하고 있다. 어제도 발레단에서 클래스를 했다. 이번 주 일요일부터 3주 동안 러시아로 바가노바 메소드 연수를 다녀올 예정이다. 국립발레단 발레마스터 박기현과 이슬비 단원과 함께 간다. 차라리 발레단에 다닐 때는 휴가에 맞춰서 푹 쉴 수 있었는데, 지금은 뭘 하고 있어야 마음이 편하다.퇴단 공연으로 ‘지젤’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언젠가 김지영은 말한 적이 있다. ‘지젤’은 참 떨리는 작품이라고. 첫 등장 때부터 너무 긴장된다고. 지젤을 두고 오르지 못한 나무 같다고도 표현했는데. ‘지젤’은 늘 풀지 못한 숙제 같았다. 마지막으로 꼭 도전하고 싶었다. 


무대는 만족스러웠나.

냉정하게 말하면 스스로 만족하지는 못했다. 그런데 공연은 나 혼자 만드는 게 아니더라. 그날 나를 비롯한 모든 무용수, 오케스트라, 발레단 직원들 심지어 관객까지 한마음이었다. 그래서 이번 공연은 완벽했다고 말하고 싶다.


인간적인 무용수, 김지영

발레리나 김지영의 시작은 이미 유명하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친구의 영향으로 간 발레 학원에서 선생님의 칭찬이 지금의 김지영을 있게 했다. 이후에도 칭찬은 김지영을 계속 춤추게 했나. 

학원에서 첫 칭찬을 받고 발레를 계속하게 된 건 맞다. 그런데 한 달 뒤에 클래스를 하다가 선생님이 다리 좀 모아보라고 하셨다. 다리를 모았는데 선생님이 다리 사이로 기차가 지나갈 것 같다고 하더라. 어린 나이에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른다. 발레를 하면 휜 다리를 고칠 수 있다고 해서 더 열심히 했다. 그동안 못한다는 말도 많이 들었고, 캐스팅도 잘려 보고, 무대에서 넘어져도 보고. 이러한 많은 경험들이 나를 춤추게 했다.


2013년 본지(월간객석) 인터뷰에서 춤을 추기 때문에 행복하기도 하지만, 괴로울 때가 더 많다고 했다. 어디에선가 춤은 나에게 축복이기도 저주이기도 하다고 했다. 무엇이 김지영을 그토록 기쁘게, 괴롭게 했는지.

시기마다 춤출 때 느끼는 감정이 달랐다. 옛날에는 기쁜 일이 많았다. 무대에 오를 때, 박수를 받을 때, 동작이 잘 될 때…. 요즘은 어느 공간이든 춤추며 땀 흘릴 때가 가장 행복하다. 몇 년 전부터는 몸이 많이 아프다. 특히 허리와 아킬레스건이 제일 아프다. 이제는 고질병이 된 것 같다. 뛰고 싶은데 아파서 동작이 잘 안되면 괴롭다.


김지영에게는 참 별명이 많다. 누구는 지젤이라고 하고, 누구는 백조, 키트리, 줄리엣이라고 한다. 그만큼 다양한 캐릭터를 소화하는 무용수였다. 스스로 느끼기에 가장 잘 어울리는 배역은. 

줄리엣. 줄리엣은 다른 발레 캐릭터에 비해 좀 더 인간적이다. 반면 지젤은 인간적이지 못하다. 그렇게 처량하게 배신당했는데 어떻게 용서를 하는지… 너무 순진하다. 솔직히 나랑은 잘 안 맞는다. 별로 이해하고 싶지도 않다. 그런데 줄리엣은 이해 가능한 캐릭터이다.


무용수 초기에는 합이 잘 맞는 안무가를 꼭 만나보고 싶다고 했는데. 

김용걸 안무가와 하는 작업들을 좋아한다. 그분이 참 그렇다. 막 사람을 끌어주는 느낌이랄까. 내가 네덜란드 국립발레단에 있었는데도 킬리안 작품은 해보지 못했다. 국립발레단에서 조만간 킬리안 작품을 올릴 예정인데, 단원들이 연습하는 모습을 보니 아쉽더라.


