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연재 Jun 17. 2024

연애는 젊은이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소설> 비혼이지만 하고 싶습니다 15화

소연은 종수를 배웅하고 집에 들어와 춘자에게 집을 구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춘자의 얼굴에도 화색이 돌았다. 방에 들어와 그동안의 일을 복기하니 꿈만 같았다. 어쩐지 이 일로 종수와 한결 가까워진 느낌이 들기도 했다.

‘위기는 사람을 가깝게 만들어주는구나.’

늘 꿈꾸던 거였다. 혼자 결정하고 혼자 알아보고 혼자 행동하고.. 그런 게 어려운 것은 아니었지만 가끔은 누군가와 함께 의논하고, 함께 방법을 알아보는 게 얼마나 절실했는지 모른다.

혜성처럼 나타난 종수가 아니었다면 아마 지금도 혼자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을 터. 사정을 알아봐 주고 도울 길을 알아봐 주고 함께 해결해 나간 이 모든 과정이 소연이 딱 원하던 그 그림이었다.

‘내가 찾던 그 사람인가. 나에게도 온 건가?’

마흔다섯을 넘으면서 연애 세포가 다 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이 세포들이 다 어디 숨어 있다가 우르르 쏟아져 나온 걸까. 휴지기인 화산이 화산활동을 안 하는 줄로만 여겼다가 어느 날 갑자기 용암을 뿜어내는 것처럼 연애 세포가 그랬다. 결혼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뒤, 여기저기 알아보러 다닐 땐 푹 잠들어 있지 않았던가. 방송국에서 공개방송 미팅을 할 때만 해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확실히 사랑은 타이밍. 어느 타이밍에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인연이 생기기도 하고, 지나가기도 한다. 그래서 스파크가 튈 수 있는 타이밍이 중요하다. 소연에게는 한 가지 더 중요한 게 속도였다. 서로 마음의 속도가 맞아야 관계도 지속가능하다고 여겼다. 속도가 달라도 그게 맞춰지는 시점이 있긴 하지만, 서로 비슷한 속도의 마음이면 더 좋겠다고 생각했다.

종수와는 타이밍도 좋았지만, 속도도 맞았다.

소연은 젊을 때 연애할 때도 피곤한데도 매일 만나는 연인들의 연애 스타일이 맞지 않았다. 너무 좋아하는 마음, 그래서 매일 보고 싶은 마음은 인정. 그러나 소연에게는 피로함이 느껴지는 연애였다. 더구나 이제 오십을 앞두고 있으니 더더욱 그렇게 몸과 시간을 태우는 연애는 맞지 않았다. 빨리 타오를수록 쉬이 꺼진다는 걸 믿는 편인데, 종수는 그런 소연의 속도에 딱 맞는 사람이었다. 매일 다정한 안부를 주고받되, 만나는 것에 대해서는 서로의 스케줄과 의향을 전적으로 존중해 주는 관계에서 소연은 더 안정감을 느꼈다.

두 사람은 주로 주말에 만났고, 종수는 드라이브를 좋아하는 소연을 위해 근교의 좋은 드라이브 코스로 안내하곤 했다.

11월 마지막 주말. 두 사람은 낙엽이 지기 시작하는 양평 용문사에 갔다. 다행히 날씨가 춥지 않아서 마지막 단풍 구경을 편안하게 즐길 수 있었다. 마치 노란 카펫이 펼쳐진 것처럼 아름다웠다. 기분 좋게 얼마쯤 걷다가 종수가 말했다.

“12월 31일에 제주도에서 행사를 하게 됐어요. 중문 쪽 있는 호텔에서.”

호텔에서 주최하는 12월 31일의 행사라니. 얼마나 낭만적인가. 몇 명 스태프를 위해 방을 내준다는 말에 소연은 부럽다는 말이 튀어나왔다.

“같이 갈래요?”

예상치 못한 말에 소연은 잠깐 당황했다.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었는데 종수의 제안에 솔직히 가슴이 두근거리면서 가고 싶은 마음 반, 아직 그럴 때가 아니라는 마음 반이 치열하게 전투하기 시작했다. 단박에 그러겠다고 하는 건 모양이 빠지는 일이어서 일하는 데 방해가 될 것 같다며 완곡히 거절했지만, 그 거절의 뒷맛은 아쉬웠다. 종수는 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언제든 이야기하라고 하면서 더 이상 밀어붙이지 않았고, 소연은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는 척했지만 고민은 깊어졌다.    


