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 양림동에 오픈한 이이남 미디어아트 뮤지엄은 어느새 광주의 힙플레이스가 되어 있다. 오랫동안 제약회사로 쓰이던 건물을 리뉴얼한 1000평의 예술공간은 마당에서 옥상까지 어디든 사람들이 깃들어 있다. 미술관 안에는 카페나 마당, 어디서 멈추어 마음에 드는 공간과 작품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SNS를 하는 사람들로 그득했다. 힙스터들의 인증샷 퍼레이드는 성수나 연남에서 흔히 마주치는 것이지만 그것이 미디어아트 전문 미술관에서 펼쳐지는 풍경이란 사실이 생경했다. 인스타에 이이남 스튜디오를 검색하면 불과 5개월만에 게시물이 6천여개를 훌쩍 넘어선다. '미디어아트라는 장르에 이렇게 사람들의 관심이 뜨거웠던가?' 불과 오픈 몇 달만에 힙플레이스가 된 이유가 무엇일지 물음을 품은 채 미술관을 걷기 시작한다.
미술관 곳곳에 깃들어 머무는 사람들 / 사진 _ https://www.facebook.com/meungja.lee
생각해 보면 미술관은 늘 엄숙하고 조심스러운 곳이었다. 내 움직임이 작품에 해를 끼칠까, 오래 서 있으면 다른 사람의 관람에 방해가 될까 눈치를 살며 동선을 조정해야 하는 불편한 장소였다. 그러나 이이남 아트센터에서는 마치 작품이 나를 위해 있는 듯 환대가 곳곳에 깃들어 있었다.
새로운 미술관의 탄생
미디어 아트 작품들은 정형화된 전시실뿐 아니라 스튜디오 곳곳 예상치 못한 장소들에 설치되어 있다. 정원이 보이는 카페 테이블, 커피를 주문하고 받는 카페의 데스크, 심지어 화장실로 이어지는 복도까지도.. 뜻밖의 장소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작품들은 미술관에 머무는 내내 선물처럼 주어졌다.
곳곳에 설치된 작품들은 전시라는 정형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지 않으니 보는 이에게 감상을 요구하거나 해석을 강요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동양과 서양의 고전과 명화들을 자유자재로 복재, 변형하고 복원해 내기도 하는 미디어 아트의 자유로움은 미술의 권위에 오랫동안 눌려왔던 마음에 해방감을 주기도 했다.
사진출처 _ https://www.facebook.com/meungja.lee
설치된 작품들은 스치듯 보면 회화지만 멈추어 서서 보면 움직임이 담긴 영상이다. 작품 안에 '스스로 존재하는 시간'은 그 앞에 자신의 시간을 내어놓고 멈추어 서는 이에게만 다른 시간의 문을 열어준다. 스튜디오 곳곳에는 원한다면 언제든 멈추어 서서 작품 속에 담긴 '빛과 시간'을 볼 수 있도록 의자가 놓여 있다. 심지어 사람들이 작품을 등진 채 앉아 있어도 작품을 해치지 않고, 함께 오브제가 되듯 서로를 감싸주는 배치와 동선이었다. 어쩌면 이이남 스튜디오가 불과 몇 개월 만에 수천 개의 인스타그램이 올라오는 힙플레이스가 된 것은 단지 '사진 찍기 좋은 곳'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예술의 환대'를 새롭게 경험하는 장소였기 때문 아니었을까?
사진출처 _ https://www.facebook.com/meungja.lee
한 인터뷰에서 이이남 작가가 미술관을 만든 이유를 "문화 민주주의를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는 답했다. '문화민주주의'라는 여섯 글자 속에서 스튜디오에서 가졌던 질문들이 답을 찾는다. 그의 말처럼 미술관의 본질이 작가와 작품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그가 이이남 스튜디오를 통해 전시하고 있는 것은 단지 작품만은 아니었을 듯 하다. 어쩌면 미술관 전체에 흐르는 소통과 참여, 머물며 깃드는 시간을 통해 삶으로 관계 맺어가는 '새로운 미술관의 탄생'이었을지도 ...
