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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연재 Mar 04. 2024

최악의 이별

소설<비혼이지만 하고 싶습니다> 1화

그가 무표정하면서도 도도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라디오 스튜디오를 미리 예약해 두고 녹음 준비를 하고 있던 소연은 무슨 일이냐는 표정으로 정호를 쳐다봤다.


“작가님. 우리 프로그램 개편 홍보용 스팟만 만들면 되는데 잠깐만 스튜디오 좀 쓸게요.”


‘쓰면 안 될까요’도 아니고 ‘쓸게요’라는 말에 소연의 이마에 내 천(川) 자가 그려졌다.

일주일 전에 녹음실을 예약해 둔 건데, 녹음 시간 5분을 남겨두고 치고 들어와 양해를 구하는 것도 아니고 통보식으로 말하다니, 예의라는 걸 국 끓여 먹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정호는 좋은 말로 표현하면 꼼꼼하고 나쁘게 말하자면 까탈스럽기 그지없는 피디다. 그래서 함께 일하는 사람의 진을 빼기로 악명이 높다. 그만큼 프로그램의 청취율이 잘 나와서 그의 깐깐함과 까칠함마저 능력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홍보용 스팟은 프로그램을 홍보하는 짧은 광고로 길어야 1분 정도. 분량이 짧은 만큼 그다지 시간이 오래 걸리진 않기 때문에 다른 피디가 부탁했으면 당연히 쓰라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정호가 말하는 금방이 족히 한 시간은 넘을 게 분명했다. 마침 그날은 녹음 마치고 병원 예약도 되어 있어서 더더욱 녹음실을 사수해야 했다.


“오늘은 곤란해요. 이제 바로 녹음 들어갈 거거든요. 우리 디제이도 녹음 마치고 스케줄 있다고 해서 저희도 빨리 끝내야 해요.”


소연의 거절에 정호는 너 의견은 필요없다는 듯, 원고를 테이블 위에 펼쳤다. 그러더니 소연이 일하는 프로그램 피디에게 전화를 했다.


“성 선배. 우리 잠깐 스팟 녹음 좀 할게요. 다른 녹음실은 지금 다 녹음 중이어서요. 금방 끝낼게요.”


그의 말에 담당 피디는 알았다고 했는지 정호는 소연을 보며 “됐죠?”라고 했다. 소연은 속으로 ‘역시나 재수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하며 “빨리 끝내주세요”라고 하고는 녹음실을 나왔다. 그리고 소연의 예상은 벗어나지 않았다. 1분 짜리 스팟을 녹음하는데 30분이 지나도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병원 예약 시간이 다가와서 초조한 마음에 담당 피디에게 가서 말해보라고 하니 스팟을 네 개나 녹음하니 재촉한들 듣겠느냐는 소리를 들었다. 보통 스팟은 한 개를 만들어서 한 달 정도 쓰는데, 네 개씩이나 만들다니. 소연은 지독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이미 디제이에게도 이야기를 해서 스케줄을 늦췄다고 하니 소연도 할 말이 없었다.

정호는 45분이 지나서야 녹음실에서 나왔고, 결국 그날 소연은 병원 예약을 취소했다. 다시 예약을 잡으려 하니 일주일 뒤에나 시간이 맞았다. 그 사이 별일이야 없겠지만, 끝까지 미안한 기색조차 없던 정호를 보며 소연은 속으로 한마디 내뱉었다.


‘저러니 이혼을 두 번이나 했지.’      




보호자라는 발작버튼


“보호자가 필요하다구요?”

“네. 수술을 마치고 나면 적어도 수술 당일 하루는 혼자 움직일 수가 없어요. 물론 보호자가 없는 경우도 있긴 해요.”

순간 소연의 동공에 지진이 났다.

자궁근종 수술을 해야 한다고 할 때만 해도 덤덤했다. 복강경 수술이라고 하고, 큰 병원에 다녔던 후배 말에 의하면 수술 다음날 퇴원도 한다고 해서 가볍게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술 날짜까지 잡고 방송국에 휴가를 내기까지 했는데, 보호자가 필요하다는 말에 수술을 괜히 받는다고 했나 싶은 후회마저 들었다.