  

“소연이는 잘 되어 가고 있는 거겠지?”

친구들은 소연이를 기다리면서 궁금해 죽겠다는 듯이 서로에게 물었다. 언제부터인가 소연의 연애와 결혼이 관심사에서 멀어졌던 게 사실이다. 주변을 돌아봐도 괜찮은 남자는 이미 기혼이었고, 소연에게 소개해줄 만한 사람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그러면서 차츰 소연이 혼자인 것을 당연하게 인식하고, 연애나 결혼에 대해 언급하는 횟수도 점점 줄어들었고, 그러다 보니 이제 나이도 찼으니 연애를 하리라는 기대도 옅어졌다. 혼자도 잘살고 있으니 그냥 이대로 사는구나 하고 암묵적으로 결론 내리기도 했다.

한편으론 굳이 이 나이에 혼자 편하게 살지 뭐 하러 결혼을 하나 하는, 기혼자로서의 판단도 있었다.

“결혼은 모르겠지만 연애는 하면 좋지.”

“저러다 상처받고 끝날까 봐 걱정이다.”

“그것도 경험이야.”

“어쨌든 남자 만나겠다고 산악회까지 가면서 애썼는데 이렇게 누군가를 만나고 있으니 반갑긴 하다.”
 “우리 나이에 연애가 가능하네.”

“그러게. 허긴 로맨스그레이도 있잖아. 할머니 할아버지도 연애하는데. 생각해 보면 아직 연애하기에 충분히 젊은 거지.”

한창 소연의 연애에 대한 이야기가 뜨거울 때, 소연이 주인공처럼 늦게 도착했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친구들의 눈에 소연의 얼굴이 드라마 <밀회>에 나왔던 김희애처럼 물광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 같았다.

“너 기다리는 동안 너 연애 이야기하면서 만리장성을 몇 번이나 쌓았다 무너뜨렸다 했어.”

“얼굴이 훤하다. 연애하는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다르구나.”

친구들은 궁금해 죽겠다는 얼굴로 호들갑을 떨었다. 그 호들갑 너머에는 혹시나 그 사이 깨지거나 한 건 아닌가 하는 염려도 담겨 있었다. 소연은 친구들의 표정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친구들 사이에서 소연이 연애로 관심을 받는 게 오랜만이기도 하고, 50이 가까운 나이에 로맨스의 주인공이 될 줄 몰랐기 때문이다.

언젠가 TV드라마에서 고3 수험생을 둔 한부모 여성이 멋진 연하 미혼남의 관심과 애정을 받는 내용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그 드라마가 방영되면서 뭐가 아쉬워서 돈 많고 멋있는 젊은 남성이 자기보다 나이 많은 중년 여성을 좋아하냐는 부정적인 의견이 많았다. 그때 연하남의 사랑을 받는 역할을 맡은 여자 주인공이 인터뷰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로맨스코미디가 젊은 배우들만의 전유물은 아니잖아요.” 그때 그 인터뷰를 보면서 소연이 맞장구를 친 적이 있는데, 자기가 주인공이 되고 보니 그 말에 절대 공감이 되었다. 로맨스는 어느 나이에서든 가능한 것인데 말이다.

“그래. 아주 행복해 죽겠다. 됐냐?” 하면서 소연이 활기차게 말했다. 분명 전과는 다른 에너지였다. 완경기를 겪으면서 잃어버렸던 생기였다. 소연의 표정이 49라는 나이에 맞지 않을 만큼 생기가 있었다. 소연이 현재의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자, 다들 한숨을 돌리면서 안심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나선은 종수의 어떤 점이 제일 마음에 드냐고 물었다. 그 질문에 소연은 곰곰이 생각했다. 딱히 한 가지를 꼽을 수가 없었다. 종수의 전체적인 분위기, 그의 태도와 말투, 센스.. 모든 게 종합적이었기 때문이다.

“잘생겼어.”