스며드는 삶, 뿌리내리는 예술
이이남 스튜디오는 심지어 건물 안뿐 아니라 마당과 입구, 정원과 옥상에도 사람들이 머문다. 어디서든 카메라를 꺼내어 마음껏 사진을 찍고, 작품에 담긴 시간 위에 자신의 순간을 겹쳐둔다. 그러나 일단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서면 정문으로 입장을 하든, 마당에서 이어지는 카페로 들어서든 물결처럼 이어지는 사람들의 움직임은 센터의 중심에 있는 피에타 상에 다다르게 된다. 성 베드로 성당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상을 재해석한 이이남의 피에타 상은 설핏 보면 모작인 듯 비슷하다. 그러나 이내 커다란 차이를 발견한다. 마리아의 품에 안겨 있어야 할 죽임 당한 예수, 그의 몸이 보이질 않는다.
마리아의 등 뒤로 위를 향하는 계단을 오르려 시선을 들면 중정의 가장 높은 곳, 허공 중에 매달려있는 죽임 당한 예수의 몸을 발견한다. 그 작품을 제대로 보기 위해선 마리아를 감싸며 위로 향하는 계단을 천천히 걸어 올라가야 한다. 계단이 끝나고 허공에 매달린 예수상에 다다를 즈음이면 유리 천창으로 들어오는 빛과 함께 하늘이 나타난다. 문을 열고 나아간 루프탑에는 양림에서 무등까지 광활한 하늘과 산의 능선이 펼쳐진다.
사진출처 _ https://www.facebook.com/meungja.lee / 뉴시스
분명 들어선 곳은 건물이었는데 도착한 곳은 하늘이다. '다시 태어나는 빛_ 피에타' 상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 슬픔과 비통의 가운데 앉아있는 마리아의 자리에서하늘에 머무는 예수를 향해, 빛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한다. 그렇게 작품 하나를 보기 위해 계단을 오르는 우리의 걸음을 '다시 태어난 빛'에 다다르는 순례의 여정이 되게 하고 있는 것이다. 해외의 먼 곳에서 크고 거창한 뉴스와 함께 들려오던 그의 전시는 그렇게 동네 한 켠 낮은 언덕 위, 삶의 일부로 스며들고 있다.
사진출처 _ https://www.facebook.com/meungja.lee
사진, 이한호
생명의 위로 _ 사라지는 시간 속에서 영원한 것을 찾다.
13명이 양림동 작가들과 16곳의 가게과 카페, 골목에서 열리는 양림 골목 비엔날레의 주제전에 참여하는 이이남 작가의 '생명의 위로'전은 2층의 전시실에서 열리고 있다.
'사라지는 시간 속에서 영원한 것을 찾다"라는 부제가 붙은 그의 전시를 보기 위해선 거대한 어둠 속으로 들어서는 일이 가장 먼저였다. 작가가 보내는 신호를 따라 빛의 방향을 향해 걷다 보면 어느새 탄생과 죽음의 경계에 다다른다.
거울로 이어지는 끝없는 공간 속에 펼쳐지는 작품은 우리가 감각하는 세계 너머로 우리를 안내한다. 어둠 속에서 거대한 파도가 달의 중력을 따라 물결치며 빛과 어둠 사이에서 명멸하는 생명의 리듬을 마주하게 한다. 마치 모태 속에서 심장소리를 듣는 것인 듯, 우주에서 지구의 자전을 보는 것 마냥 내 감각 너머 존재하는 우주의 탄생과 소멸의 리듬이 눈앞에 펼쳐진다. "빛을 잃어버린 현대인에게 사라져 가는 시간 속에서 변하지 않는 영원한 것을 질문"하고 싶다는 작가의 마음 앞에 거기까지 달려온 분주한 걸음이 고요히 멈추어 선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하고, 말해지지 않은 것들에 귀 기울이는 자리, 그곳에 가만히 멈추어 서는 시간 속에 '생명의 위로'는 영혼의 깊은 곳을 관통한다.
여행 중인 사람은 길을 잃을 때 지도를 편다. 내가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지 질문을 품은 사람은 걸음을 멈추고 사위를 돌아보기 시작한다. 그 '멈춤의 시간'이 없다면 여행은 늘 내가 원하지 않던 곳으로 나를 데려다 줄 뿐이다. 하물며 삶이랴.. 어쩌면 작가는 전시를 통해 '사라지는 시간' 속에서 '멈춤과 질문의 시간'을 선물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감각하는 삶 너머, 내가 속한 거대한 탄생과 죽음의 물결 속에서 내가 선 곳은 어디인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지 바툰 걸음을 멈추고 '생명의 지도'를 펼칠 시간을...
