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할 수 없는 사람의 여행 1
휴가철이 다가오며 세상이 온통 여행의 소식으로 들썩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동시에 지구 한켠에선 날마다 전쟁의 소문을 더해가고 삶이 뿌리채 뽑힌 사람들이 끝없이 국경을 넘고있다. 누구보다, 그 어느때보다 살기위해 여행과 이동의 권리가 필요한 순간이지만 국경을 넘어서는 순간 '국민됨'을 상실한 사람들에게 세계는 모든 여행과 이동의 권리를 박탈한다. 이들에게는 다시 돌아갈 '국민됨'의 자리도, 도착할 '시민됨'의 자리도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일년에도 몇번씩 전세계를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는 것은 '좋은 여권'을 가진 '국민됨'을 유지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특권일 뿐이다. 홀리터펜에 의하면 전세계 인구 중 항공기를 타고 자유롭게 세상을 여행할 수 있는 사람은 불과 5%에 불과하다. 만약 우리가 지금 국경을 자유롭게 넘어서고 있다면 우리는 이미 그 5%에 속한 '제국적 생활양식'을 구가하는 사람들이란 뜻이다. 2017년 유엔은 '모두를 위한 여행의 권리'를 천명했다. 그러나 그 '모두'에 난민은 포함되지 않는다. '여행할 수 없는 사람의 여행'은 '국민됨'과 '난민됨'사이 '시민됨'의 장소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세상의 경계가 모두 지워진 지구본 위에 서는 마음으로 국가와 국경을 너머 사람과 사람이, 그저 사람으로 마주하는 여행의 장소와 순간들을 기록하고 공유해 가려한다.
'국민됨'과 '난민됨'사이 '시민됨'의 공간을 열어가는 베를린 섬
베를린에 머물던 짧은 날들, 일요일 오후가 되면 박물관 섬을 찾아가곤 했다. 오후 4시의 베를린 섬 박물관들 로비는 저마다 다른 나라에서 온 난민들로 북적인다. 아랍어로 박물관을 안내해 주는 가이드투어, '뮬타카'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뮬타카 ملتقى Multaka는 아랍어로 '만남의 장소'를 뜻하는 말로 베를린 박물관 섬의 5개의 박물관에서 2016년 시작되어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난민을 위한 여행' 프로젝트를 일컫는다.
만남의 장소로서의 박물관
뮬타카 프로젝트를 처음 접하게 된 건 2017년 독일 ITB컨퍼런스였다. 18만명이 모이는 세계 최대규모의 관광박람회 컨퍼런스 중 한 세션의 주제가 “난민과 관광”이었다. 호텔의 남는 방들을 당일 도착한 난민들을 위해 정부에 염가로 내어주는 호텔들, 난민들에게 직업훈련과 일자리를 내어주는 레스토랑과 카페, 그리고 마지막은 박물관이었다. 호텔이나 레스토랑이라면 모를까 박물관이 난민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궁금한 마음으로 발표를 기다렸다. 베를린 역사박물관의 학예사 안나는 뮬타카를 간명하게 소개했다.
“뮬타카(Multaka)"는 아랍어로 "만남의 장소"라는 뜻이에요. 난민들이 와서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은 언어를 익히는 일이죠. 하지만 언어라는 것이 문화적, 역사적, 철학적 배경에 대한 이해와 연결이 없다면 쉽지않은 일이죠. 독일어는 더더욱 그러하구요. 박물관은 우리가 잊고 있던 공동의 과거, 우리의 연결을 기억하게 하는 시민들의 장소라고 생각해요. 때문에 독일시민사회와 난민이 만나는 '시민됨'의 공간, 또 난민과 난민이 시민으로 서로를 마주하고 연결되는 일에 가장 적합한 장소라고 생각했어요.”
뮬타카 프로젝트는 박물관 미술관만 100개가 넘는 베를린의 박물관섬을 중심으로 일어나고 일어나고 있었다. 난민을 위한 여행을 기획하고 함께하는 박물관은 모두 5개, 이슬람 미술관부터 보데미술관까지 박물관과 미술관이라는 공간을 거닐며 중동의 역사와 문화가 독일과 어떻게 잇닿아 있는지, 사람의 이동을 통해 문화가 오가고 섞인다는 것이 서로의 사회에 어떤 영향을 남기는지, 두 문화 사이에 흐르고 있는 공통점과 차이점은 무엇인지 문화와 예술, 유적 속에 깃든 보이지 않은 연결의 회로들을 발견해 가는 여정이었다.