작년 말부터 완경 조짐이 보였고, 그동안 근종이 자라지 않고 있었기에 안심하고 있었다. 1년에 한 번 정도 초음파로 추적 관찰만 할 뿐이었다. 늘 그 상태였고, 완경 이후에는 근종이 자리지 않거나 줄어든다는 말에 그러려니 하면서 이번에 검사를 받을 때도, 답정너처럼 “그대로다”라는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1년 사이 근종이 많이 자라서 10센티가 넘었단다. 더구나 근종이 커지면서 방광을 누르고 있다 했다. 어쩐지. 화장실을 너무 자주 간다 했더니만.

떼어내고 여성호르몬 치료를 받는 게 더 낫다는 선생님의 말에 쿨하게 오케이를 했는데, 수술을 앞두고는 그 쿨함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특히, 보호자가 없어도 될 줄 알 정도로 가볍게만 생각하던 근자감이 선생님의 말에 대책 없이 흔들리고 말았다.

보호자.

적어도 내가 잘 움직일 수 없을 때, 나를 대신해 움직이고 부축도 해줄 수 있어야 하는데 50을 앞둔 비혼의 보호자는 누구일까.

일단 가족부터 생각했다. ‘지방에서 일하는 오빠에게 부탁해? 에이, 산부인과 수술받은 여동생 간호해 달라는 건 좀 그래.’ ‘80이 넘어서 자기 몸 하나 추스르기도 버거운 엄마? 에이, 앓는 이 죽지. 자칫하면 수술받고 나서 내가 엄마를 보살펴야 할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어.’

그렇다면 친구들인데, 휴가를 빼기가 어려워서 추석 연휴를 코앞에 둔 날에 수술 날짜를 잡은 탓에 친구들에게 부탁하기도 난감했다. 지정보호자 1인만 있을 수 있고 교체도 할 수 없는 게 병원의 규칙이라는데, 명절 연휴 내내 자신의 간병에 묶을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혼자 49년을 살다 보니 이제는 혼자 무엇을 해야 하는 상황에 한숨 쉬거나 신세한탄하거나 우울해하지 않고 그냥 알아서 하는 지경에 이르렀던 소연은 이번에는 달랐다.

‘이래서 결혼을 해야 하나 봐.’

난데없는 결혼 타령이 용수철처럼 튀어나왔다.

소연은 정말 오래간만에 결혼에 대한 생각을 했다. 마흔을 넘기면서부터는 소개팅이건 맞선이건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졸졸 들어오더니 마흔다섯을 넘기면서는 그마저도 아예 끊겨버렸다. 어느 순간부터는 소연에게 “결혼해야지. 누군가 만나야지”하는 사람도 없어졌다. 이제 그런 말을 하기에는 실례라고 생각될 만큼 나이를 먹은 덕분이겠지만. 그게 지금까지는 편하다고 생각했는데, 보호자가 필요한 상황이 되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그도 그럴 것이 소연에게 있어서 ‘보호자’는 발작 버튼이었다.


자연스럽게, 소연은 몇 년 전, 갑자기 응급실에 가야 했던 상황이 생각났다.

갑자기 퇴근길에 눈 한쪽이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병원은 이미 닫은 시간이었고, 할 수 없이 약국으로 뛰어들어갔다. 소연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걸 본 약사는 그대로 소연의 눈에 시선이 꽂혔다. 그러면서 홀린 듯이 말했다.


“빨리 대학병원 응급실에 가봐야 할 것 같아요.”


그때 역시 별 일 아니라고 생각했던 소연은 약사의 표정과 말투에 몸이 굳었다. 놀라서 얼른 택시를 집어 타고 대학병원으로 달려간 시간이 대략 저녁 8시. 그곳은 이미 응급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 없는 환자들로 꽉 차 있었다. 혼자 수속을 밟고 대기를 하는 동안 사람들은 더 모여들기 시작했다. 당연히 의자를 둔 눈치 게임이 시작되었다. 대개는 보호자가 자리를 맡아 두었는데, 간호사가 호출을 할라 치면, 사람들은 가방을 놓아두던지 소지품을 놓아두는 식으로 자리를 사수했다. 이런 와중에 소연의 뱃속에선 꼬르륵 소리가 났다. 그러고 보니 점심때 떡을 한 조각 먹은 게 다였다. 그렇다고 해서 대기 중에 뭐를 사 먹으러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배고픈 건 참을 수 없는데 문제는 화장실이었다. 신호가 오는데 자리를 뺏길까 봐 일어날 수가 없었다.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호출을 하거나 자리를 뺏길까 봐 자리를 뜨지 못한 채 얼마를 동동거렸다. 자리 지키려다 망신살이 뻗칠 수도 있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화장실로 뛰어갔고, 일을 본 뒤 안도감과 서글픔이 한 번에 찾아왔다.

