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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연재 May 27. 2024

마음은 가끔 속도조절에 실패한다

<소설> 비혼이지만 하고 싶습니다 13화

공개방송을 한 팀의 전체회식날짜가 잡혔다. 평소 회식이라고 하면 도망갈 생각부터 하던 소연이었는데, ‘회식한다’는 피디의 말에 파브로프의 개처럼 반가움이 자동적으로 반응했다. 

회식에 참가하는 사람들의 범위가 어느 정도 되는지가 제일 궁금했다. 그냥 방송국 내부 스태프들만 회식을 할 수도 있고, 무대 감독과 음향 등 외부 인력까지 함께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소연은 피디에게 누가 오냐고 슬쩍 물었다. “다 올 걸?” 피디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는데 소연은 속으로 ‘다’가 누구인지 속이 바짝 탔다. 

‘외부 사람들도 오는 거에요?’

그렇게 묻는 게 이상한 것도 아니건만 괜히 제 발 저린 도둑은 더 묻기를 포기했다. 그때 소연의 카톡이 울렸다. 

“회식 있다고 연락받았습니다. 전 갈 건데 소연 씨도 오죠?”

종수였다. 

“한우래요. 한우 먹어본 지 백만년 돼서 꼭 가야 해요.”

그렇게 말하는 소연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회식이 있는 날. 소연은 따로 회식 장소인 <창고>로 향했다. 예약한 방은 15번. 오늘 오는 사람만 15명이라고 했다. 낯을 가리는 소연은 잘 모르는 15명과 식사하는 게 평소라면 부담스러웠을 텐데, 그날은 달랐다. 식당으로 들어가기 전, 소연은 잠시 화장실에 들러서 옷 매무새를 살폈다. 거울을 보며 화장이 들뜨거나 립스틱이 앞니에 묻어 있진 않은지도 꼼꼼하게 체크했다. 이상무. 

문을 열고 들어가니 먼저 온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쓱 자리를 스캔했는데 종수는 아직 도착 전이었다. 소연이 비어 있는 자리에 앉으려는데 피디가 일어나더니 안쪽 자리에 앉으라며 양보를 해주었다. 

소연이 괜찮다면서 실랑이를 하는 사이, 종수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사람들이 일어나서 악수하며 반갑게 인사하는 분위기가 되면서 소연은 그냥 자리에 앉았고, 종수는 소연의 맞은 편 자리에 앉았다. 

잡담을 나누다가 참석자 중 한 사람이 공개방송 음향이 좋았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음향 담당이던 종수는 기계가 좋았다고 하면서 기계보다 첫 음정이 불안정했던 가수 때문에 더 긴장했다는 말을 꺼냈다. 종수의 말에 담당작가인 소연과 피디의 눈이 마주쳤다. 관객이 입장하기 10분 전까지도 공개홀에 도착하지 않아서 피디와 소연이 마음을 졸이게 했던 가수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섭외,  출연자 동선 체크와 안내는 소연 담당이었기 때문에 그날 가장 마음이 탔던 장본인이었다. 

“프로필 사진 받고, MR 파일받고, 계약서 주고 받고, 공연자 교육이수증 받는 것까지. 그 가수가 가장 협조적이고 시간을 잘 지켜줬거든요. 그 전날만 해도 일찍 오겠다고 했는데 당일날 매니저가 전화를 안 받는 거에요. 진짜 등골 오싹했다니까요.”

소연이 그날 속이 탔던 이야기를 하면서 그래도 과정에 협조적이었기 때문에 용서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자 모두 수긍을 했다. 

제일 늦게 온다고 한 그룹에 오히려 제일 일찍 도착했다. 그렇게 늦게 오면 맞출 시간이 너무 부족해서 안 된다고 하니까 3-4분이면 충분하다 해서 갸우뚱했다. 그러더니 잠깐 한다던 리허설은 20분이나 걸려서 또 한번 애를 태우기도 했다. 그래도 소연은 그날 그 그룹의 드럼 소리를 잊을 수가 없었다.  

“전 드럼 소리 들으니까 막 두근두근하더라구요.”라고 하자 종수가 바로 맞장구를 쳤다. 

“그 드러머가 세계 5대 안에 드는 드러머에요. 정박으로 정말 잘 치는 분이죠.”