이제는 경희대 교수로 강단에 설 예정이다. 국립발레단 부설 발레 아카데미에서도 아이들을 가르친 경험이 있다. 발레는 특히 나이에 민감한 예술이다 보니 아이들과 대학생을 가르치는 교육법이 많이 다를 것 같은데.

어린아이들은 테크닉을 잘 잡아줘야 한다. 대학생의 경우는 프로 입문 전이니 조금 수월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멘탈을 잘 잡아줘야 한다든지 다른 식의 어려움이 있을 것 같다. 아직은 대학생들을 겪어보지 못해서 조금 두렵기도 하다. 그래서 이번에 러시아 연수를 계획했다. 바가노바 메소드를 배우면 아이들을 가르치는 데 있어서 체계적으로 접근하게 될 것이다. 어릴 때부터 발레를 배워왔지만 늘 시키는 대로 해서 정리가 잘 안 되어 있다. 내가 어떤 동작을 왜 그 나이 때 배웠는지 등을 정리해보려고 한다.

 

국립발레단과 함께 이룩한 명성


김지영은 국립발레단의 성장을 가장 밀접하게 지켜본 무용수이기도 하다. 19세에 입단할 때와 지금의 국립발레단은 무엇이 가장 다른가. 

우선 예산의 규모겠지. 예산이 늘어나면서 작품의 규모와 단원들에 대한 대우가 달라졌다. 처음 국립발레단에 입단했을 때는 토슈즈도 우리 돈으로 사서 신었다. 부수적이긴 하지만 이런 식으로 무용수들이 좋은 환경에서 춤을 추게 되면서 점차 단체도 발전했다. 그러면서 레퍼토리도 다양해지고 무용수 수준도 높아졌다. 이전에는 관객이 별로 없었다. 지금은 국립발레단 티켓을 사려고 하면 매진이어서 구하기 어렵지 않은가. 20년 사이에 관객층이 많이 달라진 것 같다.


발레단이 이전과는 뭔가 다르게 흘러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던 시기가 언제인지. 

2000년 국립발레단이 재단법인 체제를 갖추며 예술의전당에 왔다. 그때부터 레퍼토리가 고급화되면서 사람들이 관심을 가졌다. 사실 국립발레단이 대중화를 모색하기 시작한 건 1997년부터다. 1997년에 국립발레단은 해설이 있는 발레 공연을 열었다. 지금은 해설 공연이 많아졌지만 그때는 생소했다. 얼마 전에 당시 공연을 기획한 직원을 만났는데 금난새 지휘자의 해설이 있는 음악회를 레퍼런스 삼았다고 하더라. 최태지 단장님은 무용수들이 춤출 수 있는 무대가 별로 없으니 무엇이든 공연을 만들고 싶어 하셨다. 대작을 전막으로 올리면 예산이 많이 드니까 이러저러한 이유로 해설이 있는 발레가 만들어졌다. 


관객 반응은 어땠나.

첫 회는 무료 공연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엄청나게 몰렸다. 나중에는 관객이 복도에 앉아서 모니터로 공연을 보더라. 그렇게 발레 대중화가 시작된 것 같다. 관객 반응이 좋으니 주요 언론에 기사가 나갔다. 점차 국립발레단이 입소문을 타면서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지원이 들어왔다. 그렇게 조금씩 바뀌고 쌓아가면서 지금까지 왔다.


혹자는 김용걸, 김지영, 김주원, 이원국의 4인방으로 국립발레단이 현재의 명성을 이룩했다고 한다. 네덜란드 국립발레단으로 떠나기 전에도 항간에 소문이 무성했다. 예컨대 주역 무용수들끼리 사이가 좋지 않다는 등. 그때에 비하면 지금의 국립발레단은 조금 잠잠한 느낌이기도 하고. 

하하. 그런가.


질문이 조금 길어졌는데, 사실 스타 무용수에 대한 열망을 말하고 싶었다. 한국 무용수들의 해외 발레단 진출은 우리 발레계에 괄목할만한 성과이다. 한편으로는 국립발레단에서 활약하는 스타 무용수들이 줄어드는 아쉬움도 든다.

