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잡문모음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none Aug 18. 2019

여신이여, 분노를 노래하소서.

첫 문장으로 글 연습하기 - 1

여신이여, 분노를 노래하소서.

글을 쓰는 연습은 자주 할수록 좋다. 단순히 글쓰기 능력의 향상뿐 아니라, 생각을 정리할 수 있다. 그래서 글쓰기 연습방법으로 一筆揮之 [일필휘지]로 첫 문장 글쓰기를 하고자 한다.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스스로 설정한 기본 룰은 다음과 같다.


시간제한은 한 시간

주어지는 제시어는 단어 혹은 한 문장

첫 문장 이후에 자유로운 글쓰기

주제는 무엇이든 Ok

글의 형태도 자유롭게!

퇴고는 한~~~~참 후에!


오늘 첫 문장은 너무나도 유명한..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첫 문장.

μῆνιν ἄειδε θεὰ[메닌 아에이데 테아]


여신이여, 분노를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분노를 노래하소서.'

나는 마음속으로 좋아하는 구절을 떠올렸다. 어렸을 때 집 한편에 먼지만 가득 쌓인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수십 번 읽으며 가장 좋아했던 첫 구절이다. 책의 시작은 항상 설렌다. 첫 문장에서 느껴지는 무게감. 그리고 앞으로의 서사시의 궁금증이 더해진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이 구절을 떠올린 상황은 화가 나고 짜증 나는 상황 때문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마음은 평화로웠다. 최근 시작한 마음 챙김 명상을 하며 마음을 다스렸다.(아. 물론 명상의 절반은 졸았지만.) 그리고 세탁, 청소 같은 소소한 1인 가구의 살림을 마치고 즐거운 마음으로 일찍 잠이 들었다. 아침잠이 많았지만 오늘은 기분 좋게 일어났다. 무선 이어폰을 귀에 꼽고 노래를 들으며 출근했는데..


출근과 동시에 짜증이 솟구쳤다. 그 이유는 함께 일하는 직장 상사 때문이다. 출근과 동시에 나를 부른다. 딱히 지각한 것도 없지만(무려 출근시간보다 20분이나 일찍 나왔다.) 본인보다 늦게 나왔다고 구박한다. 뭐, 사실 이런 건 그냥 넘어갈 수 있다. 원래 그는 소위 말하는 "꼰대"니깐.


하지만 더 짜증 나는 일은 업무를 진행 중에 발생했다. 무거운 표정으로 나를 부르더니 최근 작성한 기획서에 대하여 그는 이야기했다. 기획서에 내용 중 일부가 마음에 안 들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기획자로서 나의 이야기가 담긴 기획서를 작성하는 것도 좋지만 이 아이템은 분명 위에서 지시로 내려온 아이템이다. 최초 아이디어를 기획했던 사람의 의도를 담아서 작성해야 하는 것인데... 그는 이 기획안에 자신의 의도를 담고자 나를 닦달한다.


다시. 내가 짜증 난 이 상황은 자주 일어난다. 일주일에 많으면 2~3번씩 발생하는 상황이다. 그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사람이라면 나는 그의 의견을 따를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의견만 주장하고, 행여 그의 의도를 내가 담아서 작성한다 한들 기획안은 "수정"이라는 피드백으로 다시 돌아온다. (또,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부하 직원을 지켜주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이 반복되니 매우 소모적인 업무가 늘어난다.


하지만, 이러한 속마음을 나는 그에게 이야기할 수 없다. 워낙 무거운 회사 분위기도 그렇지만 일단 유약한 내 성격이 이야기하기가 조금 어렵다. 나는 최근 사람들이 말하는 '언택트족'에 가깝다. 사실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 것이 사실 조금은 어렵고 불편하다. 한 번쯤 나도 소리치며 '이건 아닙니다!!'라고 외치고 싶지만 오늘도 책상 앞에서 망상으로 그친다.


아마 지금 수정하는 보고서는 이번 주 내내 또 수정하고, 수정하고, 수정하겠지. 옛 말은 정말 틀린 말이 없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더니 배를 산으로 보내는 사공이 앞에 턱 하니 버티고 있다. 결국 나는 그의 의도대로 기획안을 수정한다. 아마 곧 다시 돌아올 기획안을 보며 작게 인사한다.

'오늘 밤에 다시 보자. 이쁘게 수정해줄게.'


나는 기획안의 수정을 지시했던 그 순간 내가 떠올린 일리아스의 첫 문장을 다시 떠올린다.

'여신이여. 분노를 노래하소서. 그리고 나에게 분노를 토해낼 용기를 주소서.'


내일 출근도... 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