그러면서 소연을 보며 웃었고, 소연은 다음에 콘서트를 가고 싶다고 말했다. 드디어 고기가 나오고 식당 직원이 고기를 자르고 익혀주는데, 종수가 고기를 집어서 소연의 접시에 놓아주었다. 소연은 제 발이 저려서 순간 움찔했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소연도 고기 한점을 집어서 종수의 접시에 놓아주며 “형님 먼저 드셔야죠”라고 했다.

“아, 이쪽 형님도 드세요.”

그러면서 옆에 앉은 피디에게도 고기를 놓아주었다. 

“작가님, 이렇게 친절하면 나중에 오해 사요. 깻잎 논쟁 모르세요?”

고기를 덜어서 나눠주는 소연에게 피디가 한 마디를 던졌다. 여자친구의 친구와 같이 밥을 먹을 때, 깻잎이 안 떨어져서 못 집고 있는 모습을 보고 남자친구가 젓가락으로 깻잎을 떼어주는 게 괜찮다 안 괜찮다 하는 논쟁. 소연도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 다들 갑자기 깻잎 논쟁에 가담했다. 누군가는 된다고 하고 누군가는 안 된다고 하며 분위기가 팽팽할 때 소연이 말했다.

“난 새 젓가락을 꺼내서 떼어주는 건 괜찮아요. 그 정도는 매너지. 다만 비말이 섞이면 안 돼.  내가 예전에 헬리코박터균이 나와서 고생했거든. 그게 비말로도 전염된다네요”

간접 키스하는 것 같아서 신경쓰이는 게 아니라 헬리코박터균이 옮을까봐 새 젓가락으로 깻잎을 떼어주는 건 괜찮다니. 소연의 엉뚱한 대답에 종수가 웃으며 말했다.

“저라면 깻잎을 잡아주고, 여자친구한테는 깻잎을 밥 위에 올려주겠어요.” 

소연은 종수의 답에 엄지를 치켜세웠다. 뒤이어서 서비스로 계란찜이 나왔고, 종수는 빈접시를 부탁하더니 계란찜을 퍼서 소연에게 건넸다. 그러면서 조금 전의 그 피디에게는 계란찜을 먹겠느냐며 물었다. 종수가 정한 나름의 선이자 사인이었다. 보이지 않았지만 너무나 선명하게 느낄 수 있는 선. 소연도 분명 그 선을 느낄 수 있었다. 15명이 있지만 둘만 있는 느낌. 왠지 조마조마하면서도 그 조마조마함이 옥시토신을 마구 분비시키는 것 같았다. 아무도 관심이 없는데도 소연은 들키지 않으려고 애써 꾸역꾸역 고기를 입에 넣었고, 잘 들어오지도 않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그렇게 정신없이 식사와 후식까지 마치고, 사람들은 고깃집을 나와서 서로 인사하기 시작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덕분에 이번에 공개방송 차질없이 잘 치렀습니다.”

“다음에 또 행사 있으면 불러주세요.” 

“감사합니다.” 

“또 뵙겠습니다.”

서로 악수를 하며 헤어지는 모습을 보고 있는데, 종수가 소연에게 다가와서 악수를 청했다.

“우리 작가님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또 뵙죠.”

소연은 종수의 손을 잡고 악수를 했다. 소연의 손을 꽉 쥔 종수의 손에서 부드럽고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다. 회식을 마친 소연은 생방송을 준비하기 위해 방송국으로 들어왔다. 종수의 잔향의 아직 손에 배어 있는 것 같았다.       


그날 저녁, 집에 들어가니 춘자가 소연을 기다리고 있었다. 보통 10시 정도면 잠이 든 시간인데, 아직도 춘자가 안 자고 있다는 건 무슨 일이 있다는 것. 그리고 전화를 하지 않고 기다렸다는 건 좋지 않은 일이라는 뜻이었다. 소연이 무슨 일이 있냐고 묻자 춘자는 걱정 어린 눈빛으로 말했다. “집주인이 집을 비워달래.”

2년 살고, 계약 당시보다 1억 넘게 전세값이 떨어져서 얼마전 1억을 다시 돌려받는 조건으로 재계약을 하겠다고 합의가 된 상황이었는데, 날벼락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1억을 돌려주려면 대출을 받아야 하는데 기존 대출까지 있어서 부담이 되었단다. 그래서 자기네가 집으로 들어와야 한다는 거였다. 대출 이자가 부담스러운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해도, 집을 비워줘야 하는 날짜가 촉박했다. 