그 말에 친구들은 어이없어했지만, 소연에게는 그 말이 진심이었다. 그 모든 게 합쳐져서 콩깍지가 씌우니 그가 정우성이 울고 갈 만큼 잘생겨 보였기 때문이다.

“어디까지 진행이 된 거야? 잤어?”

“자긴 뭘 벌써 자. 그냥 손만 잡았어.”

“허허. 으른들이 진도를 빨리 빼야지 사춘기 소년소녀냐?”

“난 아직 그 정돈 아니야.”

친구들에게 진도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니 소연은 종수가 제안한 제주여행이 생각났다. 여전히 소연을 뒤흔드는 고민. 종수가 좋으면서도 관계가 한 걸음 나아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 자신의 마음에 대한 불확신. 한걸음 내딛기가 이렇게 어려운 건, 성향 탓인지 나이 탓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12월의 둘째 주 어느 날. 소연은 방송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날의 코너는 연애 상담.

소연은 미리 게시판에 사연을 보낸 사람들의 사연을 추려놓고, 생방송 때 들어오는 문자 중에서 소개할 부분을 남겨 놓았다.

생방송 온에어 불이 켜지고 디제이의 멘트가 시작되었다. 그 사이 소연은 노래가 끝난 뒤 소개할 문자들을 고르고 있었다.

몇 곡의 노래가 나간 뒤, 그날의 코너가 시작돼서 소연이 소개할 사연을 모니터에 올리려는데 스튜디오 밖에 있는 피디가 모니터에 쓴 글이 보였다.

선곡한 노래 옆에 전화번호 뒷자리와 함께 ‘사연 소개해주세요’라고 쓰여 있었다.

보통 사연을 선정하는 건 작가인 소연의 몫인데, 가끔 꼭 필요하다 싶으면 피디가 표시를 해서 알려주곤 한다. 이럴 땐 꼭 소개했으면 하는 사연이라는 뜻. 소연은 얼른 번호를 찾아 사연을 디제이용 모니터에 붙이고 읽었다.   

“제 나이 오십. 아주 오랜만에 여자친구가 생겼습니다. 제 눈엔 너무 예쁘고 아기 같고 소중한 그녀. 혹여나 놀라서 뒤로 물러나갈까 봐 살금살금 다가가고 있습니다. 전 여행도 같이 가고 싶은데, 유교걸인 여자친구는 망설이는 눈치예요. 아직 제 마음에 대한 확신이 없는 걸까요? 전 읽기 쉬운 마음인데 말이죠.”

사연을 읽고 나서 소연은 ‘아기라니. 주책바가지네.’하며 풋 웃음이 터졌고 옆에서 같이 읽은 디제이도 웃으며 “어후~ 닭살~”했다.

고민상담 코너이니 이런 사연이 오면 소개하기 전에 짧게라도 디제이와 이야기를 나누기 때문에 소연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디제이에게 물었다. 디제이는 어쨌든 싫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나아가는 거고, 설사 실패한다 해도 배우는 게 있으면 되는 거 아니냐고 했다. 남자가 제비가 아닌 다음에야 괜찮은 거 아니냐는 말에 소연도 수긍하며 맞장구를 쳤다.

“속도에 맞춰주는 것도 배려고 사랑이죠. 내가 볼 땐 남자가 그걸 맞춰주는 것 같은데. 그런데 여자도 나이가 있을 텐데 뭘 그리 빼나? 우리 나이에 사랑은 쉽게 오지 않는데 말이죠.”

그러고 나서 원고를 정리하던 소연은 남의 일에는 이렇게나 쿨하고 척척박사인 자신이 참 이중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최종적으로 보낸 사람을 확인하는 순간, 얼음이 되었다.

발신인의 닉네임은 골든벨. 얼른 전화번호를 확인하니 종수였다.

에어온이 되고, 디제이는 사연을 읽으면서 뭐라고 말을 하는데 소연의 귀에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그냥 웃음만 새어 나왔다. 주책없이. 그리고 스튜디오 안에 골든벨이 신청한 잔나비의 <주저하는 연인들을 위해>가 흐르고 있었다.      

“나는 읽기 쉬운 마음이야 당신도 스윽 훑고 가셔요

달랠 길 없는 외로운 마음 있지 머물다 가셔요 음 내게 긴 여운을 남겨줘요

사랑을 사랑을 해줘요 할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새하얀 빛으로 그댈 비춰 줄게요.”      