보호자 없는 설움이 이런 거구나..     

그리고 몇 년 뒤. 또다시 소연은 응급실에 갔다.

몸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떨리고 열이 올라서 혼자서 택시를 불러 응급실에 가는 동안 남자친구에게 연락을 했다.


“나 지금 OO병원 응급실이야. 갑자기 몸이 너무 안 좋아서 왔는데 이리로 와줄 수 있어요?”


전화도 받지 않고, 카톡 메시지에서 읽음 표시가 지워지지 않았다.

느낌이 싸했다. 하지만 일단 몸이 안 좋으니 다른 건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

혼자 응급실에 앉아 열이 많아 덜덜 떨면서 주변을 바라봤을 때, 보호자 없이 혼자 온 사람은 소연밖에 없었다. 물론 혼자 오는 경우도 있겠지만, 소연이 갔던 그날에는 그랬다. 남자친구와 연락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집에 전화를 할까 했지만 그만두었다. 그날 역시 오빠는 지방에 있었고, 엄마에게 큰 병원 응급실까지 혼자 오라고 하는 건 어쩐지 망설여졌다. 그날따라 폭우가 내리고 있는 상황이어서 더 그랬다.

누군가에게 민폐를 끼치는 건 죽어도 싫은 성격이라 자신이 견딜 수 있을 때까지는 혼자 있어보자고 결심을 했다. 그러다 갑자기 응급실에 소란이 일어났다. 한 환자의 남자 보호자가 간호사들에게 마구 소리치기 시작한 것이다.

“도대체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 거야?”


오랜 대기 시간에 화가 난 어떤 보호자가 항의를 하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단순 항의인가 보다 했는데 갈수록 목소리가 커지면서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자칫하면 몸싸움이 일어날 것 같아서 아슬아슬했다.

‘저러다 싸움이 나서 아수라장이 되면 난 어떡하지?’

‘몸이 제대로 펴지지 않고 잘 걸을 수 없는 상황에서 저 아저씨가 난동이라도 부리면 난 제대로 피할 수 있을까.’

그런 걱정들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하자, 소연은 슬쩍 자리를 옮겨야 하나 하고 옆자리를 살펴봤다. 자리가 빼곡했다. 그 순간 소연의 머리를 스치는 기시감. 몇 년 전 응급실에서 자리를 빼앗길까 봐 꾹꾹 눌러 참았던 그날, 그 시간이 생각났다. 그날 역시 소연은 그냥 앉아 있었다.

긴 대기 끝에 치료를 받고 돌아오는 길. 남자 친구에게 보낸 카톡은 여전히 읽지 않음 상태였다. 미국 출장을 간 동안 연락이 뜸하고 뭔가 말수도 줄어서 이상하던 차였다. 귀국하고 만났지만 뭔가 전 같지 않은 느낌이 들었지만, 여독이 풀린 다음에 이야기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헤어진 바로 그 주에 소연에게 이상 증세가 나타난 것이다. 결국 소연이 혼자서 응급치료를 받는 4시간여 동안 그는 묵묵부답이었고, 결국 그다음 날까지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그리고 다음날, 싸한 느낌을 배반하지 않고 남자친구는 메일로 소연에게 이별을 통보했다. 아무리 헤어질 결심을 했다 해도, 여자친구가 응급실에 있다면 그 정도는 와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 와서 보면 마음이 약해질 것 같으니까 어차피 헤어질 거.. 모질게 쌩깐 건가. 게다가 메일로 이별 통보라니. 정말 최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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