나가야 할 때까지 남은 시간은 한 달 반. 근래 들어 전세가 빨리 빠지면서 전셋가가 올라간다는 뉴스를 봤던 터라 소연은 걱정부터 앞섰다. 아쿠아로빅을 다니는 체육관, 몇 안되는 친구들, 다니던 병원 등등 춘자를 생각하면 이 동네에서 구해야 하는 상황. 얼른 씻고 책상에 앉아 네이버 부동산을 들어가 보니 역시나 전세 매물이 많지 않았다. ‘이 일을 어쩐다...’ 소연은 마음이 급해져서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어느 순간부터 소연은 가장이자 보호자가 되어 있었다. 항상 엄마가 보호자였는데, 어느 날 문득 병원을 가는 것에서부터 집안의 모든 대소사가 소연의 손을 거치고 있었다. 집도 마찬가지였다. 이사를 하거나 이사 과정에 필요한 모든 일들을 춘자가 해왔지만, 칠십을 넘으면서부터는 상황이 달라졌다. 지금도 팔십 넘은 춘자가 집을 알아보러 다닌다는 건 힘에 부치는 일. 집을 알아보는 것에서부터 계약, 입주까지 모든 게 소연의 몫이었다. 

당장 일주일 안에 이사 갈 집을 구해야 할 상황. 발등에 불이 떨어진 소연은 다음날 아침 10시 땡하자마자 근처 부동산으로 나가서 사장님을 만났다. 사장님은 그 자리에서 매물을 갖고 있는 다른 부동산에 연락을 하기 시작했다. 

‘입주협의’라고 되어 있는 곳만 저녁에 보러 가기로 약속하고 일단 출근했는데 일을 하면서도  집에 대한 걱정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중간에 종수에게서 연락이 오긴 했지만, 소연은 온통 전셋집 구하는 일에 신경에 쓰여서 도통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주말에 시간 있냐는 종수의 말에 소연은 나중에 연락하겠다는 답신을 보냈다. 


그날 저녁, 퇴근하자마자 부동산으로 달려간 소연은 네 곳을 보러 다녔다. 그러나 집이 마음에 들면 날짜가 안 맞았고, 집과 날짜가 맞으면 금액이 맞지 않았다. 

“집을 구하는 과정이 결혼하는 것과 비슷해요. 이게 맞으면 저게 안 맞고, 결국 인연이 있어야 만나게 되더라구요. 어떻게든 찾아지니까 너무 걱정마세요.”

부동산 사장은 그렇게 소연을 위로했다. 그 말이 묘하게 위로가 되었다. 아무리 큰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도 내가 걱정한 만큼의 큰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고, 돈을 아무리 못 벌어도 끼니를 굶은 적은 없었다. 하물며 살 곳이 없으랴. 이러다가 덜컥 찾아질 거라며 소연도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러나 전셋집은 일주일이 되어가도 찾아지지 않았다. 그쯤 되자, 억지로 끌어올려서 붙잡고 있던 낙관이 추락해버렸다. 지칠대로 지친 소연은 급기야 엿새째 되던 날, 눈물을 쏟았다. 그때 종수에게서 연락이 왔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받지 않을까 망설이다가 요며칠 종수에게 무심했던 것 같아서 성의를 보여야 할 것 같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지금 어디에요?”

종수의 말에 그동안의 고단함과 서러움이 둑 터지듯이 터져버렸다. 

“우리 그때 만났던 커피숍에서 봐요. 저 근처에 와 있어요.”

이번 주 소연에게서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걱정이 돼서 찾아온 모양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소연은 종수가 너무 보고 싶어졌다. 그동안 너무 정신이 없어서 잊고 있었던 감정이었다. 얼른 카페에 가보니 종수가 와서 앉아 있었다. 그 얼굴을 보니 이상하게 안심이 되었다. 

소연은 지금의 상황을 종수에게 이야기하고, 종수는 진지하게 소연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이야기를 듣던 종수가 갑자기 소연에게 물었다. 

“아까 날짜가 안 맞는다는 집 있다고 했죠? 거기는 날짜가 픽스된 거에요?”

“그렇다고 들었어요. 그 사람도 집을 사서 가는 건데, 잔금일이 딱 1월10일이래요. 저희는 1월 19일에 잔금을 치를 수 있거든요. 딱 9일 모자라서 너무 아쉬워요. 우리 집주인도 지금 살고 있는 집에서 딱 그날 나와야 한다니 날짜를 옮기기가 어렵구요.”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종수의 눈이 반짝였다. 잠깐 기다리라고 하더니 밖으로 나가서 전화 통화를 하고 들어왔다. 