여행을 통한 마주침과 연결의 장소, 박물관
토요일 오후, 베를린 박물관 섬의 역사박물관 로비에는 20여명의 난민들이 모여 투어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이드 리타가 인사를 건네고 서로가 소개를 한 후 천천히 안으로 들어가 독일의 역사와 아랍의 역사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어떻게 서로에게 영향을 끼쳐 왔는지 문화와 예술을 통해 지금, 여기 베를린에 아랍사람들이 다다른 여정의 근원을 찬찬히 되짚어 준다. 다른 가이드 투어와 다른 점이 있다면 처음부터 끝가지 아랍어로 진행된다는 것, 참여자들끼리 두런 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를 알아가는 틈을 열어준다는 것 정도였다. 그 그룹을 가만히 따라가던 시간, 아랍어를 못 알아 듣는 것을 눈치채고 살짝 영어로 가이드를 해 주기 시작한 사람은 이라크 사람, 불한(Burhan)이었다. 바그다드에서 왔다는 말에 서로 반가운 인사를 나누었다. 바그다드에 다녀온 적이 있다는 이야기에 그는 언제 갔었는지, 묶었던 호텔은 어디였는지, 어떤 여행이었는지 이것 저것을 물어왔다. 바그다드에 머물렀던 호텔이며, 재래시장, 전쟁과 점령 이야기들을 두런 두런 나누다가 그는 그만 고맙다 인사를 건네어온다. “누군가와 바그다드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니 참 좋네요.”
다정한 인사를 건네는 불한이 지나온 경로는 그리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이라크를 탈출해 육로로 그리스까지 다다라, 거기서부터 스스로 배를 몰고 독일에 도착했다고 했다. 수니파와 갈등 중인 시아파로부터 집을 비우고 떠나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문자와 협박 속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고... 그러나 이곳에서 독일어를 배우고 새로운 삶에 적응하는 것 또한 쉬운 일은 아니라는 삶의 응어리를 나누어 주시는 그의 통역 덕분에 투어를 이해하는 것은 물론, 다른 이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도 가능해졌다.
시리아에서 왔다는 난민 아마르와 아지즈는 이미 독일에 온지 일 년, 이년이 지난 신규난민들이었다. 여전히 정주권은 주어지지 않은 불안정한 상태였다. 어떻게 왜 가이드 투어에 왔는지 묻자 그는 말한다. "독일을 이해하려면 역사와 문화를 알아야 하는데 그게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박물관에서 지난해 말부터 이 프로그램을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조금 더 깊이 이해하고 싶어 오기로 결정했어요"
이방인의 눈으로는, 또 서툰 독일어나 영어로는 쉽게 다다르기 어려운 독일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할 수 있도록 유창한 아랍어로 열심히 가이드를 해 주고 있는 리타(Rita) 역시, 이년 전 시리아에서 건너온 난민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먼저 된 난민이 나중 된 난민을 안내해 주는 여행, 그것이 뮬타카였다.
그날 함께 박물관을 여행한 그룹 속에는 파키스탄에서 온 세청년 아지즈, 우스만, 아스랍, 또 시리아에서 온 두 친구 그리고 이라크 사람 불한 아저씨, 그리고 난민들을 돕는 활동을 하는 독일 대학생 조안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뒤섞여 있었다.
"대학에서 난민들을 돕는 여러 모임들이 있고, 그 모임에서 이 박물관 가이드 투어를 함께 지원하고 있어요. 저도 오늘 가이드 투어에 온 건 처음인데 좋네요"
조안이 다니는 대학에서 청강생으로 건축학 강의를 듣고 있다는 파키스탄 난민 아지즈는 유창한 언어로 상황을 이야기한다. "여권도 없이 육로로 여러 국경을 넘어 지난해 11월 독일에 도착했어요. 아직 난민촌에 살고 있지만 공부를 하고 싶다고 요청하니까 대학에서 청강생으로 공부하는 것을 허락해 주어도 건축학 강의를 듣고 있어요. 독일어를 공부하는 것이 가장 큰 과제고, 독일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한 숙제일것 같아서 왔어요. 여기 같이 온 두 친구는 모두 난민촌에서 만난 친구들이에요"
“가이드 투어를 하면서 박물관에 깃든 아랍의 역사와 영향을 보며 내가 왜 여기 이 낯선 곳까지 흘러들어왔는지, 왜 모든 것이 다 무너져 내리고 삶이 원점에 서게 되었는지 막막했던 마음에 조금 다른시선이 생겼어요. 아주 오래전 먼저 도착했던 이들을 통해 일어난 문화적 교류가 인류의 삶을 보다 창의적인 방향으로 발전시켜 왔다면 저의 도착도 무언가 다른 의미를 만들어 갈 수 있지 않을까 싶은..”