“엄마, 친구하고 제주도 좀 놀러 갔다 올게.”

소연은 춘자에게 12월 31일 제주도에 다녀오겠다면서 혼자 지내고 괜찮은지 안색을 살폈다.

춘자는 내가 어린아이냐며 걱정 말라고 말하면서도 뒤돌아서서는 외롭게 신년을 맞이하게 생겼다면서 푸념을 늘어놓았다.

갈수록 어린아이가 되어 가는 엄마를 보며 소연은 나이 들어갈수록 아이가 된다는 말을 예외 없이 따라가는 모습에 짜증이 올라왔던 적도 있었다. 그런데 소연도 나이를 먹고 점점 아픈 곳에 늘어나고, 점점 낯선 것보다는 익숙한 것이 편안해지는 자신의 변화를 감지하며 춘자의 심정을 이해하게 되었다.

‘나도 그런데 엄마는 오죽하겠어.’

이 말은 춘자와 잘 지내게 하는 치트키 같은 말이었다.

나도 이렇게 아픈데 엄마는 오죽하겠어.

내가 이렇게 낯선 게 불편해지는데 엄마는 오죽하겠어.

내가 이렇게 피곤한데 엄마는 오죽하겠어.

아이를 낳아봐야 어른이 된다고들 하지만, 그 말이 일정 부분 맞다고 긍정하면서도 한편으론 ‘늙은 부모를 봉양해 봐야 어른이 된다’는 말도 인정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늙음에 대해 더 깊고 세밀하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아이 낳고도 철이 안 드는 부모가 있듯이, 부모를 봉양하면서도 부모에 대해 몰이해하는 사람들은 있게 마련이지만.

12월 31일에 엄마를 혼자 두는 것이 좀 미안하고 걸리긴 했지만, 이번만큼은 소연도 종수에게 한 걸음 나아가야 할 때라는 결심이 섰다. 종수가 라디오에 보낸 사연이 머뭇거리던 소연을 확 잡아 이끌어준 것이다.

그래서 종수에게 12월 31일에 동행하겠다고 말하고, 마음이 바뀔까 봐 비행기표까지 예약했다.

큰 결심을 하나 하고 나니, 마음이 편해진 것은 잠깐. 그 이후로는 현실적인 고민이 시작되었다.

남자랑 자 본 지가 너무 옛날이라 초보티가 날까 봐 걱정, 갱년기 이후 나온 뱃살도 걱정, 생각해 보니 속옷도 너무 노말했다. 무엇보다 가장 걱정거리는 나이가 들면서 쪼그라든 성욕이었다. 언제부터인가 무성애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는데, 이런 상태로 종수를 받아들일 수 있는지 별의별 걱정과 생각이 꼬리 잡기를 했고, 31일에 다가올수록 소연의 긴장감은 부풀어 올랐다.

그러다 문득 소연은 자신이 종수와의 잠자리에만 신경 쓰느라 정작 종수와 송년과 새해를 함께 재밌게 지낼 생각은 놓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긴장되고 신경 쓰이는 것은 당연하다 해도, 둘만의 좋은 시간과 추억을 쌓는 것도 그만큼 의미 있는 일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자 긴장이 조금 풀어지면서 즐거워졌다.

밤에 종수를 만나기 전까지 혼자 돌아볼 곳들과 종수와 함께 가면 좋을 곳들을 리스트업 하면서는 더욱 기분이 좋아졌다. 모든 날이 다 행복할 수 없고, 좋을 수 없는 일상. 아니, 오히려 행복이란 원하던 어떤 일이 일어나는 순간에만 불꽃처럼 반짝이는 것이 아니라 아무 일 일어나지 않는 일상에서도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나이가 되었다. 특별한 일이 일어날 거라는 기대보다는 지금과 같기를 바라며 살아왔지만, 가끔은 이런 특별한 이벤트가 몰래카메라처럼 일상 속에 침투한다. 특별한 시간과 경험. 끝을 생각하지 말고 지금을 후회 없이 보내자는 결심을 하고 소연은 제주행 비행기에 올랐다.

이전 14화 위기가 사랑을 만든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