내가 네덜란드 국립발레단에 갈 때만 해도 해외 발레단 정보를 얻기가 너무 힘들었다. 그런데 지금은 쉽게 정보를 접할 수 있다. 국내 무용수들이 계속해서 해외로 나가려는 이유는 당연히 더 많은 춤을 추기 위해서다. 아무래도 해외 무용단이 레퍼토리도 훨씬 다양하고 공연 횟수도 많다. 전용 극장도 가지고 있다. 우리 국립발레단도 옛날에 비하면 많이 좋아졌지만, 레퍼토리나 공연 횟수를 늘려야 할 것이다. 이것이 앞으로 국립발레단의 방향성이 되지 않을까.


한국 발레에서도 안무가 발굴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들린다. 국립발레단도 안무가 육성 프로젝트인 ‘KNB 무브먼트 시리즈’를 지속적으로 선보이고 있다. 앞으로 안무가 김지영을 기대해도 될까. 

아마도 안무가 김지영은 만날 수 없을 것 같다. 나중에 하게 될 수도 있겠지. 그런데 현재의 나는 안무에 대한 재능은 못 보고 있다. 


퇴단을 결심한 이유 중 하나로 후배들에게 더 많은 무대 기회를 주고 싶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김지영이 국립발레단에 오래 있으면 후배들이 큰 공연장에 설 기회가 줄어들기 때문이라고. 퇴단 공연 커튼콜에서 후배들이 꽃을 건넬 때 많이 울던데, 그동안 김지영은 어떠한 선배가 되고 싶었나. 

솔직히 어떤 선배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다. 내 할 일 바빠서 후배들을 신경 쓰지 못했다. 한편으로는 나에게 주어진 것들을 열심히 하면 후배들이 따라서 걸어오지 않을까 싶었다. 열 마디 말보다 한 마디 행동이 더 중요한 것처럼.후배들이 고민 상담을 하기도 했나. 기술적인 부분보다는 주로 무용수의 삶에 관한 고민일 것 같은데. 내가 나이가 가장 많으니까, 아무래도 무용수 나이에 관한 이야기였다.


국립 단체는 내부 규율이 엄격해 외부 활동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이제는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라는 타이틀을 내려놓는데, 자유롭게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음… 없다. 난 창의적인 사람이 아니다. 늘 주어진 것을 잘 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국립발레단을 떠나기가 겁나기도 한다. 국립발레단은 나에게 따뜻한 울타리가 되어 줬다. 그걸 벗어나는 게 참…. 그래서 지금 더 못 쉬는 것 같다. 긴장을 못 늦추겠다.


김지영이 없는 국립발레단. 아직은 조금 낯설다. 김지영은 정작 덤덤한데, 많은 발레 팬들이 김지영을 보낼 준비가 안 된 것 같기도 하고. 

앞으로 김지영이 그리워지면 어떡하지. 무대를 완전히 떠난 건 아니다. 9월과 10월에 광주에서 공연도 예정되어 있고. 간간이 소식을 전해드릴 것이다. 간간이 듣는 소식이 더 반갑지 않으실까?


ⓒ백상현(fij스튜디오)/월간객석


김지영이 걸어온 길

1978년 7월 26일 서울 출생

1988년 발레 시작

1996년 바가노바 발레학교 졸업

1997년 국립발레단 입단

1998년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승급

1998년 미국 잭슨 콩쿠르 여자 동상

1998년 파리 콩쿠르 김용걸과 함께 듀엣 부문 1등상

1998년 한국발레협회 신인상

1999년 대한민국 문화훈장 화관장 수훈

2001년 러시아 카잔 발레 콩쿠르 은상, 베스트 예술상

2001년 한국발레협회 프리마 발레리나상

2002년 네덜란드 국립발레단 입단

2007년 네덜란드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승급

2007년 네덜란드 국립발레단 알렉산드라 라디우스상

2009년 국립발레단 복귀

2011년 국립발레단 부설 발레아카데미 교장

2012년 러시아 브누아 드 라 당스 노미네이트

2013년 한국춤비평가상 춤연기상

2017년 제3회 예술의전당 예술대상 연기상

2017년 한국춤평론가협회 평론가상, 여자연기상

2019년 국립발레단 퇴단, 경희대 교수 부임 예정



글_ 장혜선

사진_ 백상현(fij스튜디오)


+ 월간 <객석> 2019년 8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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