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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수린 Dec 09. 2023

시댁 첫인사 지각한 썰 푼다.

MZ며느리의 시집살이


시댁 첫인사 나는 이렇게 망했다.


만나뵙기로 한 날 아침부터 정말 부지런히 움직였다. 전날 미리 꺼내둔 옷을 단정히 차려입고 서툰 화장으로 최대한 예의를 차렸다.

2시간 걸리는 곳이니 넉넉히 2시간 30분을 잡고 움직였다. 버스 2번, 지하철 환승 2번까지 대중교통을 4번 번갈아타며 이동해야 했다.


시간이 갈수록 이상했다. 왜 아직 여기까지 밖에 못왔지? 초조해질 때쯤 약속 시간이 다 되가고 전화기에선 불이 났다. 어디쯤이냐라는 대답에 가고있다는 말만 반복했다. 지하철은 가도 가도 끝이 없었고 종점에서 종점으로 이동하는 일은 그날따라 쉽지 않았다.



아씨 그냥 근처에서 잘 걸 하는 후회가 매초마다 몰려왔다. 그냥 종로나 광화문에서 뵙자고 할 걸 하며 내 탓을 해봐야 소용없었다. 어느새 종점에 다다르고 지하철 문이 내리자마자 그야말로 열나게 뛰었다.

오랜만에 신발장 밖으로 나온 빼딱구두가 멋쩍게도 계단을 세 개씩 올라가는 기함을 토하며 셔츠 안에 땀이 서리도록 내달렸지만 아쉽게도 하늘은 내 편이 아니였고 식당에 도착하니 약속 시간보다 30분이나 지나있었다.


날 기다리고 있던 남자친구는 화가 단단히 나있었다. 결혼하겠다는 애가 첫인사부터 늦으면 어쩌냐는 잔소리 융단폭격은 덤이었다. 머리로는 알면서도 그 모습이 참 야속했다. 내가 3시간이나 걸려 왔는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잘못이 분명하니 입을 다물었다.


호다닥 소리가 날 정도로 바삐 들어간 중식당 룸안에서는 시부모님과 막내 시누가 나란히 앉아 기다리고 계셨다. 삐죽삐쭉 흐르던 땀이 식다 못해 어는 느낌이었다. 시누 언니가 온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 따질 겨를이 없었다. 두말 할 것도 없이 죄송합니다 하며 고개를 수구렸다.


상식도 없는 이런 애 우리집에는 못들인다! 에힝! 하고 나가시면 어쩌지 싶어 눈을 질끈 감았는데 오느라 고생했다는 따뜻한 말에 후드득 눈물이 쏟아졌다. 늦은 주제에 울기까지 하고 너도 참 가관이다 생각하면서 우는 스스로가 어이없었다.


그렇게 눈이 삼각김밥이 될 때까지 한바탕 울고서야 대화 다운 대화를 할 수 있었다




빈 손으로 오기 뭐해서요(feat. 호들갑 부탁해요)


첫 단추부터 잘못 꿰었다고 생각했지만 막내 시누의 처사 덕분에 굳어있던 분위기는 유하게 풀어졌다. 나도 긴장을 풀고 차분히 할 얘기하며 식사가 끝나갈 때쯤 차 한 잔을 권하시길래 슬쩍 빈손으로 올 수 없었다고 쇼핑백 하나를 내밀었다. 가볍게 드시기 좋으실 것 같아서요 하는 상냥한 말과 함께.


여유로운 척 했지만 사실 저 떡은 며칠 전부터 예약해두고 전날 오후 압구정에 가서 모셔온 귀한 이북식 인절미였다.



당연히 빈손으로 갈 순 없으니 센스있는 선물이 필수 아니겠는가! 기왕 같이 살기로도 했으니 더 좋은 반응을 받고 싶어 심혈을 기울여 술 아닐 것, 사치스럽지 않은 것, 부담스럽지 않은 것 등 몇 가지 조건을 갖추고 긴 서치 끝에 얻어낸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때문에 어떤 반응을 주실지 두근두근 했는데 고맙다와 이렇게 생긴 떡이 다있냐 신기하네 말과 함께 떡은 도로 포장지에 들어갔고 그게 끝이었다.


안된다. 더 호들갑 떨어주셨으면 좋겠다구요. 제가 올마나 신경을 썼는데요! 서둘러 호들갑 텔레파시를 남자친구에게 보냈지만 애석하게도 지각사태로 아직 화가 나 있는 상태였기에 나를 쳐다봐주지도 않았다. 그렇게 쇼핑백에 떡이 갇히는 걸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그 순간, 시누 언니가 “어머 이 떡 귀한건데! SNS에서 유행하는 그 떡 맞죠?”하고 맞장구를 쳐주었다. 맛있다고 소문난 거라며 포장지에 다시 봉인 된 떡을 주섬주섬 꺼내 테이블에 올려주셨다.



언니! 말 안하고 왔다고 불편해 해서 미안해요! 저 언니를 사랑하기로 결심했어요. 역시 몇 개월 전 결혼을 한 지라 초보 며느리로써 텔레파시가 통한 게 아닐까? 그렇게 무사히 화두가 된 선물과 함께 센스있다는 칭찬을 받으며 힘들었던 첫 인사를 마쳤다.


30분이나 늦어 아쉬웠지만 시누의 혼신으로 유종의 미를 거뒀다. 호들갑 유전자 정말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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