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 웰컴 투 백수월드 (빗소리와 함께)
나는 3년이나 백수생활을 했었다. 나보다 5살 어린 내 동생이 먼저 취업을 했기 때문에 그 시기의 나는 새까맣다 못해 시퍼런 우울을 등 뒤에 매달고 다녔었다. 유난히 날씨가 좋았던 어느 가을에 나는 그 회사에 입사했다. 계속 우울해 하다가, 급기야 우울증에 걸리기 딱 직전에 취업이 되어서 뭐가 어떻게 되는 줄도 모르고 좋아했었다. 그렇게 좋아해 놓고 퇴사를 결정하게 된 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어찌됐건 나는 1년 6개월만에 마치 이곳이 내 자리라는 듯 다시 구직자가 되었다. 두번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구직자 생활이었는데. 그보다 더 겪고 싶지 않은 고통에서 벗어 나는 것이 먼저였으니까.
퇴사하던 그 날, 아침부터 날씨가 흐리더니 점심에는 엄청난 바람과 함께 폭우가 쏟아졌다. 속이 시원해야 하는데 폭우에 젖은 무거운 공기 때문에 숨이 막혔다.
밤 늦게 까지 애니메이션을 봐도, 영화를 봐도 괜찮은. 7시 알람에 조금만 더 자고 싶다고 생각했다면 얼마든지 더 자도 괜찮은. 하루종일 단 한번도 신발을 신지 않아도 되는. 그 생활이 시작되었다. 물론, 시험 전 TV를 보는 마음처럼 마음의 절반 이상은 매우 불안한 채로.
바로 그..백수월드가 열린 것이다.
퇴사하고 처음 맞는 평일, 그 날은 비가 어마어마하게 많이 왔다. 퇴사하던 날 내 숨통을, 내 마음을 무겁게 꾹 누르던 그 축축한 공기가 다시금 나를 눌러오기 시작했다. 창문을 닫으려고 팔을 뻗었다가 후두둑하는 그 빗소리에 손을 멈췄다. 회사 있을 때는 쉽게 듣기 힘든 빗소리다. 회사에서 일하고 있으면 사실 밖에 비가 오는지 눈이 오는지 내 자리에서는 잘 보이지도 않았고, 그런 걸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게다가, 회사에는 온통 키보드를 두들기는 소리가 시끄러우니까, 간혹 옆자리 대리님이 하는 말도 못 들을 때가 많았다. 주말엔 너무 피곤하니까 정신없이 잠이나 자고, 맥없이 앉아 TV나 보면서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어떤 날에 비가 쏟아지더라도 빗소리는 들을 수 없다. 그냥 축축한 공기가 답답하다는 정도가 전부인 비 오는 날.
하지만, 그 날의 비오는 날은 달랐다. 빗소리가 들린다. 후두둑 굵은 빗줄기도 보인다. 집 앞 초등학교 복도에서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와 빗소리가 섞여 꿈을 꾸는 것도 같다. 부모님이 살고 계시는 우리집은 크지않은 주택이다. 내 방에 난 작은 창문을 열면 뒷베란다가 있었다. 그곳은 천장이 샷시로 되어 있어서 비가 오면 빗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었다. 나는 그 빗소리를 정말 좋아했다. 어딘지 모르게 경박스럽게 들리기도 하는 그 요란한 빗소리를 듣고 있으면 기분이 좋았다. 그때 그 빗소리처럼 경박스럽달지, 요란하달지, 다소 유난스럽달지 하는 그런 빗소리는 아니지만, 오래간만에 반가운 소리를 듣고 있으니까 기분이 좋아졌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시간을 길게 가져 보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구직자가 되어 어떻게 해도 마음이 아주 편해질 수는 없지만. 그 때처럼 또 마음 졸이며 이 곳 저 곳 원서를 쓰고, 면접을 보러 다녀야 하지만 그때 보다는 조금만 길게 시간을 써 보자고. 몸이 여유로워지자는 게 아니다. 마음이 여유로워 지는 것. 우리에게는 그런 시간이 정말로 필요하다. 지금 나에게 이런 시간이 생긴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