“소연 씨. 이런 방법은 어떨까요. 지금 전세 명의가 누구 명의로 되어 있어요? 전세 대출을 받은 건가요?”

엄마 명의이고 대출은 없다고 하니 종수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럼 소연 씨 이름으로 필요한 만큼 전세대출을 받는 거에요. 그리고 철회권이라는 게 있는데, 14일 이내에 대출 받은 걸 철회하면 중도상환수수료 물지 않고, 그냥 10일간의 이자만 내면 되는 거에요. 이자 비용만 50만 원 정도니까 괜찮지 않을까요?”

철회권? 소연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지금까지 별로 대출을 받아 본 적이 없어서 얼떨떨해하는 소연을 보고 종수는 은행에서 일하는 자신의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그리고 스피커폰으로 상황을 설명하고 철회권을 사용해도 되는지 물었다. 그 친구의 대답은 오케이.

‘구세주.’ 소연의 심정이 딱 그랬다. 얼른 부동산에 전화해 보니 그 집이 아직 나가지 않았단다. 그래서 소연은 부동산 사장님께 종수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전했고, 부동산 사장님은 자신도 알아보겠다면서 전화를 끊었다. 바로 몇분 뒤, 한껏 격앙된 사장님의 목소리가 수화기 안에서 쩌렁쩌렁 울렸다.

“진짜 그러면 되겠네!!!! 집주인도 좋다니까 일단 계약금부터 넣어요. 내가 바로 계좌 넣어줄게요.” 

누가 쫓아오는 것도 아닌데 혹여나 그 집을 놓칠까봐 떨리는 손으로 계약금을 넣었다. 일이 딱 해결되는 순간, 소연의 귀에는 종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불과 일주일밖에 안 되는 시간이었는데, 어찌나 마음을 볶였는지 온몸을 조이던 긴장이 확 풀리는 느낌이었다. 

“일주일 사이 10년은 늙은 거 같아요. 유유.”

이제야 여유가 생긴 소연이 웃으면서 말하자 종수는 해결되서 다행이라며 웃어주었다.

“너무 고마워요. 종수 씨 아니었으면 저 지금도 지옥 속에 있었을 거에요. 날 꺼내줬어. 아까는 진짜 너무 좋아서 종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니까요.”

“제가 오늘 소연 씨한테 골든벨 울린 거네요. 종수의 종 자도 쇠북 종(鐘)인데.”

진짜 그랬다. 너무 좋으면 종소리가 난다는데 종수에게서 철회권 이야기를 듣고 해결된 순간은 키스만큼이나 짜릿한 순간이었다.  

“그런데 철회권 같은 건 어떻게 알았어요?” 

“제가 그 철회권을 쓴 적 있거든요. 그땐 귀찮다 했는데 이렇게 요긴하게 써먹을 줄 몰랐네요. 역시 사람은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해요.”

소연과 종수는 카페를 나와서 잠시 같이 걸었다. 근심 걱정이 사라지고 종수와 같이 걷는 산책길이 얼마나 충만한 위로인지. 소연은 기분이 좋아져서 계속 종알종알 수다를 떨었다. 얼마 동안 걷다가 기분이 좋아진 소연이 종수에게 말했다. 

“우리 손 잡아요.”

종수는 대답 대신 소연의 손을 잡았다. 소연은 이런 자연스러운 속도가 안심이 되고 좋았다. 

그 사람의 마음을 확인할 수 없어 혼자 애태우는 것도 싫고, 너무 훅 들어와서 화들짝 놀라 뒷걸음치는 것도 싫었던 소연에게는 이렇게 자연스럽게 손 잡을 수 있는 적당한 속도가 좋았다. 

“오늘은 제대로 쓸모 있었어요.”

소연이 헤어지기 전 소연이 종수에게 인사를 하자, 종수가 소연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진지하게 말했다. 

“앞으로도 계속 소연 씨한테 쓸모 있으면 좋겠어요.”

이 낯간지러운 대사는 어떻게 받아쳐야 서로 안 무안하면서 진심을 전할 수 있는지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이미 머리는 고장 나 있었다. 이렇게 이 남자한테 빠져들어가도 되나 싶은 경계심이 들었지만, 그 경계심이 무색할만큼 감정의 소용돌이가 거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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