생명의 위로
생명의 위로 전시의 주제를 설명하고 있는 이이남 작가, 사진 이한호
위로를 건네는 예술
골목 비엔날레의 주제전인 '생명의 위로' 전시가 끝나도 이이남 미디어 아트 미술관에선 끊임없이 새롭고 아름다운 전시가 펼쳐질 것이다. 공간은 더욱 깊고 아름다워질 것이며, 세상의 수많은 여행자와 예술가들이 순례하듯 양림 동산에 올라 이이남 아트센터에 도착해, 머무는 시간의 기쁨과 생명의 위로를 건네어 받을 것이다. 그러나 내게 가장 소중한 위로는 주제전도, 상설전도 아닌 밤의 미술관이었다.
미술관의 가장 큰 작품은 건물의 벽을 허물고 담장도 없이 마당을 향해 불을 밝힌다. 낮의 미술관에 찾아올 수 없는 사람들, 미디어 아트 미술관이라는 낯선 공간에 들어설 엄두가 안 나는 사람들도 무심히 골목을 지나다 바라볼 수 있도록 마을을 향해 난 거대한 창문 속에서, 다른 세상이 빛나고 있다.
밤의 이이남 스튜디오, 사진_이이남
밤의 미술관 마당에서 어둠 속을 밝히는 작품을 보며 밤 산책을 하다가 문득 바르셀로나 가우디 성당에서 들었던 이야기가 겹쳐왔다.
"가우디가 바르셀로나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을 설계하며 성당의 내부도 중요하지만 외벽에 그토록 공을 들였던 이유는 주일날 교회 안으로 들어올 수 없는 사람들 때문이었어요. 깨끗하고 좋은 옷을 차려 입고 아름다운 교회에 들어올 수 없는 사람들, 글을 몰라 성서를 읽을 줄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성당의 파사드에 성경이 전달하려는 이야기를 부조로 새겨놓았다고 해요."
삶을 멈출 여력도, 차려입을 옷도, 예배에 드릴 연보도 없었을 도시의 가난한 노동자와 가족들, 그들에게 생명의 위로가 전해지길 바라며 성서의 내용들을 외벽에 그림으로 새겨 넣었다는 '돌로 만든 성서'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먼 곳에 있으나 이이남 작가의 미디어아트 미술관도 같은 방향으로, 사람과 마을을 향해 흐르기 시작한다.
미술관에 깃든 우주
양림에 머무는 짧은 시간 동안 도슨트 투어로 한 번, 저녁의 미술관을 보기 위해 두 번, 그리고 맑은 햇살 속의 미술관을 보기 위해 세 번째 미술관을 찾았다. 마지막으로 아침의 미술관을 향하던 길, 함께 여행하는 대학생 시원과 8살 꼬마 채아가 두런두런 미술관 이야기를 나눈다.
"채아야, 너 저 미술관 들어가 봤어?
"아니, 저게 뭔데?"
"너 아직 안 가봤어? 저기 가면 엄청난 우주가 숨어있어"
저 안에 들어가면 마치 바다의 탄생과 우주 한가운데 서 있는 것처럼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될 거라는 시원의 진심 어린 초대에, 채아는 답한다.
"우리 한 번 가 볼까?
8살 꼬마와 22살 여행자를 멈추어 머물게 한 첫 미디어아트 미술관, 이이남 아트센터 / 사진 김유라, 전혜정
미술관에 들어간 꼬마, 채아는 한참을 나오지 않았다. 매일 양림 동산에 꽃과 고양이를 보러 가서 내려오지 못하던 것처럼, 미술관 안에도 자꾸 들여다보고 싶은 생명들이 그득했던 모양이다. 미술관을 보고 나온 채아에게 시원이 다시 물었다.
"채아야, 언니 말이 맞지? 거기 우주가 있지?"
채아는 마음을 담아 한껏 고개를 끄덕여 준다.
며칠 후, 여행에서 돌아온 채아의 말을 전해 듣는다.
"나 거기 또 가고 싶어. 꽃이 많이 피어있고, 고양이도 예쁘고 우주가 있던 동네 말이야.."
이이남 작가의 미디어 아트가, 또 이번 골목 비엔날레의 주제 전시가 전문가들의 눈에는 어떻게 전달되었는지는 알 턱이 없다. 그러나 적어도 미디어아트라는 것을 생애 처음으로 마주한 꼬마에게, 미디어 아트라는 장르는 너무 차갑고 기계적이어서 관심을 가져본 적 없다는 스물두 살 여행자에게 새로운 삶의 창을 열어주었다면 이미 그것으로 충분한 '생명의 위로'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