두시간 정도 투어를 함께 하고 박물관을 나와 인사를 나누는 사이, 어느새 서로 이름과 이야기를 나눈 다섯 명의 친구가 페이스북 친구를 맺는다. 머나먼 여정을 건너 낯선 땅에 도착해 새로운 일상을 시작해야 하는 이 특별한 여행자들과 함께 한 박물관 여행, 그 짧은 순간이 따뜻한 관계의 문을 열어주고 있음을 경험한 소중한 여정이었다.
"난민이 오고 있다. 관광은 무엇을 할 것인가?“
ITB 베를린 세계관광컨퍼런스에서 마주했던 그 질문에 독일은 이렇게 저마다의 영역에서 작은 평화의 틈을 열어가고 있었다. 박물관을 나오며, 그 질문에 다다르기 위해 독일 사회는, 혹 시민들이 얼마나 많은 질문들을 던져왔던 것일까 문득 헤아려보기 시작한다.
"난민이 오고 있다. 교육은 무엇을 할 것인가?"
"난민이 오고 있다. 교회는 무엇을 할 것인가?"
"난민이 오고 있다. 마을은 무엇을 할 것인가?"
그 수많은 선생의 질문들이 없었다면 어찌 관광은 무엇을 할 것인라는 먼 곳의 물음에 다다를 수 있었을까... 여행을 마치고 나서 비로서 로비에서 만났던 박물관 교육담당자, 로젠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되기 시작했다.
"이 여행은 너무 소중한 프로그램이에요. 박물관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고민하다가 지난 연말 파일럿으로 시작하게 된 프로그램이죠. 환영한다고, 서로 이해해 가자고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투어 때마다 난민들이 묻는 수많은 질문들 속에서 우리가 도리어 놀라곤 해요. 다른 사회를 이해하려고, 깊이 묻고 경청하는 사람들의 진지한 질문들 속에서 마음이 뜨거워져 울음을 터뜨린 적도 많아요. 박물관이 새로운 사회와 사람을 만나게 해 주는 공간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운 소중한 선물같은 프로그램이에요"
멀리서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위해 와주어 고맙다고, 입장료도 없이 입장을 도와주고, 마음을 나누어 준 그녀의 응대 속에서 독일 사회가 '국민됨'과 '난민됨'사이, '시민됨'의 공간을 어떻게 열어가고 있는지 마음 깊이 마주하는 여정이었다. 우리 안의 난민들, 또 난민처럼 유리하는 수많은 이웃들. 머지 않은 미래에 우리가 마주해야 할 북의 이웃들, 기후위기 시대 터전을 잃고 이주해야 하는 기후 난민들. 우리는 어떤 질문들을 던지며 살아가고 있는지 부끄러움 속에 돌아본다.
Info
뮬타카Multaka 프로젝트는 모든 연령층을 대상으로 진행되며 명확하고 간단한 언어로 방문객에게 다가가고 사람과 사람간의 직접적인 의사소통을 통해 난민들이 박물관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무엇보다 이 만남과 연결을 통해 난민들이 두고 온 삶과 이곳에서의 삶 사이에 사회적, 문화적 접촉점을 찾을 수 있도록 돕기를. 만남을 통해 연결을 강화하고 공공의 영역에서 난민들이 보여지고
더 많은 참여로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프로그램 시간 : 매주 토요일 오후 3시에 다음 박물관에서 아랍어로 진행됩니다.
장소 : 이슬람 예술박물관, 보데 박물관, 페르가몬 박물관, 독일역사 박물관. 고대근동 박물관
참여 : 만나는 곳은 항상 박물관의 매표소/안내소이며 참가는 무료입니다. 예약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편으로 요청 시 아랍어, 영어, 독일어를 구사하는 특별 투어가 제공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